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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혜숙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덤불숲에 던졌다. 딸그락, 빈 도시락에서 수저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머리 위에선 큰 매가 원을 그리며 날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나는 가파른 잿길을 어질어질 현기증을 일으키며 겨우 걸었다.
이튿날 담임선생에게 불려 나갔다. 도시락의 행방을 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우물거렸다.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에 회초리가 떨어졌다.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선생은 도시락을 덤불숲에 버려두고 간 이유를 물었다. 나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젖가슴이 부풀어 오를 나이였다. 조숙한 아이들은 총각 선생이었던 담임에게 연정을 품었다. 하숙을 하던 선생은 종종 빈 도시락을 집에 가져가는 심부름을 시켰다. 여자아이들은 서로 그 일을 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안타깝게 차례기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선생이 나를 불렀다. 나는 선생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선생은 등을 토닥이며 도시락을 건넸다. 닳아서 반질반질해진 나일론 잠바가 그날처럼 챙피해본 적은 없었다. 교문을 나서는데 눈치 빠른 친구들이 등 뒤에서 놀려댔다. “좋아한대요. 좋아한대요!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도시락을 움켜쥔 채 뛰었다.
분한 것도 같고 부끄러운 것도 같았다. 아니라고 소리라도 버럭 질러줄 걸. 얼굴이 벌개져서 그냥 도망쳐 온 것이 더 속상했다.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김칫국물이 배인 도시락 보자기에선 신김치 냄새가 났다. 귓가에는 친구들의 외침이 맴맴 돌았다.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움켜쥐고 있던 도시락을 덤불숲에 던졌다.
그 이후 선생은 다시는 아이들에게 도시락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나는 잿길을 지날 때마다 도시락을 버렸던 길섶을 기웃거렸다. 도시락은 간 데없고 덤불숲에선 마른 잎들만 버석거렸다. 옆구리를 스치던 아릿한 허기, 그땐 그것이 무언지 몰랐다.
그해 겨울은 모질게 추웠고, 나의 첫사랑도 싱겁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