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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설날에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했다. 얼마 전의 통화와 달리 아버지께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다. 한참을 아버지의 기억을 위해 애를 썼는데, 그 덕분인지 아버지의 기억은 조금이나마 되돌아 왔다.
다른 때와 달리 전화 통화를 아주 오랫동안 했다. 제법 많이 비어져버린 아버지의 기억 상자 속에는 멈춰버린 시계가 놓여 있었다. 며칠 후에 뉴질랜드에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기억의 배는 너무나도 빠르게 망각의 강을 저어나가고 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버지의 말씀에 장단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자주 전화하라고 하셨다. 이제껏 한 번도 자주 전화하라고 하셨던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속마음을 보여주신 거 같다. 요양원 생활은 어떠냐고 하니, 아주 행복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생각에 맞춰서 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 후에 요양원에 오라는 말에도 “예”라고 대답하고, 며칠 후에 뉴질랜드에서 만나자라는 말에도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 전화하라는 말에만 진심을 다하여 “예”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아버지와의 대화는 아버지의 기억에 맞춰서 진행이 되어 갈 것이다. 그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행복하시면 그만인 것을. 나도 앞으로 아버지처럼 늘 즐거운 나날을 보내리라.
요즘 나는 기분이 좋다. 더위에 좀 지치기는 했어도 좋은 인연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살맛이 절로 난다. 사진과 동영상으로나마 손녀딸 유은이의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나의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내 팔자려니 하면서 그 답답함을 참고 잘 지내다가도 분기점을 넘겨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이 든다. 좀 우아하게 늙으면 어디가 덧나나. 갈수록 더 쓸데없는 고집이 늘어나며 어기짱까지 부린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실강이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깔끔하게 해야 한다는 내 말에 화를 내고, 늙으면 호르몬 때문에 냄새가 나니 향수는 고사하고 로션이나 스킨만이라도 바르라 하면 짜증을 낸다.
화장품을 사주면 쓰지 않고 썩혀서 버리고, 옷 역시 내가 권유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집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주위에 친구 한 명이 없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두서너 명의 친구라도 있었는데, 뉴질랜드에 와서는 완전 고립된 생활이다.
옷을 사주고 싶어도 함부로 사줄 수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입지도 않거니와 옷을 입는 센스는 낙제를 면치 못한다. 말주변도 없어서 어쩌다 한마디 내뱉으면 오해사기 일수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적응력도 빵점이다. ‘Change’의 시대에 발맞춰서 함께 변해가야 하는데, 골동품처럼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생각만 골동품인 것이 아니다. 행동도 옷 스타일도 그 모든 것들이 과거에 그대로 멈춰 있다.
이 모든 것을 그의 성격 탓으로 돌리다가 영성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 탓으로 돌렸었다. 근 10년 넘게 그에게 영성 책도 쥐어주고 뭔가 바뀌기를 기다렸으나, 본인이 바뀌려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 자신을 바뀌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저 그가 착한 사람이란 걸 알기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도 사그라지곤 했다. 사실 그와 함께 살아온 나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가 안쓰럽기도 하다. 모두 다 그 자신이 제대로 풀어가지 못했던 사회생활이었지만, 힘들게 살아온 것은 확실하다.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런치바 일을 해보았으나 그동안 한국에서 살아왔던 생활보다 더 고달팠으며 그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외국에 와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만은.
아무튼 3년 반 만에 런치바 일은 막을 내리고, 그가 원하는 직장에 취업을 하려 공부를 했으나 학위를 따고 나서도 취업의 문은 굳게 닫혀있기만 했다. 한국에서도 직장생활이 힘이 들었는데, 뉴질랜드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직업을 갖던 사업을 하던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제일 중요하지 학벌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남편이 이 모든 것에 미약했던 것은 아마도 내 탓이 컸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 나갔으니, 나에게 많이 의지를 했었을 거 같다. 하지만 돌다리를 두들기기만 하지 건너지 못하는 남편. 그를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다간 생계유지가 안 되니 나라도 움직여서 해결해야 하지 않은가?
남편이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지 못하니, 내가 이리저리 일을 만들어서 하게 해보았다. 하지만 다 나가리. 그러다가 찾아낸 게 에어비앤비이다.
내가 일한다고 집 떠나 웰링턴에 있으면서 에어비앤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집안의 남는 방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에어비앤비. 그 덕분에 환갑을 넘긴 나이에 남편의 직업은 시작이 된 것이다.
에어비앤비를 하던 중 객지에 있었던 나는 쓰러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남편에게 이발을 해라, 면도를 해라, 말끔하게 입고 있어라, 몸 냄새가 나지 않게 신경 써라.......등 가끔 잔소리를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 잔소리를 한 번 하려면 몇 번을 참고 참다가 꺼내게 되는데, 그 소리가 무척 고까운가 보다. 하지만 비앤비도 서비스 업종인데, 이왕 일을 할 거면 제대로 잘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남편들이 부인의 조언을 잔소리로 여기면 안 된다. 고마운 마음으로 경청해야 본인에게 좋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부인의 말에 귀 기우려야 한다. 부인이 먼저 죽고 나서 후회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 남편은 7월생이다. 내년 7월 남편 생일에 골드 카드를 받게 된다. 그 시기를 중점으로 나는 남편에게 자유의지를 주겠다고 선언을 했다.
어제, 옷 때문에 다툼을 하다가 번듯 떠오른 생각을 전한 것이다. 골드카드를 받고 나면 스스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오게 되니, 그때 이혼을 하고 혼자 나가서 살든지, 아니면 그냥 이 집에서 살면서 내 조언을 듣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내년 7월이 되기 전까지는 여기가 남편의 직장이다. 이 직장을 그만두면 한동안 살길이 막막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해야할 일은 다 하면서 살아야할 것이다. 참 치사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오죽하면 그랬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