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감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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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의 방법론

0 개 963 김준

어떻게 기대할까요?


며칠전 어느 한가한 오전.. 


늦여름 후끈한 한낮 더위가 몰려오기전에 서둘러 잔디를 깎았습니다. 손바닥만한 정원을 휘뚜루마뚜루 손을 본 후에 짐짓 생색이라도 낼 셈으로 거실 소파에 퍼져 있었더니 집사람이 수박 반통에 숫가락 푹 꽂아서 가져오더군요. 그 알량한 잔디깍기로 오전 일과는 끝났다.. 선언을 하고는 TV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인터넷에 연결을 해 가끔씩 찾아보던 역사선생님 강의 동영상을 틀었지요. 역시 늦여름 수박에는 역사강의 아니겠습니까~? 다소 의아하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역사를 좋아합니다. 아마 과학도가 되지 않았다면 역사학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역사를 좋아하는데 제 큰 아이가 그런 취향을 물려받았는지 그 아이 또한 역사이야기에 푹 빠질때가 많지요. 


여하튼..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인터넷에서 여러 관련영상들을 두루두루 찾아보기도 하는데요 그 중 가장 재미있는 동영상들은 한국의 수능 강사님들이 해 주시는 짜투리 역사평론입니다. 물론 한국사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이겠습니다. 그 분들은 직업이 직업이신지라 정사와 야사, 거기에 속설과 설화까지 두루두루 섭렵하고 정리해서 설명을 해 주시니.. 학생들에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명강의가 될것이고 저같은 얼치기 역사학도에게는 흥미 만점 효과 만점인 취미생활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빠알간 수박 속살을 서걱서걱 파 먹으며 동영상 파일들을 주욱 훑어보았습니다.

 

개중 눈에 띄는 제목하나.. ‘사도세자’.. 영조와 정조 사이의 공백에 위치해 모든 어색함과 연민과 갈등과 시련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 그 이름 ‘사도세자’.. 천재로 태어나 광인으로 죽음을 맞은 극과 극의 상통함을 몸소 증명했던 사도세자.. 이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당장에 리모콘을 눌러 시청을 했습니다. 역시나 늦여름 수박에는 역사강의 입니다. 


20여분짜리 동영상을 서너개 보고나니 한시간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비어버린 수박 반 통에는 달지근한 냄새에 끌린 파리 몇 마리만 윙윙대고 있습니다. 강의를 통해 선생님은 사도세자와 관련한 비극의 이유를 딱 한 단어로 설명하셨습니다. 


‘기대’


태어난지 6개월만에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입이 트였고 2살에 천자문을 읽기 시작해 3살무렵엔 천자문을 떼었으니 늦은 나이에 얻은 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감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게다가 사도세자을 얻었을 때 영조의 나이가 42세 였는데 당시 조선의 임금들이 평균적으로 50세를 넘기지 못했음을 생각한다면 영조가 얼마나 조급하게 사도세자를 교육시키고자 했을지 이해가 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의 기대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엄격함’을 선택했고 그 과도한 ‘엄격한 기대’에 여러 변수들이 맞물리며 종국엔 아버지가 아들을 굶겨죽이는 입에 올리기도 힘든 비극이 일어난 것이지요. 



‘기대’라는 단어는 참으로 스펙트럼이 넓은 단어 입니다. 만약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다면 연관검색어가 몇 십개는 쏟아져나올 정도로 넓습니다. 그 중 몇 개만 생각해보자면 부담감, 현실적, 실망, 희망, 존중, 부합.... 등등이 있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다른 상황과 맞 물리면 영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도 있는듯 합니다. 부담감만 가중 시키는 엄격한 기대감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애정어린 기대감이 주어진다면 과연 어떤일이 벌어질까요?


그 옛날 학창시절, 저는 소위 말하는 ‘교회오빠’ 였습니다. 어감만 보자면 선하고 다정하고 반듯하고 성실했을것 같지만 솔직히 저는 ‘교회다니는 날라리 오빠’였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교회 학생부 모임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종교인으로서의 품행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였으니까요. 당연히 학생부의 선후배들도 저를 예쁜눈으로 지켜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인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며 제가 덜컥 학생부 회장을 맡게되었지 뭡니까? 이건 분명 어느 세력이 나를 골탕먹이려고 투표 결과를 조작한 걸꺼다... 라며 분기탱천하기에는 학생회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해서... 그냥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학생부의 임원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참 번잡스러운 일이더군요. 여러가지 자잘한 애로사항이 생활전반에 쭈욱 펼쳐졌지만 그 중에 가장 힘든일은 토요일 오후에 하는 임원회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모여 재미지고 짜릿한 일탈을 즐겨야 할 황금같은 토요일 오후에 교회에 모여앉아 회의나 하고 있으라니요... 게다가 저를 회장자리에 앉혀 놓았으니 참석 안 할수도 없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참석 안했습니다. 매번 그랬던것은 아니었지만 대략 세번에 한번꼴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빠졌던거 같네요. 임원진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찬성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가까운 친구였던 총무에게 모든 회의 진행을 일임해버리기 일쑤였던 겁니다. 회장으로서 매우 심각한 직무유기를 한 셈이니 임원진에서 저를 예쁘게 보아줄리 만무했습니다. 게다가 학생회 회장이라는 녀석이 토요일 임원회의시간에 명동 돈까스에서 미팅을 하고 있더라.. 얼마나 간살맞게 상대방 비위를 맞춰주고 있던지 보기에도 민망했다..  등의 소문이 퍼지며 분위기는 점점 김회장 탄핵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선봉에 선 아이가 한명 있었으니 임원회의 회계직을 맡고있는 여학생이었죠. 눈만 마주치면 사사건건 제게 트집을 잡으며 미주알 고주알 잔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분통이 터진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뭐 잘한게 있어야 반박을 할 거 아닙니까? 틀린말이 한마디라도 있어야지요. 


이렇게 저 때문에 삐걱대며 돌아가던 학생회에 어느덧 연례 최대 행사인 여름수련회가 찾아왔습니다. 평소에도 노는 일이라면 둘째가기 아쉬웠던 제게 여름 수련회는 물 만난 고기와 같은 해방감을 느낄수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친구들과 떠나는 자유로운 여름 피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거리, 놀거리, 숙소, 교통편 등등을 상의하고 예약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여간 재미난 일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맨날 뺀돌거리던 회장의 급변한 모습에 다른 임원들이 놀라는 눈치이기도 했지만 저는 초등학교때부터 단련된 보이스카웃 캠프경력을 살려 척척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계 여학생의 잔소리는 여전했지만 말입니다. 


어찌어찌 준비가 끝나고.. 시간이 되어서 여름수련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지겨운 공부시간엔 다음 일정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빠져나왔고 재미난 야외활동시간엔 진행과정을 체크해야 한다며 늘어붙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회계 여학생의 잔소리가 따라 붙었지만 이젠 하도 이력이 나서 그냥 뭐가 짖나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순조로울것만 같았던 수련회에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렇게 일기예보를, 그것도 기상청에 전화까지 해 가면서, 확인했건만... 그리고 그렇게 앞뒤 일주일간 비 한방울 오지않을 것이라 확인 받았건만... 이틀째 밤에 폭우가 쏟아진 것입니다. 당시 수련회장소가 바닷가 솔밭이여서 모두 대형 텐트에서 잠을 자야하는 상황이었는데 날씨가 좋을 거라는 기상청의 이야기만 믿고 적절한 우천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폭우라니... 그것도 장시간 폭우라니요... 


가장 급선무는 저녁행사를 준비중인 대형 텐트에 방수처리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전기설비에도 방수처리를 해야 했고 뒤이어 숙소 텐트와 부엌텐트에도 비막이를 세워야 했지요. 우선 어른들께 부탁해 근처의 마을에서 김장용 비닐과 테이프를 구매했고 그것을 각 텐트 위와 사방벽에 둘러 군대 막사와 같은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가 아니라 몇 명의 지원군을 차출하여 사역에 동원했지요.   


몇십명이 기거할 넓은 장소에 비닐을 덮어 방수처리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우비 대용으로 비닐을 덮어쓰고 일을 한다해도 피부를 때리는 빗물의 냉기로 입술은 점점 파래져 갔고, 급하게 서두르며 일하는 통에 넘어지고 자빠져서 온 몸엔 쓸려간 상처가 가득했습니다. 상처위로 덮여있는 까끌한 모래알들은 털어내자니 쓰라리고 물로 씻자니 번거로와 차리리 그냥 빗물에 씻기도록 놔둘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모든 학생들이 뽀송한 잠자리에 들어갈 무렵.. 미뤄두었던 저녁을 급하게 넘기느라밥그릇만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주먹 하나가 불쑥 들어왔습니다. 올려다보니 그 회계 여학생이더군요. 쫙 편 주먹 안에는 아스피린 두 알이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아프지 않아도 미리 먹으면 감기에 안걸릴수 있다나요.. 그러면서 이런 식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네가 학생회 회장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네가 학생회 회장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너는 아마 위기가 닥쳐야만 가치가 나타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오늘부터 너를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도록 할 테니 우리 같이 열심히 해 보자. 감기 걸리지 않게 따듯하게 자고..”



무슨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장면이긴 합니다만.. 사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드라마같은 삶을 살았으니 ‘주작’의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만약 이 장면에 이어져서 ‘그 때 그 여학생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제 아내입니다’ 정도의 스토리가 이어진다면 정말 드라마가 되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느 누군가가 당하고 있을 잔소리 폭풍을 제가 감내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요. ㅎㅎ


여름 수련회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웅다웅했고 저는 여전히 뺀질거렸고 그 여학생은 수도 없이 회장직을 내 놓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행사가 다가오면 모두들 제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는 했지요.  


별로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10대 후반의 에피소드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기대’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자각은 기대를 받는 사람으로서 행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여름 수련회 이후로 두번 넘겨 한번씩 빠지던 임원회의를 거의 다 출석한 것도,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준비하던 것도 회계여학생의 기대감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아스피린 두 알로 전했던 그 기대감을 저버려서는 안될것 같다는 막연한 책임감은 제 학업에 까지 영향을 미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어떠한 행동의 목적이나 당위성보다도 그 방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상황을 목격하고는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내의 마뜩지 않은 부탁에 대한 ‘알겠어’ 라는 대답과도 유사합니다. 뭔가 귀찮더라도 아내의 부탁이니 들어주야겠다는 마음은 동일하겠지만.. 입에 올리는 한 단어 ‘알겠어’ 도 동일하겠지만.. 이 모든 의도와 목적과 수단의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말투의 대답은 극과 극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들 짐작하시고 경험하셨듯 상냥한 말투는 애교를 부르고 퉁명스러운 말투는 부부싸움을 부르지요. 


우리의 아이들은 기대감의 정수 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이가 없고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온세상은 기대감으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대감이 한결같이 긍적적이고 발전적인 모습으로 결과맺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비단 사도세자의 비극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하여도, 기대에 못 미치는 자녀때문에 부모는 속이 상하고 부모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자녀의 마음은 병들어가는.. 이 끝없는 소모의 악순환은 도대체 어디에서 끊어내야 절단이 될까요? 


외람될수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애정’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기대감이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애정의 표현’이야말로 모든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모든 갈등을 순조로이 풀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고난 천재에게서 약점을 꼬집어내어 결국 광인으로 죽게 한 영조의 엄격한 기대감, 


타고난 날라리에게서 장점을 찾아내어 결국 이곳에 있게 한 아스피린 두 알의 기대감..


 과연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기대감을 덧 입혀야 할까요. 


오늘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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