연재칼럼 | 지난칼럼 |
‘그니까요 쌤~ 제가 자~알 알아 들었다니까요~ 잔소리는 이제 그마~~안~~’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헷갈릴 정도로 Y의 목소리는 평온했습니다. 이미 이렇게 나와버린 점수를 뭐 어떻게 하겠느냐.. 다음에 잘 하면되지.. 라는 생각을 만면에 드러내면서 그 녀석은 얄미운 미소를 올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부아가 쉽게 가라앉질 않습니다. 아무리 천성이 여유롭고 스스로에게 너그럽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전체 점수의 ‘사분에 일’을 실수로 날려 먹고도 이렇게 평온할수 있을까요? 흔히들 실수도 실력이라 하지만 Y의 경우는 조금, 아주 조금 다릅니다. 이 친구는 정말 말 그대로 단순한 실수로 점수를 날려버리는데 도가 텄지요. 기껏 계산해서 정답을 구해놓고는 단위를 안써서 감점당하고, 계산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소숫점 자리를 바꾸어서 감점당하고, 그렇게 정해진 어휘들을 사용해서 설명을 하라고 누차 강조해도 지 멋대로 초현실주의적인 설명을 써서 완전히 갈아업고.. 그런데 또 과학적 논리는 딱 들어맞는다는게 참... 제가 오죽했으면 Y의 별명을 조물주라 지었을까요. 지 스스로, 저만의 우주를 창조한다고 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또 성격은 얼마나 낙천적인지 이번에 못했으면 다음에 잘하면 되고, 또 다음에도 못하면 그 다음에 잘하면 되지 않느냐는 아주 긍정적이고 평온한 평상심을 유지합니다. 그러니 Y의 어머님과 저만 속이 빠글빠글 썩을 밖에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저도 조금 무덤덤해져서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안되겠더라구요. 90%에 육박할 점수를 그놈에 자잘한 실수 때문에 60%대까지 떨어뜨려 놓고도 헤번죽거리는 얼굴이 너무 밉상이더라니까요. 그래서 작심을 하고 하나하나 따져 묻기 시작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 친구 넉살이 너무 좋아서 저만 열을 펄펄 내는거지 정작 타격감은 ‘0’ 네요. 나중엔 제풀에 지쳐서 물만 꿀떡거리며 마시고서 마음을 가라 앉혔습니다. 이제 분위기가 조금 안정이 되는 것을 눈치 챘는지 Y가 제 딴에는 저를 위로(?) 한답시고 입을 열었습니다.
‘쌤.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그래도 공부를 안하는거는 아니잖아요. 시험을 못봐서 그렇지.. 선배형이 그러는데 저같은 타입이 대학교에서 공부를 잘 할 타입이래요. 그니까 제가 일단 대학교에 합격만 하면 그때부터는 정말 좋은 성적을 유지할수 있을거예요. 그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음? 이거 많이 들어본 얘긴데... 완전 데자뷰야.. 평행 우주인가??
순간적으로 Y의 말중에 한 단어 ‘일단’이 귀에 확 꽂히면서 몇 년전 한국으로 진학을 했던 한 친구의 얼굴이 퍼뜩 떠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부아가 슬금슬금 솟아 오르겠지요.
그 학생은 지금은 사라진 IB 전문 사립학교를 다녔습니다. 언제나 동급생 한명과 붙어다녔는데요, 그 중 하나가 나이가 많아 형이 되었고 다른 아이는 자연스럽게 동생이 되어서 짝을 맞춰 노는데 열심인 철부지들 이었습니다. 그 중에 형이라는 아이가 문제의 그 학생이구요. 그래도 한 살이 더 많다고 조금은 철이 들어서인지 공부할 분위기를 끌어가곤 했지만 그것도 잠시.. 한 동안 수업에 열중하다가도 뭔가 웃음보 터뜨릴 일이 떠 오르면 최소 5분동안은 낄낄대며 자리를 구르고 나서야 겨우 안정이 되는 사춘기호르몬의 부작용이 왕성한 두 소년들이었습니다. 한창 인기있는 유튜버들 이야기가 나와도 데굴데굴, 정치인이 한 말 실수가 기억나도 데굴데굴,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라도 데굴데굴 구르는 통에 바짝 눕혀진 학원 카페트가 되살아 날 틈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 두 녀석이 장기 결석을 했습니다. 거의 한 달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학원을 빠지더군요. 내심 괘씸해서 다시 돌아오는날 손을 좀 봐주리라 마음 먹었었는데요.. 혹시나 명색이 선생이라는 사람이 아이들 결석했다고 괘씸히 여겨도 되느냐 걱정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요.. 사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결석 사건이 있기 바로 전,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이 학교 학생들을 위해 방학 2주간 특강을 했습니다. 학교진도는 그야말로 눈꼽 만큼 밖에 나가지 않아서 도대체 무슨수로 남은 과정을 시간내에 마칠건지 의아하기 그지없었지만 그것은 2차적인 문제였구요.. 더 큰 문제는 그 눈꼽 만큼 배운 내용마저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핑계처럼 하는 말로는 뭐... 수업시간에 별로 가르쳐주질 않으니 도무지 공부를 할 방법이 없다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렇게 백지장처럼 머리속을 눈 쌓인 설원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지요. 여하튼 급박한 필요에 의해 광고로 알리지도 못하고 결성된 IB 12학년 정리과정을 운영하는 동안 그 둘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도 공부를 했었습니다.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밤 10시가 거진 다 되어서야 끝나는 8일동안의 집중과정.. 뭐.. 간간히 잠도 자고 비디오도 보고 했지만 제 입으로도 말하기를 그 정도로 오랫동안 집중해서 공부한 것은 처음인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워낙에 책상앞에 앉아있기 싫어하는 녀석들 이야기이니 너무 큰 기대를 해서는 않될 듯 하기도 합니다. ^^
그 짧은 2주간의 시간을 활활 태우면서 저는 나름 뿌듯했습니다. 몇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학시간을 희생해서 학습능력의 도약을 일구어내려 노력하는 청춘들이 대견했고, 특히 그 동안 공부에는 담을 쌓았음이 확실해 보이던 그 둘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집에서 챙겨 온 스텐드를 켜 놓고 공부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이제 시작이다. 늦은감이 없진 않지만 뭔가 만들 수 있겠다’ 싶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처음 수업이 있는 날..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바쁜일이 생겨버렸고 그 다음주는 학교에 일이 생겼고.. 그 다음주는 친구가 아팠고.. 속 사정을 빤히 짐작했던 저는 결국 두 주간 품었던 희망을 거의 접다시피 해야 했고..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기대감이 없었으면 밉지나 않았을텐데 내심 두 아이들을 키워갈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저는 솔직히 그 둘이 얄미워 보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수업 초반, 민망한 아이들과 속상한 선생님간의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나자 입담이 좋고 너스레를 잘 떠는 큰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 쌤. 제가요. 어릴때부터 전자회로 영재라고 사람들이 그랬거들랑요. 지금은 아직 뭐 성적이 그렇지만 일단!! 전자공학과 딱! 합격하고나면 저는 진짜! 재미있게 열심히 공부할 거 같아요. 일단! 합격하고 나면 그냥 다 쓸어버리는거죠. 제가~~ ㅎㅎㅎ”
“그래? 일단? 그러고 나면 이단은? 뭐.. 이단 하고 나면 삼단은 어떻할래?”
순간 튀어나온 아재개그를 잠시 눈 꿈뻑이며 해석하던 큰 아이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웃으며 제 개그감각을 꼬집으려고 입을 열려합니다. 주제가 흐트러지기 전에 제가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너네들 말야..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이순신장군한테 참패하고 결국 퇴각한 근본적인 이유가 뭔지 아니?”
역사에 관심이 많은 큰 아이는 작은 아이가 입을 열 겨를도 주지않고 그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그럴싸한 이유들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일본 내부의 분란, 선조가 데리고 올 원병에 대한 불안감, 예상치 않았던 강력한 의병활동, 심지어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어서’등등.. 그 즈음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있다더니 말문이 쉽게 트이는듯 했습니다.
“이유는 말야. 바로 네가 조금 전에 말한 한 단어 ‘일단’ 때문이었어.”
“?”
“일본군은 전통적으로 육지전에 강했지 해전에 강하지 못했거든. 섬나라 치고는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야. 어쨋던 그래서 그들의 전략은 일단! 상륙해서 북진하는 전략이었어. 일단! 상륙만 하면 자신들의 장기인 육지전 기술을 총 동원해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갈 수 있었으니 말이지. 그래서 그들의 선단은 전투선단이라기 보다는 병력수송선단이었고 배에서 싸우다 배에서 전사할 각오로 갑판에 오른 전투원보다는 최대한 안락하게 바다를 건넌 후 일단! 상륙해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누빌 각오로 무장한 ‘승객’들이 수송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 이순신장군의 혁혁한 무공은 바로 그들이 그 일단! 이라는 가정을 현실화 할 수 없도록 기대감의 싹을 자름으로써 이루어진거야. 그런데도 일본은 연속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단! 의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한양까지 점령하고도 퇴각하게 된거고 ..”
뭔가 충격을 받은 듯한 큰 아이의 멍한 얼굴과 또 다른 의미로 멍한 작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일단 시작한 쓴소리.. 끝을 보아야했지요.
“네가 지금 계속 입에 올리는 ‘일단’.. 그래 그 일단이라는 가정이 현실화되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말이다. 인생의 문제라는 것들은 언제나 그 기대치 높은 단어 ‘일단’의 실현을 막는 방향으로 발생하는 법이다. ‘일단 이 고비만 넘기면 됩니다’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희망을 걸수도 있지만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해 환자가 죽는 거고 ‘일단 취직만 시켜 주시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라는 입사 지원생의 열정은 합격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기에 가없이 사그라지고 마는거야. 내가 지금 네 희망에 초를 치겠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자는 거야. 너는 지금 ‘일단’ 입학한 후에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입학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그 동안 입버릇처럼 내 뱉던 그 한 단어가 생각만큼 간단한 의미의 단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되 돌아온 듯 얼굴이 굳은 큰 아이와 아직도 멍한 얼굴인 작은 아이.. 둘을 세워 놓고 전혀 딴판으로 생긴 친 형제간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하는 짓이 똑 같은 그 둘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얼마나 알아들었을지는 잘 알수없었습니다.
‘일단’은 가정형의 단어 입니다. ‘만약’보다는 더 의지적이고 확정적이지만 여전히 그 단어 안에는 기대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의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인으로 나서는 첫 관문이자 전문성을 선택할 마지막 기회인 대학진학을 앞에 둔 학생들에겐 그들의 심리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이 ‘일단’이라는, 가정형이면서 동시에 의지적이며 또한 희망과 계획과 지리한 공부에서의 해방을 내포한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삶을 조금 더 살아온 사람으로서 우리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일단’은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가정형이요 알지 못하는 미래형이지 확증되고 경험되는 현재 진행형의 단어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벌써 몇 해나 지나버린 예전 학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하자 Y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말 참견을 해도 서너번은 했을 아이가 조용히 듣고 있는 것도 신기하더군요. 잠시 숨을 돌리고 수업에 들어갔으니 그 속내가 어땠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다만 전해졌기를.. 선생이자 한 명의 어른이고, 동시에 ‘일단’의 경험자인 한 사람의 마음이 전해졌기를 바랄뿐이었습니다.
이제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불렀지만 오늘 뉴질랜드의 Term2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겐 5월이야 말로 가장 잔인한 달이라 부를 수 있을겁니다. 각 학교의 중간고사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배운 것은 별로 없는거 같고.. 인터널은 서너개씩 한꺼번에 닥쳐오는데 코리안나이트다.. 학교 캠프다.. 공부할 시간은 빡빡하고.. 주어지는 과업과 빠듯한 여건 사이에서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하루하루 불안해져 갑니다. 이런때 불쑥 솟아나는 마음이 바로 ‘일단’ 입니다. 일단 올해만 지나고 나면 공부에 모든 삶을 던져보리라, 일단 이번 시험만 끝나고 나면 우등생의 길을 걸어보리라, 일단 Term2만 마치고 나면.. 일단 패스만 해 놓고 나면...
하지만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단’의 장벽을 넘기지 못해서 그 이후의 삶을 살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스물스물 일어나는 ‘일단’이라는 가짜 희망은 실상 ‘회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잔인한 5월입니다. 부디 올 해의 남은 시간동안 ‘일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가정형을 진행형으로 탈 바꿈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