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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떤 이의 열정, 선의, 열린 마음 같은 것은 모양
도 빛깔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육체의 눈은 실수도 한다. 한
국살이 3년 반이 되었다는 파키스탄인인 라즈와 브라이언은 외모로 인해 종종 아랍인으
로, 이슬람교도로 오해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한국에 온 두 사람이 수
덕사를 찾았다
수덕사는 한겨울 아랫목 같은 절이다. 덕숭산 남녘에 자리해 따스한 햇살을 고루 머금고 있기도 하거니와 천년의 역사를 나이테처럼 품고 있는 가람이 자아내는 아늑한 기운이 심신의 긴장을 스르르 풀어준다.
경내에 들어선 브라이언(Brian IBRAHIM)과 라즈(Raj IBRAHIM)의 발걸음도 가볍고 여유로웠다. 두 사람은 난생 처음 절에 왔다며 자못 설레는 모습이었다. 인구의 약 97%가 이슬람교도이고 2%가 시크·힌두교도이며 1%가 기독교도인 파키스탄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자연스레 다양한 종교를 경험했지만 불교는 미지의 영역에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도인 두 사람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한국에 왔고 주위 한국인들을 통해 들어본 템플스테이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26세인 브라이언은 영어강사로, 57세인 라즈는 가구공장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브라이언은 미국에서 7년간 살며 캘리포니아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라즈는 두바이에서 25년 간 용접기술자로 일하며 기술팀을 이끌기도 했다. 나이도 하는 일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함께 살며 벗으로 지내고 있다.
“수덕사에 오기 위해서 제 수강생들에게 부탁해서 영어강의를 일요일로 미뤘어요. 라즈는 모처럼 휴가를 냈고요. 라즈는 오늘 오전까지도 일하다가 왔어요. 저희는 한국인 못지않게 바쁘게 살고 있지만 이번 템플스테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새로운 걸 경험 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
설렘의 조건
두 사람은 아늑한 기역자 한옥인 수덕사 템플스테이 숙소 완월당(玩月堂)에 여장을 풀었다. 완월당이란 ‘달을 즐기는 집’이란 뜻을 지닌 이름이라고 알려주니 브라이언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집을 그저 번지수로, 건조하게 숫자로 부르기보다 뭔가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불러본다면, 반복적인 일상공간도 특별하게 다가올 터이다. 절은 공간마다 고유의 이름이 있다.
한지를 바른 방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을 때 수덕사 템플스테이를 이끌고 있는 주경스님이 찾아오셨다. 브라이언과 라즈는 한국어가 서툴러서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주경스님은 쉽고도 유머 있게 영어를 구사해 소통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예컨대 스님은 “제 이름은 주경입니다. 주(宙)는 우주를 뜻하고, 경(耕)은 밭을 간다는 뜻이지요. 아, 그래서 제가 참 바쁘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서 좌중을 즐겁게 했다.
스님은 두 사람을 수덕사 경내 곳곳으로 안내해주셨는데 그들의 발걸음은 자주 멈추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가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을 궁금해 하며 묻는 것 같았다. 라즈는 “스님, 저 나무는 얼마나 되었나요?”라고 대웅전 앞 느티나무를 가리키면 조금 있다가 브라이언이 “스님, 대웅전 안에서 무서운 표정을 한 사람이 그려진 그림을 보았습니다. 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스님들은 왜 머리를 기르지 않는지요?” “절 입구에서 사자 석상을 봤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나요?” 같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님은 대웅전 앞 느티나무의 나이는 족히 300년이 넘었고 대웅전 안 그림의 무서운 얼굴이나 사자 석상은 신성한 곳을 지키는 불교의 ‘보디가드’이며 스님의 삭발은 속세와 인연을 끊은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하나하나 설명해주셨다. 열정적인 학생들의 연이은 질문에 스승의 얼굴엔 흐뭇한 웃음이 가득 했다. 브라이언이 “와, 스님이 알려주시는 모든 것들이 참 새롭고 신기해요. 그저 놀라워요!”라고 하자 라즈는 “오늘, 여기 수덕사에서 이런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스님을 비롯해서 이곳에서 만난 분들의 친절에 감동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설렘 가득한 두 사람의 모습은 단지 템플스테이를 처음 경험하는 데에 기인한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종교를 향해 열린 마음, 낯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호기심, 무엇보다 고마움을 느끼는 선한 마음이 설렘의 에너지를 선사하는 듯 보였다.
첫째 잔은 향, 둘째 잔은 맛, 셋째 잔은?
일찍 찾아온 산사의 저녁, 두 사람은 주경스님과 차담시간을 가졌다. 스님이 내어주신 차의 향은 은은했지만 대화는 뜨거웠다.
“스님, 누가 부처입니까?”
“자신과 우주의 법을 깨달은 자입니다.”
“어떻게 부처가 됩니까?”
“명상! 쉬운 길이지요. 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상관없어요. 불교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봅니다.”
“왜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이 납니까?”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절대 차별과 배척의 무기가 아닙니다.”
거침없는 질문과 막힘없는 답이 숨 막히게 이어졌고 깊은 울림을 전했다.
“차는 첫째 잔은 향기로 마시고 둘째 잔은 맛으로 마시지요. 셋째 잔부터는 마음으로 마십니다. 자, 이제 이제 명상을 해봅시다. 무릎 위에서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포개고 엄지끼리 맞댑니다. 눈은 반쯤 감고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고요히 합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정적이 흐른 뒤 스님의 죽비소리 세 번이 명상의 종료를 알렸다. 숙소로 가는 길, 총총한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라즈는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곁에서 브라이언이 공감의 웃음을 지으며 “이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다를 것 같아요. 첫째 잔은 향, 둘째 잔은 맛, 그리고 셋째 잔은 마음으로 마시는 거죠!”라고 말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다음날 새벽 브라이언과 라즈는 수덕사 대웅전 마당을 쓸며 수행자의 울력을 체험한 뒤 경내를 산책했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사천왕문의 양 옆으로는 오솔길이 이어져 있고 주변은 아기자기한 정원처럼 가꾸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오솔길을 걷고 다시 황하정루(黃河精樓)를 지나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계단을 따라 점점 높이 오르니 어제와 다른 새로운 느낌이 들고 성취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산책길에 기와불사도 했다. 브라이언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파키스탄어(우르두어)로 가슴 속 바람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누리는 데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적었다고 했다. 그가 적은 글이 담긴 기와는 가람 보수작업 등을 할 때 사용된다고 하니 자못 감격스런 표정이었다.
‘마음의 연꽃을 피우는 집’인 심연당(心蓮堂)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정현주 수덕사 템플스테이 팀장이었다. 정 팀장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펼쳐지는 심연당에서 브라이언과 라즈에게 108염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며 108개의 구슬 하나하나가 인간의 번뇌를 상징한다고 알려줬다. 또 하나의 새로움을 만난 두 사람은 소년 같은 표정으로 염주 만들기에 집중했다. 라즈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졌는데 이 구슬은 천천히 해야겠어요. 수행이니까! 구슬 하나하나가 살펴야할 내 마음이니까!”라고 이야기했다.
프로그램을 마치자 제법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첫눈 오는 날, 수덕사를 다시 찾아도 좋으리라. 눈은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어두웠던 곳에도 소복이 순결한 빛을 켜준다. 우리가 첫눈을 기다리는 것도 겨울을 밝히는 첫 빛의 설렘 때문일 것이다. 브라이언과 라즈는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기에 새롭게 마음의 눈을 뜨고 지혜를 확장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의 눈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오롯이 전해져 설레게 했다. 첫눈처럼!
■ 예산 수덕사(禮山 修德寺) 템플스테이는?
깊은 역사를 간직한 수덕사는 문화의 향기가 그윽이 전해지는 사찰이다. 백제 침류왕 2년(358년)에 창건되었으며 한국 근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인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선풍을 진작시킨 선(禪)의 종찰로서 곳곳에 예술의 자취가 어려 있다. 전 방장 원담스님의 선기가 어린 선(禪)미술관,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현대미술의 거장 이응노 화백과 최초의 여류화가이자 사회운동가 나혜석의 예술혼이 담긴 수덕여관, 시인이자 비구니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일엽스님이 말년에 주석했던 환희대 등 근대 문화와 예술의 산실 속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덕사이다.
수덕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주제는 ‘길 없는 길’이다. ‘과거라는 길도 없고, 미래라는 길도 없으며 오직 걸어가는 지금 이 길만이 있을 뿐’이라는 가르침을 새기는 다양한 포행길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에 이르는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도보 10분 거리의 길이다. 수좌스님들이 공부하는 능인선원이 있는 정혜사로 가는 길은 도보 40분을 예상해야 한다. 수덕사 1080계단 → 소림초당 → 만공탑 → 금선대 → 정혜사의 코스로 금선대, 만공탑 등에서 옛 선사들처럼 명상을 해보는 것도 좋다. 수덕사에서 천장사까지 이어지는 도보 2시간 길은 경허·만공스님의 발자취가 어린 곳으로 지금도 선원 수좌들이 포행하는 코스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
041-330-7789 I www.sudeoksa.com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