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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역사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혁명은 수없이 되풀이했지만, 생명의 평등을 위한 혁명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인간을 위해 다른 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간위주의 환경운동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한다.’고 말할 만큼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앞서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안고 지내오다가 2007년 7월 폐암 선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지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에서 흙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흙이 모여 있는 곳이 토지요, 토지가 있는 곳이 곧 선생의 모든 것이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저항과 한의 정서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되돌아 온 선생은 주변의 치료 권유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선생은 자신의 육신에게도 억지를 부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10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2008년 5월 5일 82세의 일기로 대하소설 <토지>와 수십여 편에 달하는 장, 단편소설과 수필집, 시집들을 남기고 선생은 생을 마감합니다.
한평생 소설을 써왔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했던 선생은 마지막 여명의 시간에도 시를 썼습니다.
시는 나의 직접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라면서 시작의 즐거움을 토로하던 선생의 문학생애는 공교롭게도 습작 시로 출발하여 유작 시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옛날의 그 집> 중에서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처럼, 한 생애 큰 생명으로 살아오신 선생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더 큰 생명의 품으로 홀가분하게 떠나 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