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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가을을 미처 즐기기도 전에 겨울이 온 거 같다.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고즈넉한 겨울의 운치를 맛보고 있다. 삶에 대한, 계절에 대한 해방감이 온 몸을 감싼다. 애쓰면서 살지 않아서 그럴까? 아마 그 영향이 클 것이다.
애쓸 필요가 없기에 편안하고 기분이 좋다. 빨리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천천히 즐기면서 감상하면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구멍이 난 양말을 깁는 것도 재미있고, 잠깐의 재봉틀질로 옷을 수선하는 일도 즐겁다.
낡지도 않은 옷을 버리긴 아깝고, 그렇다고 좋아하긴 하지만 유행이 지나버린 옷들을 그냥 입기도 그렇고 하여, 약간의 변형을 주어 입으니 내 손이 간 옷들이라서 그런지 애착이 간다. 이렇게 수선할 옷들이 몇 개 있는데, 마음이 동하는 날에는 그 중 한 벌은 수선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하기 싫으면 며칠이고 그냥 재봉틀 위에 놓여 있기 마련이지만, 재봉틀 위에 올려 있는 수선물들이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재봉틀과 하나가 되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인다.
이렇게 놓여 있었던 옷이 수선이 되면 그날은 그 옷을 입고 마트에 가거나 볼일을 본다. 대충 고쳐도 내 만족도는 크다. 행복지수도 높아진다. 일을 마쳤다는 해방감까지 겹쳐서 발걸음이 가볍다.
슈퍼마켓에 나가 유난히도 싸게 나온 채소나 식재료들을 보고, 계획에도 없었던 요리를 하는 즐거움도 상당하다. 어제는 내 종아리보다도 더 길고 큰 무들이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여있었다. 그 중 가장 미끈하고 잘생긴 무 한 개를 사왔다.
소고기 무국을 한 솥 끓이고, 무생채와 무나물을 만들고, 무 짱아찌도 조금 담궈도 될 만큼 무가 매우 컸다. 오늘 할 일은 바로 이 무 하나를 가지고 요리조리 요리해보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 수가 있다.
요즘 하루하루가 아주 재미있다. 혼자 놀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는 시간들이다. 남편은 나보다 더 혼자 노는 일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코비드 사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지내고 있다.
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안하는 남편이 요즘 곧잘 내가 요구하는 일을 잘해준다. 이 또한 나의 큰 기쁨이다. 5년 전에 사 놓은 샌딩 기계를 이제야 사용하고 있는 남편. 샌딩 기계를 왜 샀는냐 하면 게러지와 현관 문 칠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사놓은 기계가 5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게러지 선반에 놓여 있기만 했었는데, 이번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며칠 전에 시작했는데,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비가 와서 중단하고 있다.
이제부터 우기라서 그 일이 언제 끝나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남편이 샌딩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신통방통이다. 마스크를 쓰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더니, 슬그머니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더라.
남편이 그동안 내가 해달라는 일을 해주지 않은 것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칭찬에 야박했었던 내 마음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다 완벽주의인 남편의 마음이 제일 큰 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되건 안 되건 일단 부딪혀 보는 성격이 아니라 확실하게 알기 이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것이 문제였다. 실패에 대한 부담감이 먼저 앞서서 해보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다 귀찮아하는 마음이 선두주자로 나와서 일에 손을 못 대게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실패를 두려워하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웠기에 남편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어쩌면 한국에서 반백년 가까이 산 습관이 몸에 배서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면서 시간을 소비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소심한 남편이 뒤늦게나마 집치장에 손을 대기 시작해서 나는 행복하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일 말고는, 액자를 걸기 위하여 벽에 못질 하는 것과 전구 갈아 끼우는 일 말고는 그 어떤 일도 엄두를 내지 못했었던 남편이 샌딩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으로 여긴다. 앞으로 그가 할 일의 영역이 좀 더 넓어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완벽주의적인 마음과 귀차니즘에서 벗어나서 대충 넘어갈 줄 아는 아량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완벽주의에 대한 해방은 남편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 역시 남편과 다를 바가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라가려면 완벽주의의 벽을 허물고 완벽으로부터 해방을 해야 한다. 그게 살 길이다.
완벽을 기하는 일은 이제 기계와 로봇들이 다 해나가고 있다. 인간이 했던 일을 이미 로봇에게 많이 빼앗겼고, 앞으로는 인간이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루에 3시간 정도만 일을 하여도 먹고 살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
그만큼 인건비가 매우 높아질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기만 해도 돈을 벌게 된다. 나가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 들일 일을 줄이면 그게 바로 돈을 버는 일인 것이다.
요즘 나는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돈들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보이게 되었다. 하물며 길가에 피어 있는 민들레까지도 돈이다. 이렇게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다 돈으로 보이게 된 동기는 그동안의 내 관념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눈을 꽁꽁 가리고 있었던 완벽의 벽이 무너지고 나니, 세상이 주는 풍요에 환성이 나온다. 잡초들마저 자연이 주는 선물. 그 어떤 것인들 자연의 선물이 아니던가?
해방하라. 해방하면 새 세상이 보인다.
요즘 나는 잡초인줄만 알았던 애기수영이란 식물에 흠뻑 빠져 있다. 유럽산으로 세계 곳곳에 퍼져 있고 정원 관리를 하기엔 아주 고약한 식물이라고 한다. 번식력이 너무 강하고 자생력 또한 대단해서 일단 한 뿌리라도 정원에 정착하면 완전히 제거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계곡과 숲 사이에 있는 언덕 위의 우리 집에도 그 녀석들이 들이닥쳤다. 헌데 방패같이 생긴 잎들이 아주 예쁘고 야들야들하여 먹는 식물 같았다. 한 잎 뜯어서 씹어보니 새콤한 것이 제법 맛이 좋았다.
사진을 찍어 검색을 해보니 이 녀석이 그냥 잡초라고 하기엔 너무 유익한 식물이었다. 어린 잎은 식용으로 쓰이며, 줄기와 뿌리는 약재로 쓰인다고 했다. 달여서 복용하기도 하고, 짓찧어서 낸 즙을 마시며, 피부에 발라 피부병에 사용한다고 한다. 항암효능까지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복덩이가 따로 없다.
요즘 이 녀석들을 뽑아서 뿌리는 잘라내고 새싹들을 깨끗이 씻어서 맛있게 먹고 있다. 금방 한 밥에 애기수영을 듬뿍 얹고, 구운 김을 부셔 넣어 양념간장과 함께 비벼 먹으니 소화도 잘되고, 완전 꿀맛이다. 참치나 아보카도와도 잘 어울리고, 매콤한 다데기를 넣어 비벼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집에 온 손님들에게도 이 비빔밥을 권해보았는데, 모두들 맛있게 먹고 갔다. 샐러드에 넣어도 맛이 좋아서 잘 다듬어서 친구네도 가져다주었다. 이렇듯 잡초 하나도 모두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니, 자연과 친해지면 얻는 게 많은 거 같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조카를 보러 오신 한 노인이 생각이 났다. 그 분은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분이신데, 조카가 일 나가고 없는 시간에 산책을 하다 보니 민들레가 지천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분은 매일 그것들을 캐고 말려서 한국에 돌아갈 때 가지고 가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뉴질랜드에 와서 가져가신 것들이 고작 말린 민들레라니... 하지만 소박하고 인심 좋게 생기신 그분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나도 요즘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자연과 더불어 해방감을 한껏 누리면서 말이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를 뒤늦게나마 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보기 시작해서 어떤 스토리로 전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해방이나 내 해방이나 새로운 세계로 약진하는 도약의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