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나를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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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나를 망쳤다

0 개 618 김준

공부를 하라고 해서 공부만 했는데, 과연 그것이 정답일까?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기라도 하면 듣고 또 듣는 질문이 바로 ‘공부는 잘 하니?’ 였습니다. 분명 질문을 받은 사람은 저인데 대답은 아버지께서 하시곤 했지요. ‘지금은 잘 하는데.. 뭐 더 지나봐야 알겠지..’ 전교순위를 놓친적이 거의 없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사회생활의 기본자세인 겸양을 적절히 배합한 현답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 대답에 대해 친척어르신은 또 다시 아버지가 아닌 제게 한 마디 남기시죠. 


“그래,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해라.” 덕담이며 동시에 인생의 충고인 한 문장은 저 뿐아니라 학교를 다녀본 모두에게, 그 때 뿐아니라 지금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해묵은 조언이며 동시에 벗어날수 없는 굴레와도 같은 ’공부 열심히’...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바뀌어진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한체 여지껏 우리의 아이들을 붙들어매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 공부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매우 긍정적이게도 우리와 자녀들의 인생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주요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아이들을 실망과 자괴감의 굴레에 빠뜨려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공부를 해 본 우리 어른들은 공통적으로 가졌던 질문이 있습니다. 조기교육으로 시작해 대학입학에 이르기까지 한 평생을 죽어라 공부만 했는데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되면 뭔가 이상하지요.. 가면 갈수록 뭘 배우는지도 모르겠고, 배우긴 배웠는데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호기롭게 대학원 진학원서를 집어들었다가 과연 내가 학문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이내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떠 오르는 질문 하나.. 지금껏 풀어온 그 많은 문제들은 왜 극적인 순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걸까? 더 많이 배우면 진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것인줄 알았는데 왜 배우면 배울수록 전공분야조차 점점 더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걸까? 그럴수록 우리는 나의 부족한 지식을 탓하며 또 다시 책을 펴고 앉아 ‘공부’를 이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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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성공에 대한 기대보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지요. 이렇게 모든 어려움의 원인으로 부족한 지식을 손꼽고 그에대한 해법으로 공부만을 선택하는 행동을 사회학적 용어로 ‘공부중독’이라 부릅니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공부중독의 ‘독’도 poison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 무엇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열심히 공부하는 노력이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니, 그게 선생이 할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이 용어를 세상에 알린 사회학자 엄기호님의 책을 읽으며, 그리고 거기에 저의 경험을 더 해보며 매우 말이 된다 깊이 공감할수 있었습니다. 


그럼 너무도 생소한 개념인 공부중독의 증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가 말한 주요증상 중 5가지를 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호기심을 잃어버립니다.


“이거 알아서 뭐에 써요?”


사방이 캄캄한 동굴에 들어설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낍니다. 문학 수업을 듣다가 잘 몰랐던 작가의 글을 맞닥뜨렸을 때라던가 아니면 물리 수업을 듣다가 전혀 새로운 가설을 만난다던가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만 모르는 거 아냐?’ 하는 두려움과 ‘저 사람은 어떤 글을 썼을까?’ 하는 호기심. 


이때 호기심을 충족하려면 두려움을 억누르고 한 발짝 다가가야만 합니다. 손을 들어 질문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전화기를 들고 ‘지식인’께 여쭤보거나.. 이렇게 모르는 것을 정형화하고 그 단초를 빌미로 답을 찾고 끝내 진의를 알아내는 과정이 공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이 경험하는 입시 공부는 학생들의 두려움만 잔뜩 키워 놓았습니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답이 답이되는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틀렸다’며 빨간 X를 그었고, X가 많을수록 더 많이 꾸중을 들었습니다. 왜 틀렸는지 충분히 이해할 새도 없이 다음 문제를 풀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공부는 여전히 불쾌한 경험입니다. 틀려서 혼나고 몰라서 서러웠던 일만 떠 오릅니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나 틀렸던 것을 바로잡는 재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헤어디자이너가 될 건데 「세익스피어」를 배워서 어디 써먹어요?” 

“심리학과 나와서 먹고 살 수 있어요?” 

“약사랑 방사선기사 중에 누가 돈을 더 많이 벌어요?”


호기심을 잃어버린 우리 아이들은 이제 ‘당장 써먹을 수 없는’ 공부에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서 이 지겨운 공부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 뿐입니다. 본능적으로 공부중독의 해악을 감지한다고 할까요. 



두번째.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는 손대지 못합니다.


“그래서 답이 뭔데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자주 듣게되는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들은 대개 성격이 급하거나 자기 스케쥴이 정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국에서 온지 얼마되지 않은 학생인 경우도 있지요. 수업중에 문제를 풀게할 경우 저는 가능한 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며 중간 중간 가이드를 합니다. 스스로 답을 완성하는 과정을 연습시키는 거지요. 하지만 위에 언급한 부류의 학생들은 그것을 시간낭비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다음문제로 넘어가자는 표현을 “답이 뭔데요?”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현행학습의 현실적인 목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문제가 요구하는 정답을 찾고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스템에 완전히 침착된 학생들은 또 다른 답은 없을지 탐구하는 과정을 시간 낭비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최상위의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들은 ‘효율적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손과 발을 바삐 놀리지 않고 두뇌를 바삐 움직입니다. 풀어 본 기출문제지를 쌓아가며 성취감을 느끼지 않고 오랜 생각끝에 밝혀낸 기존문제의 또 다른 정답을 제시하며 성취감을 느낍니다. 표면적이고 효율적인 공부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토론식 수업에 힘들어 할 때 그들은 다른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취사 선택하여 자신의 의견을 더욱 공교히 보완합니다.


이 모든 차이는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답’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내 지식을 바탕으로 한 ‘나의 답’을 추구하느냐 하는 지식의 주체에 관한 인식에서 기인합니다. 학생들이 공부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인류의 지적인 업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채 그 결과만을 답습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인식하며 효율성만을 운운할 때, 진정한 공부의 유익은 발현되기 어렵습니다.  



세번째. 숫자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언제나 정보의 교환이 함께합니다. 산책길에 만난 두 강아지들의 만남에 냄새의 교환이 필수요소이듯 사람은 자신의 정보를 주고 타인의 정보를 받음으로 서로의 동질감을 확립합니다. 


그 정보는 사실 제한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색깔, 최근에 여행한 지역, 살면서 가장 키가 빨리 자랐던 시기 등등 서로 묻고 답하며 나눌수 있는 이야기는 쌓이고 쌓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나이, 거주지를 묻고 답한 후 약간의 어색한 침묵을 넘어서고는 아주 획일적인 질문들을 던져댑니다. 직장은? 최종 출신학교는? 연봉은? 


그리고 이러한 획일성은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학생들이 친구를 사귀는 불문율 중의 하나가 ‘비슷한 성적’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성적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우정을 쌓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해서 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성적은 곧 다른 인격’이라는 선입견과 배타성이 적용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공부중독에 빠진 사회와 개인은 꽤 자주 인간관계의 형성에까지 숫자를 적용하곤 합니다.  



네번째. 뭐든지 학원에서 해결하려 합니다.


가끔씩 웃자고 던지는 제 경험담이 있습니다. 제 결혼은 사기결혼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요. 어려서부터 유머감각이 부족했던 저는 코미디언들을 그렇게 부러워 했습니다. 재치있는 입담이며 거리낌없는 행동이며.. 그리고 그에 반응해 터져나오는 관객들의 웃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농담을 잘하고 싶었지만 선천적으로 유머세포가 부족한 저는 던져봐야 허탈하고 들어봐야 썰렁한 농담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제 아내는 그렇게 부족한 제 농담에 너무나 잘 웃어주는 겁니다. 아니 사랑스러울수 없었지요. 그래서 이 여자다 싶어 덥썩 결혼을 했는데요... 결혼 후 두달쯤 지나니 이제 더 이상 제 농담에 반응을 하지 않더군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주변의 친한분들께 사기결혼 운운하며 웃고는 했는데 또 이 얘기는 나름 재미있는지 즐거워들 하시더군요. 농담이 썰렁해서 겪은 에피소드가 더 재미있는건 도대체 어떤 경우일까요.. ㅎㅎ


솔직히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디 유머감각 가르치는 학원이 있으면 정말로 장기수강을 하고 싶습니다. 주변에 웃음꽃을 활짝 피워낼 수 있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학원이 있을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무언가 공부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을 공부로 해결하겠다는 표현을 간혹 접할 때가 있습니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 


이건 연애를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연애를 잘 모르면 연애에 도전을 하고, 실패를 하고, 눈물을 찍어내고, 또 다른 상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인데 그 잘 모르겠는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고 표현합니다. 당연히 전혀 진지하지 않은 장난말인것은 압니다. 


하지만 연애는 책으로 배울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우리가 때로는 인생을, 철학을, 가치관을, 신념을 책을 통해 배우겠다고 결심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책과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고 다른이의 확고한 의견을 접할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인생, 철학, 가치관, 신념을 가르치는 학원이나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서점엔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유튜브엔 성공공식을 가르쳐준다는 자칭 ‘자수성가’한 젊은이들이 빼곡합니다. 책을 써서 팔고 강좌를 개설해 수익을 벌어들이며 자신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쌈지돈을 가져다 바치며 기여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성공의 공식들이 얼마나 현실불가능한지 깨닫는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서점 서고를 기웃거리며 더욱 혁신적인 자기계발서를 찾아 헤멘다면 100% 공부중독에 빠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섯번째. 공부를 보호막 삼아 나를 가둡니다.


“저 아직 이 부분은 공부중인데요?”


연말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온 초여름 어느 날, 여전히 문제를 풀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학생에게 여지껏 이거도 모르면 어쩌냐고 야단이라도 칠라하면... 대뜸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럼 또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누구나 적정한 자기만의 속도가 있으니 느리다고 타박할 수도 없고 겨우 한다는 말이 ‘모르는거 있으면 말해라. 다시 알려줄게’ 정도입니다. 공부를 안한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하고 있다는데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는거지요. 그런데 이 학생이 시험을 치르고 나면 그 결과가 가관입니다. 공부중이라는 말이 아마도 이제 공부의 초입에 들어섰다.. 정도의 표현이었나 봅니다. 솔직히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퉁명스레 뱉어낸 말일겁니다. 


사실 우리 한국인의 사회는 ‘공부’에 대해 관대합니다. 사회 초년생이 실수를 해서 회사에 손해를 입혀도 왠만하면 ‘경험은 좋은 공부’라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눈 감아주고 10년이 다 되도록 고시원에 들어앉아 인생을 갉아먹고 있어도 ‘절차탁마’ ‘고진감래’ 운운하며 응원합니다. 


아마도 ‘공부 중’ 이라는 세 글자는 공부 중독에 빠진 나라와 사회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보호막인듯 합니다. 그런데 이 보호막을 덮어쓴 학생들에게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보호막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내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깨닫고, 남에게 평가까지 받는다는 게 두렵다보니 보호막속에 숨어들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효과적이고 아늑한거지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난 단지 준비가 덜 됐을 뿐이야. 난 여전히 가능성 있고, 준비만 끝나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라고 할까요. 적당한 정신 승리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만 공부 보호막 속에 숨어앉아 있어서는 기회가 왔을 때에도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맙니다. 


공부중독.. 생소한 단어이고 개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공부에 중독된 사회와 문화와 가치관속에서 공부에 중독된 개인으로 성장해 왔고 공부에 중독된 자녀들을 길러내는 중입니다. 어느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다음 컬럼에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들을 ‘공부중독자’가 아닌 ‘공부능력자’로 길러낼수 있을지 실제적인 방안에 대해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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