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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민자
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모서리는 언제나 날카로워 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베이지만 그녀라는 모퉁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진한 눈썹, 둥근 이마, 상큼하면서도 허스키한 탄산수 음색이 생각나 아직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하였다.
한 사람을 그리워할 때 그의 공간은 시간 속으로 압축된다. 아니 확장된다. 공간을 함께 누릴 수 없는 이들에게는 시간만이 공존의 장소가 된다. 제 안의 허깨비에 끌려다니느라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는 시간, 그리움이란 부재가 존재를 물어뜯는 상황이다. 부재하는 현존이고 현존하는 부재다. 태어나는 족족 새끼들을 삼켜버리는 신화 속 크로노스처럼 현재는 미래를 잡아먹고 과거는 현재를 끌어내리지만 시간의 지층을 뚫고 역습해 오는 과거는 현재를 일거에 돌파하고 미래까지 인질로 붙잡아 버린다.
그리움은 전신증후군이다. 살아 있음의 감각을 통증으로 일깨워 주는 풍크툼(punctum) 같은 그것은 기다림과 원망, 욕망과 체념의 착종 위에서 허열虛熱처럼 피고 지는 난폭한 열정이다. 손 닿지 않는 몸속 어디, 감각세포와 신경줄을 이따금씩 교란하는 존재의 빗장뼈다. 실체는 링 밖으로 진즉 걸어 나갔는데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붙들고 헛되이 스파링하는 새도 복서의 시끄러운 침묵이다.
기억과 상상 속을 종횡무진 오가며 그는 그녀의 부재를 견딘다. 어떤 대체재도 소용이 없다. 무명無明과 번뇌 속에서 일어서다 주저앉다 그렇게 반생을 건너왔다 했다. 화분에 심어둔 꽃처럼 결박당한 시간들. 그립다는 말은 서럽다는 말과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일까. 돌아서는 어깨가 잎 진 나무 같았다. 이미 지난 시간들이 현재의 멱살을 쥐고 발목을 걸고 넘어뜨리는, 그리움의 존재 저편의 불수의근이다. 오직 인간만이 시간의 이빨자국에 피를 흘리고 환상의 뱀에게 살이 뜯기어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