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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이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어느날, 상기된 얼굴로 조회 단상에 오르신 선생님의 입을 통해 생전 처음듣는 한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에~ 우리나라가 이제부터 공식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입지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다. 엄연한 개발도상국으로서 인정받았으니 중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 국민들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꾸준하게 노력해준다면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이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오르게 될 것이다. 그 막중한 과업이 너희 학생들의 어깨에 놓여져 있으니 모두 다같이 학업에 열중해주길 바란다. 이상’
항상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에 진배없는 일장 연설을 하시던 선생님의 조례사가 끝나갈무렵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중에 너무 어려운 단어가 등장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지요. 안 여쭤보자니 궁금하고 여쭤보자니 호랑이 같은 선생님이 무섭기만 했구요.
그제까지 신문도 한번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한낮 어린아이였던 저에게 ‘개발도상국’이란 단어는 ‘추사김정희’와 같이 호가 붙은 예전 어르신들의 이름같기만 했습니다. ‘개발’이라는 호를 쓰시는 ‘도상국’선생님 말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를 ‘개발’로 쓰시는 분이 과연 계셨을까 하는 엉뚱한 의문을 품은채 질문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 시간에 아버지께 그 말뜻을 여쭤보았더니 ‘개발되어가는 길에 서있는 나라’ 그러니까 후진국 중 한창 개발이 진행되어 머지않아 중진국으로 인정받을만한 나라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제서야 아침에 들었던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여지껏 국제적으로 뒤쳐진 나라였는데 뭐가 잘 되서 그래도 중간쯤은 되는 나라로 발전하는 중인가보다.. 싶었지요.
그 일 이후로 제 머리속엔 국가의 선진화 정도를 구분하는 단계가 이렇게 설정되었습니다. 가장 개발이 덜 된나라가 후진국, 가장 발전이 많이 된 나라가 선진국, 그리고 그 중간쯤에 중진국, 마지막으로 후진국을 벗어나 중진국의 초입에 들어서는 나라가 개발도상국. 그리고 이러한 선진화의 단계는 제가 어른이 되어서 한 경제관련 컬럼을 읽을 때까지 주욱 제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었지요.
어느날 아침, 신문의 컬럼을 읽던 중 중진국, 개발도상국등의 단계들이 실상은 아무런 경제학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으로는 국가의 선진화는 딱 두단계로 구분된다 하더군요. 하나는 Developed country, 다른 하나는 Undeveloped country. 구지 한국어로 번역을 해 보자면 ‘기개발국가’와 ‘미개발국가’쯤 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선, 중, 후’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 세상엔 소수의 선진국들과 대다수의 후진국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될거 같습니다. 그 글을 읽고나서 ‘개발도상국’이라는 약간 억지스러운 이름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누군가의 창작품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경험했던 경제의 급성장은 ‘개발’ 호를 쓰시는 ‘도상국’ 선생님말고는 달리 묘사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공식적으론 후진국이었을 망정 우리의 기억속에 남은 당시의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이었고 당시의 우리 국민은 예비 선진국민 이었습니다.
2021년 7월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다고 합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것입니다. 1964년 이후 처음으로 또 하나의 선진국이 탄생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31번째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오셨던 어르신들께는 정말 감개가 무량한 경사가 아닐수 없겠습니다.
물론 선진국으로의 격상은 그만큼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후진국에게 주어지던 혜택도 모두 반납해야하고 그동안 나몰라라 했던 국제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어르신들이 쏟아부으셨던 노력과도 같은, 대한민국을 제대로 된 선진국으로 운영하기 위해 현재의 국민들이 쏟아부어야 하는 나름의 노력일 겁니다. 역시 어느 세대나 자신들이 지고가야 할 나름의 무게가 있나봅니다.
며칠 전 이른 오후, 책상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중 이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좀 있고 심심할 때 주로 동기부여 문구나 동영상 등을 찾아보곤 하는데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하냥 놀고만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해야할 건 해야한다고 훈수를 둬야할 일이 다반사이고, 그러다보니 어찌하면 조금 더 교양있으면서 동시에 강력한 메세지를 건넬수 있을까 고심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는 애저녁에 한계치에 다다랐으니 이젠 인터넷의 전지전능함을 의지할 밖에요.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 성공적인 업적을 이루신분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당연히 낫겠지요.
조회수가 높은 유명 채널로부터 시작해 몇 개의 동영상을 시청했을 무렵, 주욱 리스트업 된 동영상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습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셨던 고 정주영 회장님과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님의 동영상이 영어자막을 단 체 올라와 있겠지요. 속으로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 동영상을 올린 유튜버가 어느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영상 조회수도 꽤 많은 것이 상당히 인기있는 채널인듯 했습니다. 그정도 유명한 채널에 두 분이 등장하신다? 어릴적 9시 뉴스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던 두 분이 남기신 메세지가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동기부여 영상으로 회자된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동시에 좀 어색하기도 했는데요. 마치 유명인사가 된 동네형님을 만나게 된 것처럼 친숙함과 생경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야릇한 기분이라 할까요? ^^
동영상 속에서 정주영 회장님은 한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단상에 올라 ‘제군들~’하는 고리타분한 모습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시는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정회장님은 참 언변이 좋으셨던듯 합니다. 유머감각도 출중하시구요. 현대조선을 설립할 당시의 이야기를 하시는데 오나시스와의 관계부터 영국의 국채 도입까지 재미있게 설명하시면서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조선사업을 시작하게 된 과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도전, 집념, 끈기, 성취등을 최우선시하는 당신의 가치관을 그대로 현신해 놓은듯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제스츄어 하나하나에서까지 힘이 느껴졌습니다.
한편 이건희 회장님의 동영상은 정기적인 사장단 회의를 주관하던 중 하신 말씀들을 모아놓은 영상이었습니다. 회의중의 말씀이어서 그런지 뭔가 준비되어 있는듯한 이야기들은 아니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만한 말씀들을 해 주셨습니다. 변화와 혁신, 적응, 인재중심, 품질중심등을 요구하는 그 분의 주장은 특유의 말꼬리를 흐리는 화법과 어우러져 조금은 신경질적이면서 동시에 완벽함과 세밀함을 추구하는 회장님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두 분 회장님들의 생전 모습과 메세지를 보고듣자니 문득 ‘개발도상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아니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은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을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세운 쌍두마차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경공업중심의 산업구조에 중공업의 기치를 세워올린 현대그룹과 가공생산업의 경제기반위에 지식정보산업을 키워올린 삼성그룹이 대한민국의 경제부흥과 국격향상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상식과도 같은 일일테니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두 분의 동영상을 보면서 그 옛날 한국이 그냥 후진국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일수 있었던 정신적인 기틀을 보는듯 했습니다.
무모해 보이는 과업에도 일단은 부딪혀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변신을 시도하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볼 때까지 물고 늘어지고, 한 영역의 일류대열에 올라설 때 까지 끊임없이 품질을 향상시키는 그러한 정신.... 그 정신이 전국에 번지고 번져, 마음과 마음을 타고 흘러나가 결국에는 선진국 대한민국을 이루어 낸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참 생각이 많아지는 학생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경망스러워서 저렇게 촐싹대다가 시험 다 망치지.. 싶다가도 어찌해서든 잘 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기특해서 머리 한번 쓰다듬고 싶어지는.. 그런 학생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자꾸 예쁘다 예쁘다 하면 안됩니다. 다 망해버린 성적표를 들고서 풀이 확 죽어있다가도 잘할 수 있을거라는 한마디에 뽀빠이 시금치 먹은 흉내를 내는 녀석이니 함부로 칭찬을 해서는 정신이 산만해져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학생인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이 학생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습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아니, 지금 당장 가능하지 않다면 갈고 다듬어서 가능성이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이 학생은 ‘개발도상학생’이기 때문입니다.
유학 온 첫해부터 몇 년동안 놀아제끼기만 했지만, 전학 온 학교에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거의 매일 울다시피하며 좌절했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아직까지 중위권의 성적을 오매불망 염원하는 하위권 학생이지만, 제 눈에는 이 학생이 ‘후진국 학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정신 때문입니다.
정주영 회장님과 이건희 회장님이 주장하시던 그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를 후진국 학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후진국 대한민국을 세계 31번째 선진국으로 격상시킨 산업역군 어르신들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를 개발도상학생이라 부릅니다. 오늘도 그 학생은 남들보다 두배 세배의 시간을 들여 숙제를 합니다. 친구들은 작년에 이미 다 배워서 익숙한 내용을 혼자서 알아가겠다고 몇 시간씩 애를 씁니다. 그 옛날 저 만치 훌쩍 앞서가는 나라들을 따라잡겠다며 힘쓰고 애쓰던 대한민국을 그에서 찾습니다. 감히 단언하건데 그 학생은 그 누구 못지않은 성취를 이룰것입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성공은 여상한 그것들과는 사뭇 다를것입니다.
Term 2의 중간을 지나는 요즘, 코로나시절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아이들의 자세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공부 자체에 목적을 두던 시절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아 회한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소망이 있는 것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땀흘리고 있을 개발도상학생들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들이 선진국 학생으로 도약하는 그 날을 염원하는 기대감으로 또 하루를 살아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