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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무래도 사화관이나 정치관은 (자본주의에 좀 회의적인 만큼) ‘진보적’인지 몰라도 생활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인 것 같습니다. 전자 기계들을 다룰 때마다 대단한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폐북을 하긴 하는데, 여러 폐친들의 포스팅들을 쭉 밑으로 내려가서 대충대충 훑어보는 것은 제게 ‘낙’이라기보다는 고통입니다. 책을 보는 습관대로 한 포스팅을 천천히 보면서 그 관련 생각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고, 서로 관계도 없는 여러 포스팅을 단숨에 같이 대략 훑어보기가... 힘들고 부자연스럽습니다. 페북은 그나마 ‘텍스트’ 위주라서, 한국 소식을 다양하게 원격으로 접하는 방도라고 생각하여 참고 이용하는 것인데, ‘텍스트’도 아닌 ‘사진’ 위주의 SNS이나 아주 짧은 텍스트 위주의 트위터를 도저히 접할 만한 인내심은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제게 제일 행복한 시간은 커피를 들이마시면서 아주 두꺼운 책을 조금씩 즐겨 읽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구식 중의 구식이죠.
그런데 제 아이나 그 동급생들을 보면, 이건 완전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추리소설이나 통속성이 강한 연애 소설이면 모를까, 그들은 ‘두꺼운 책’을 일단 읽지 않습니다. 텍스트라면, 아주 짧고 단편적인 텍스트만 접할 줄 알고, 한 텍스트에 10-15분 이상 집중하지 못합니다. 일단 텍스트가 아닌 ‘영상’ 위주로 세상을 만나는 모양인데, 한 영상을 오랫동안 진지하게 본다기보다는, 여러 단편적인 짧은 영상들을 번갈아 보는 걸 즐기는 것 같습니다. 틱톡처럼 여러 짧은 비디오들이 서로 아무 관련 없이 나오는 그런 SNS은 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모양입니다. 한 비디오에 대해 오랫동안 반추하고 사색하기보다는, 본인의 고뇌 등등을 잊기 위해서인지 ‘생각’을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삼아 서로 무관한 짧은 영상이나 사진 속으로 푹 빠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한시간, 두시간씩 같이 거닐면서 자유가 인류 발전의 숙명적 목적이라는 헤겔의 명제를 열띠게 토론했던 소련 시대 말기의 아이들은, 이 세대로서는....아무도 거의 고대인, 중세인쯤으로 보이겠죠?
꼰대질 할 생각은 없습니다. 소련이 그 말기까지 끌고 갔던 전후의 관치 경제, 관치 사회는 지성적인 것만도 아니었고, 좋게만 볼 게 당연 아닙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만약 시간여행해서 1987년, 저의 고등학교 1학년으로 왔다면 아마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일체 기립하여 인사하는 장면부터 너무 생소해서 도망갔을 것입니다. 권위주의가 일상이었고, 학폭 등의 문제들이 다 은근히 있어도 ‘공론화’의 대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1968년 혁명이 전후 관치 사회 권위주의 문화 청산을 시작한 셈인데, 오늘날 세대에 접어들어 그 청산이 미투운동 등과 함께 그 완료 단계에 이르는 것이죠. 헤겔이 말한 ‘자유로의 행진’이 있다면 사실 이런 것도 바로 자유로의 발전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헤겔의 변증법대로 오늘날도 - 늘 그래왔듯이 - 진보와 퇴보가 동시에 함께, 평행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권위주의, 남성우월주의, 백인 인종주의 등이 드디어 본격적인 도전을 받는 해방적인 발전과 동시에, 근대 문화 발전 속에서 축적돼온 ‘개인 내면’이라는 유산도 SNS자본, 전자자본의 맹공을 받아 점차 무너져가는 것이죠.
우리가 그 생각을 자주 하지 않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의 내면’은 대체로 근대적 발견입니다. 조선시대 일기 자료 같은 걸 보면 보통 하루하루에 이루어진 일, 인간관계, 각종 의례, 선물 주고 받기, 그리고 시사에 대한 생각 등을 적는 거지, 자신의 심리 상태 변화의 추이나 하늘을 보면서 드는 단상들을 잘 적지는 않았습니다. 별들을 보면서 “별 하나에 추억, 별 하나에 사랑, 별 하나에 쓸쓸함, 별 하나에 동경, 별 하나에 시,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상상하면서 그 상상을 시로 적고 그 시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근대’의 전형적인 풍경이지, 전근대 사회의 풍경과는 아주 다릅니다. 전근대 사회는 우리처럼 책을 묵독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소리 내서 읽곤 했었죠. 두꺼운 책들은 그 때도 많았지만, 그 내용은 ‘사색’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습득’의 대상이었습니다. 유교는 그렇다 치고 이단 격이었던 불교 문화도 ‘사색’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색은 ‘번뇌’, ‘알음알이’ 정도로 취급됐고, 간화선이 추구하는 돈오, 오도, 깨달음은 모든 사색들을 다 상대화시켜 불필요하게 만드는 (지성적이기보단) 종교적 체험이었습니다. 천천히 읽고 천천히 혼자서 생각에 잠기고, 그 생각을 반추하고 즐기는 내면의 풍경은 대표적으로 근대적 풍경이죠.
그 근대는, SNS과 영상 문화의 공격 속에서 이제 거의 해체 단계에 온 것 같습니다. 인스타, 스냅차트, 틱톡 등을 매일 보면서 큰 세대로서는, 헤겔이나 칸트나 맑스의 두꺼운 책들은...뭐, 탈무드나 우파니샤드, 사서삼경처럼 ‘이질적인 문화’ 정도일 것입니다. 지금 도래한 공황에 그 생계 문제가 심각해진 밀레니얼들이 ‘다시 맑스로!’ 회귀한다 해도 (회귀할 가능성은 결국 크다고는 봅니다!) 아마도 <자본론>을 유튜브 비디오로 익힐 것이지 읽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읽고 사색하는 것은, 그런 훈련을 어릴 때부터 받아온 소수의 특권으로 된 셈입니다. 아마도 총자본 이해관계의 차원에서는 긴 텍스트를 마스터하고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세대의 출현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 시스템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커다란 ‘문제’입니다. 오늘날 레닌이 다시 나타나서 <불꽃> (이스크라)와 같은 대중적인 혁명적 신문을 발행하자면 신문 대신에 유튜브 채널 하나 만들 것이겠죠? SNS가 던진 도전을 충분히 인식하고, 언젠가 극복하지 못하면 급진적 변혁의 꿈을 접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출처 : 박노자 Vladimir Tikhonov 블로그
■ 박 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