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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엔 사회학자 엄기호님의 글을 바탕으로 맹목적이고 성적지향적인 공부가 우리 학생들에게 장기적으로 미치는 부정적이 영향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간략하게 되짚어 본다면 첫째로 세상과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리고 둘째로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를 탐구하는 능력이 저하되며 셋째로 숫자로 자신과 남을 판단하는 성향이 강해진다고 말씀드렸지요. 네번째 문제로는 무엇이든 어딘가에서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마지막 다섯번째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기최면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글을 쓰면서 내내 저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보소 김선생. 당신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하는 소위 학원이라는 데가, 바로 당신이 지적하는 맹목적이고 성적지향적인 공부를 시키는 곳이야. 그런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공부의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할수가 있는거지?’
맞습니다. 세상의 모든 학원이라는 곳은, 그리고 사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은 향상된 성적만을 지향하고 시스템에 딱 맞아떨어지는 답안을 훈련시키며 경주마처럼 고득점만을 향해 달려가라고 학생들을 독려하는 기관들이고 사람들입니다.
지난번의 컬럼 내용에 비추어보자면 세상의 모든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주 나쁜 곳인 셈이지요. 그래서 맹목적인 공부의 폐혜를 줄이자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학원문을 닫는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으로 이런 사교육기관은 뉴질랜드 현행 교육체제에서 너무나 필요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공교육기관에서 제공하는 학습이 우리가 지양해야 할 맹목적인 방법으로 치우쳐져 있고 따라서 모든 교육이 지향해야 할 전인격적인 사회인의 양성에서는 멀어도 한참 먼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늘의 주제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컬럼의 말미에 예고했던바와 같이 이번호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을 ‘공부중독자’가 아닌 ‘공부능력자’로 키워내는 실천적 방안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만을 제기하고 손 놓고 있으면 ‘불평분자’가 되는거고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적절한 개선안까지 제시해야 ‘선구자’가 될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한가지 미리 말씀드릴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방안들은 과학과목의 학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로지 과학밖에 몰라서...
첫째. 현실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학습을 해야 합니다.
과학학습의 가장 중요한 시발점은 바로 ‘호기심’입니다. ‘왜?’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은 과학공부는 그야말로 뜬금도 없고 방향성도 없는 시간낭비가 되기 십상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과학적 발견은 익숙한 현상에 호기심을 더했을 때 시작되었고 세상을 뒤집은 뛰어난 발명들은 상상속의 그 무엇에 현실성을 더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분야의 학습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과학공부의 명료한 동기는 누가 뭐라해도 ‘알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접하고 공부해야 하는 학습의 양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아이들의 관심사와 교과과정이 이야기하는 학습내용 사이의 괴리를 생각해보면,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학습욕구를 끌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금방 알아채게 됩니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 눈을 피해가며 교과서 속의 위인들보다는 모바일폰 속의 인플루언서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온갖 흥하고 망하는 소리 소문에 휩쓸려 사건의 위기경중과 스스로에 대한 주체성까지 희미해져가는 아이들에게..
만약, 일상에서 수없이 접했던 식초와 대리석조각을 보여주면서 그 둘이 섞였을 때 만들어지는 기체방울들의 숫자를 세고 기록하라 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흥미를 가지고 접근해서 왜 기체가 만들어지고 그 숫자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눈을 깜빡일 수 있을까요?
만약, 행성의 공전주기와 항성으로부터의 거리가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면서 뉴턴의 중력장방정식을 이용해 공식을 유도하라고 주문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흥미를 가지고 접근해서 행성의 궤도가 변하는 이유를 사색하고 수학적인 공식을 유도하면서 그 우아한 전개방식에 감탄하게 될까요?
아마 지금 당장 자녀들을 생각해 보신다면 대부분의 독자께서는 고개를 가로 저으실겁니다. 몇몇의 지극히 과학지향적인 돌연변이들을 제외한다면 정말 멀고도 먼 이야기이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지루해하는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똑같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주제를 가르치면서 그 도입부만 조금 다르게 설정하면 기대이상의 학습효과를 거둘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Y11 화학수업시간, 대리석과 산성용액의 반응속도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선생님은 짧은 역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중세이전의 한 국왕과 그를 기리기위해 세워진 대리석 동상, 위엄있게 다물어진 입술과 단호한 눈매가 경탄스러운 사진속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입을 열어 호통을 칠 것만 같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이 올라옵니다. 산업혁명이후 등장한 대기오염과 그로 인해 야기된 산성비, 호수의 물고기들이 죽어나가고 런던의 젖줄이었던 템즈강이 걸죽한 석탄슬러시로 뒤범벅되어 하수처리장으로 변해버린 참혹한 현장..
맨 마지막 사진은 또 다시 위대한 국왕의 동상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동상은 온데간데 없고 사진속엔 동상을 받치고 있던 기단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의 한 구석에 위치한 또 다른 작은 사진속에는 산성비에 녹아서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뭉그러진 국왕의 얼굴이 찍혀있습니다. 산성비에 대리석이 녹아서 동상의 형체가 망가졌고 결국 흉물스러워진 동상을 철거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약 10분여에 걸쳐 진행된 도입부를 통해 실험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은 극대화 됩니다. 비록 그것이 화학반응 자체에 대한 흥미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지금하는 실험이 현실과 동떨어진 교과서 속의 지겨운 학자놀음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Y13 물리수업시간, 행성의 공전주기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2000년도에 만들어진 자료사진 하나를 스크린에 띄웠습니다. 그것은 NASA에서 만들어진 공신력있는 자료로 태양과 그에 속한 행성들의 상대적인 크기를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부터 이름을 불러갑니다.
Mercury, Venus, Earth..... 결국에 Pluto 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이름으로 불러보자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되겠습니다. 여기까지 가면 학생들 중 몇몇이 고개를 가우뚱 합니다.
뭐가 하나 많은 거 같은데.... 선생님은 또 다시 2007년에 만들어진 똑같은 자료를 다시 스크린에 띄워 올립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름을 불러나가니... 맨 마지막에 있던 Pluto가 빠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당장에 그 이유를 묻고 선생님은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명왕성은 타원형의 궤도를 가지고 있고 태양주위를 한바퀴 도는 동안 태양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거리변회를 보여주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거리가 극적으로 멀어져 2006년부터는 태양계의 행성에서 제외시키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공전주기가 250년쯤 되니 학생들 중에 무지하게 장수하는 인물이 있으면 되돌아오는 명왕성을 목격할 수도 있을거라는 농담까지 섞어서 말입니다. 물론 명왕성의 퇴출에 관련된 몇 가지 다른 천문학적 이유들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수업의 도입을 위한 내용이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아이들의 관심은 증폭됩니다. 거기에 더해 현재 태양계에 존재하는 관측가능한 행성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미지의 행성이 존재해야만 하며 우리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Planet X’라고 부른다... 까지 말하면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타원형의 궤도를 돌며 삐딱하게 행동하는 명왕성에다가 ‘X’라는 글자가 주는 음모론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이제 뉴튼의 중력장법칙은 교과서속에만 존재하는 따분한 물리공식이 아니라 태양계의 비밀을 밝혀주는 핵심공식이 됩니다.
물론 이런 재미진 도입부에만 귀를 기울였다가 선생님이 칠판에 글씨를 쓰는 순간 졸음에 빠지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수업내용은 더 많은 학생들에게 더 강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음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위의 두 사례는 2018년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진행한 교육학실험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주의적 수업과 공부를 과학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에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익스피어를 배우기 전에 세익스피어라는 인물이 허구일수도 있다는 주장과 함께 진짜 저자로 추측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는다면.. 아이슬란드의 경제 몰락에 대해 배우기 전에 캐시미어염소 농장의 흥망과 그로인해 야기된 몽골의 경제난에 대해 배우게 된다면..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해 배우기 전에 당시 철학자들이 당면했던 우주의 기원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답변들을 열거하며 배꼽빠지게 웃어본다면..
과연 ‘공부’라는 지극히 생산적인 정신활동이 오히려 호기심을 죽이고 학생들을 공부중독자로 만든다고 주장할수 있을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공부의 부정적 영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리고 그 해법이 무엇인지 명확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둘째. 결과(성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음.. 여러 독자분들의 고함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맹목적이고 성적지향적인 공부중독의 폐해를 방지하자는 사람이 성적주의를 지향하라 하다니... 이건 앞뒤가 안맞아도 한참 안맞는거 아냐?’
벌써 되돌리기를 클릭하는 마우스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결과를 지향하는 학습자세는 나쁜게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면에서건 더 나은 자신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어제보다 더 아는게 많아지고, 한달 전보다 더 기술이 정교해지고, 일년전보다 더 고매한 인격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공부의 덕이며 또한 공부의 결과, 다시말해 성적 입니다.
아무리 공부에 중독된 한국인 사회에서 그 부작용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가 가지는 원천적인 가치와 목적이 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의 결과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결과를 추구하는 과정에만 머물면서 스스로의 발전을 하루하루 미루고 있는 결정장애가 더 큰 문제일 겁니다.
지난호 컬럼에서 지적했던 공부중독의 한가지 증상인 ‘공부를 보호막 삼아 스스로를 가두는 행동’도 이에 속하겠지요.
성적만을 지향해서 그릇된 학습과정이 내포하는 모든 장기적인 우려들을 무시하고 내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매일매일 성장하는 자신을 인지하며 공부의 결과(성적)를 확인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이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향과 확인은 목표와 과정의 상호보완적인 의미이지만, 이 둘은 ‘성적’이라는 전제하에서 상반된 의미를 지닙니다.
며칠전 한 학생에게 쓴소리를 했습니다. 숙제를 해 오긴 해 왔는데 제가 답안지를 같이 챙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채점을 하지 않고 들고 온 겁니다. 그리고는 풀기 어려웠던 문제들의 해법만 물어보겠지요. 물론 질문에 답 해주고 그 자리에서 채점을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학생은 이미 스스로의 채점을 통해 자신의 공부가 이루어낸 결과를 확인할 기회를 놓친 겁니다. 내가 이 단원의 공부에 몇 시간을 투자했고 우리 부모님이 얼마의 수업료를 지불하셨고 그 투자의 결과로 내가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루어냈구나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자기확인의 결과를 놓쳤다는 이야기 입니다. 심지어는 스스로가 어떤 문제를 맞추고 틀렸는지도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어떻게 스스로의 발전을 가늠할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이 두려워 절절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학생의 공부법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불현듯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 떠 올랐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서는 변혁은 자신을 둘러싼 알의 존재를 인지함에서 시작되며 알 밖의 세상을 동경함에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공염불 외우듯하는 공부중독을 깨고 공부를 통해 자아를 성장시키는 공부능력자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허상적인 공부, 비현실적인 공부의 알을 깨뜨려야만 합니다. 동시에 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하루하루 확인하며 공부가 이루어 낼 미래의 자신을 꿈꿀수만 있다면 ‘공부능력자’의 당찬 모습이 영 헛된 꿈이진 않을 겁니다.
두회에 걸쳐 공부중독의 폐혜와 그것을 극복하는 공부법에 대해 나누어 보았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생활하다보면 저 조차도 ‘무조건’ 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교과과정의 조율이 어긋나서 결론을 먼저 알아야만 그 이유를 가르칠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고 때로는 학생들의 학력에 비해 너무 높은 수준의 내용 중에서 결론만 차용하여 가르쳐야 하는 경우이기도 합니다.
이론과 공식과 정의의 뒷 배경을 궁금해하는 아이들에게 그저 ‘이건 무조건 외워’ 라고 말 할수 없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단번에 이해될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애초에 교과서에 잘 설명되어 있었겠지요. 여전히 두 눈에 물음표만 잔뜩 띄워올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오늘도 고민합니다.
어찌해야 이 녀석들에게 제대로 된 공부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어찌해야 이 녀석들을 공부능력자로 키워낼 수 있을까...
또 다른 숙제 하나를 머리꼭지에 얹고서 오늘도 학원문을 엽니다. 희망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