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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유일의 공정 언론이었던 로메로 대주교의 방송
1932년 중미 엘살바도르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한 농민 약 3만 명이 살해당했다. 그후 군사독재정권이 무려 60년 간 엘살바도르를 통치했다. 1977년 3월 12일 루틸리오 그란데(Rutilio Grande) 신부가 살해되자 로메로 대주교(Oscar Romero)는 몰리나(Arturo Molina)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교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고, 전국적인 폭력 저항을 야기한 행위에 대해 대통령이 관련자들을 색출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부가 주최하는 어떤 공식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59세의 로메로 대주교는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장례 미사에서 “누구든지 나의 사제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를 건드리는 것이며, 앞으로 나를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했다.
▲ 한 가톨릭 수녀가 군부에 의해 암살된 뒤 병원에 안치된 로메로 주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다. 1980. 3. 23. AP 자료사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2월 3일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로 선포했다.
그후 로메로 대주교는 대교구 방송국(YSAX)을 다시 시작했다. “어느 날 그들이 라디오 방송국을 빼앗아 가거나 신문사를 폐쇄하더라도, 우리를 아무 말도 못하게 막거나 사제들과 주교들을 살해한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남아 있습니다. 사제가 없더라도, 여러분은 각자 하느님의 마이크가 되어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1979.7.8 방송) 로메로 대주교는 방송과 교구 주보를 통해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과 소통했다. 가난한 국민들은 로메로 대주교의 설교가 방송되는 단파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유일한 공정 언론은 대교구 방송이었다.
구약성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일화 하나를 요약하여 소개하고 싶다.
나봇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아합 왕의 별궁 근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아합 왕이 나봇에게 “내 별궁 근처에 있는 당신 포도원을 나에게 양도하면 그대에게 더 좋은 포도원을 마련해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현금으로 계산해 줄 수도 있네.” 그러나 나봇은 거절하였다. 아합 왕은 침울하여 음식도 들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물었다. “무슨 일로 상심되어 음식까지 물리치십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나봇이 포도원을 내놓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그러자 이세벨이 말하였다. “내가 나봇의 포도원을 당신께 선물로 드리리다.”
이세벨 왕비가 개에게 찢기리라는 말씀 전한 종교 언론 엘리야
그 여자는 아합의 이름으로 밀서를 써서 옥새로 봉인하고 나봇이 사는 성읍의 유지들에게 보냈다. “단식을 선포하고 백성들 앞에서 나봇을 상석에 앉힌 다음, 무뢰배 둘을 시켜 나봇이 하느님과 왕을 욕하였다고 고발하게 하시오. 그리고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시오.” 그들은 그대로 실행한 다음, 나봇을 돌로 쳐죽였다고 이세벨에게 보고하였다. 이세벨은 남편에게 말하였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때 하느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일어나서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가서 하느님의 말을 전하라. ‘네가 사람을 죽이고 그의 땅마저 빼앗는구나.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하느님의 말씀은 이세벨을 두고 계속되었다. “개들이 이세벨을 찢으리라“.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아합 왕에게 전하였다.
2500년도 더 오래 전 이스라엘 왕 아합을 윤석열 대통령과,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김건희 여사와 꼭 비유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지만, 예언자 엘리야가 하는 역할은 오늘 종교 언론이 반드시 해야 한다. 엘리아 같은 예언자 종교 언론이 한국에는 어디 없는가. 예언자 엘리야 같은 종교인 어디 없는가. 로메로 대주교 같은 주교 어디 없나.
▲ 호세 마리아 토제이라 신부가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소재한 메트로폴리탄 성당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성인 추대를 기념하는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2018. 10. 13. 연합뉴스 자료사진
시민들 고통 앞에 중립이 있을 수 있나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면 국민들은 빛 속에서 살 것이고, 언론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면 국민들은 어둠 속에서 살 것이다”라는 김수환 추기경 말씀은 종교 언론에게도 당연히 해당된다. 종교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 언론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이 종교 언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는 고통받는 백성들 편에 서야 하고, 종교 언론도 고통받는 백성들 편에 서야 한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 없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했다. 인간의 고통을 가장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뇌한다는 종교에 중립이 없다는데, 종교 언론에 중립이 있을 수 있겠는가. 종교에 중립 없듯, 종교 언론에 중립 없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키는 종교나 종교 언론은 악마의 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 종교 언론은 윤석열 정권 앞에서 중립을 취할 수 없고, 중립을 취해서도 안 된다. 종교 언론은 대통령 탄핵 청원 앞에서 중립을 취할 수 없고, 중립을 취해서도 안 된다. 종교 언론과 종교 지배층은 시민들의 고통스런 얼굴 앞에서 태도를 분명히 밝혀라.
종교 언론이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교 언론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세상의 부패를 못 본 척만 한다면, 그런 종교 언론을 어디다 쓸까.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습니까? 그런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입니다.”(마태 5,13).
종교 언론이 고통받는 백성들을 편들고, 억압하는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을 나는 어서 보고 싶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종교 언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모든 종교 언론의 회개와 분발을 촉구한다.
* 출처: 민들레 신문
■ 김 근수 ㅣ 해방신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