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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light saving (섬머타임)이 끝난지 이미 오래지만 제 차의 시계는 아직도 한시간이 빠른 그 때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만 타면 한 시간 빠른 시계를 보면서 지금의 시간을 가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혹시 시계가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시간을 조정하는것이 어려워서 그냥 놔두고 있나보다 생각하실수도 있는데.. 실은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그 잠깐 꼼지락대면 되는 일이 귀찮아서 건드리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또 솔직히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구요. 하지만 지금껏 한 시간 빠른 시계를 그냥 두고 있는데에는 우연히 경험한 작은 잇점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합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한 달쯤 전인가요. 학원에 출근하기위해 여유있게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시동을 걸고 잠시 예열을 하고있는데 문득 차 안의 시계가 눈에 들어오는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여유있는게 아니더라구요. 오히려 수업시간에 맞추기가 촉박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이런 큰일이네.. 내가 너무 지체했구나..
서둘러야겠다싶어 예열도 하는둥 마는둥 부랴부랴 학원으로 달려갔겠지요. 학생들이 오기전에 책상과 의자들을 닦고 정리하고 나니 그제서야 휴우~ 시간 딱 맞췄다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서 정확히 몇 분이나 남았는지 확인하려고 제 손목시계를 봤더니.. 어라? 예상했던 몇 분 하고도 한시간이 더 남아있는 겁니다. 아뿔싸! 차의 시계가 한 시간 빨리 맞추어져 있다는 걸 깜빡했던거지요.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여유를 부렸다 해도 그리 긴 시간을 지체했을까요. 허탈한 실소를 입술끝에 올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시간동안 뭘 하나... 그냥 유튜브나 볼까.. 하다가 뭔가 소중하게 얻은 여유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은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 해야할 수업들의 자료를 조금 더 꼼꼼하게 보완하고 숙제도 미리 인쇄해서 준비해 놓았습니다. 덕분에 수업들이 평소보다 좀 더 충실해졌던거 같네요.
그 사건 이후 몇 번인가 한 시간 빠른 시계의 잇점을 누리기도 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차의 시계는 빨리 간다’는 사실을 인지해버려 이전과 같은 ‘선의의 착각’은 경험할수 없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 게으름의 상징이 제 삶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운전하면서 이런 생각 저런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가끔씩 시계를 보면서 한 시간 뒤의 제 모습과, 도착해 있어야 할 장소와,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수업을 위해 운전하는 중이면 한 시간뒤에 제가 가르치고 있을 내용에 대해 미리 생각하게 되었고, 미팅에 참여하기위해 운전하는 중이면 한 시간 뒤에 누군가와 협의하게 될 수도 있는 쟁점에 대해 미리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별 시덥지않은 상상으로 낭비해 버릴 운전시간이 한시간 빠른 시계덕에 더 큰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말할수 있겠습니다.
물론 구지 시계를 빨리 가도록 맞추어 놓아야지만 이런 ‘일상선행학습’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검은 바탕에 녹색으로 빛나는 ‘미래시계’는 묘하게도 더 실제적이고 진지한 ‘한 시간 뒤’를 가늠하게 했습니다. 시각적 정보가 가진 힘이라 할까요. 그 덕분에 이제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면서도 한 시간 뒤 집에 돌아와서 마쳐야 할 일을 기억하게 되고, 일을 마치고서 퇴근하는 길이면 남은 하루의 시간을 더 가치있게 할 무언가에 대해 계획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저의 ‘미래시계’는 한 시간뒤의 나를 생각하게하는 일상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차를 탈 때마다 그리고 내릴 때마다 한시간 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는 물론 실제적인 준비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지요.
한 시간이 빠른 시계는 딱 그만큼, 딱 한 시간뒤의 인생을 가늠케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만약에 하루가 빠른 시계, 한달이 빠른 시계가 있다면 우리는 그 만큼 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빨리 가는 시계가 주는 잇점을 누릴만한 심적, 지적인 준비가 되어있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한달 뒤, 일년 뒤의 스스로를 투영하게 도와줄 빨리가는 미래시계는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달 먼저, 일년 먼저, 혹은 10년 먼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배들이 있을뿐입니다. 그분들이 완벽한 미래시계로 작동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그 분들의 삶이 우리의 앞날을 투영하고 반영할만큼 값진것일지 확신할수는 없지만 삶의 선배들은 최소한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흔히들 타산지석이라 표현하는.. 그런 역할이 되겠지요. 나날이 건강이 쇠약해져간다며 날마다 불평이신 한 형님을 만날때면 내 나이가 그 분과 같아졌을때 느끼게 될 상실감을 간접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오늘의 제가 운동에 더욱 힘써야 할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거의 망해버린 사업체를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일으켜 세우신 친척아저씨의 성공담은 내가 그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루고 싶은 성취를 가시화 시키고 그래서 오늘의 제가 현업에 더욱 매진해야 할 동기가 됩니다. 한시간 빠른 시계처럼 오늘이 아닌 내일을, 지금 당장이 아닌 다가올 그 날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나침반인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염려와 고민과 생각과 설계는 기실 중년의 가운데를 지나는 저같은 사람보다는 아직 제대로 된 인생을 시작조차 해 보지않은 10대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혹시 10대에게 적절한 심리상태는 분명 꿈과 희망일거라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지금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님들이 경험했던 10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다소 매혹적이기까지 한 청소년기의 우울감이야 동일하겠지만 그 저변에 깔려있는 상호신뢰, 자기확신 등의 감각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듯 합니다.
여하튼 아이들은 염려와 고민에 싸여 있습니다. 성공을 해 본적이 없으니 그것이 주는 성취감 또한 느껴본 적이 없고 실패를 해 본적이 없으니 그것이 얼마나 쓰라린지 알 턱이 없습니다. 당연히 첫번째 성공이 두번째 성공의 발판이 된다는 사실도 알리가 없고, 한번 실패로 바닥을 치고나면 올라갈 일만 남은것이 아니라 지하실까지 내려갈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들은것은 많아서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간접경험을 한 덕분에 꿈과 희망, 포부와 비젼보다는 염려와 고민이 가득한 ‘10대상’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0대는 불안합니다.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불안하고 열심을 내면서도 불안합니다. 미래를 꿈꾸기엔 자신이 너무 부족한 것 같고 그냥 되어지는대로 살기에는 얄팍한 자존심이 아직 뻣뻣합니다. 제가 지도하면서 경험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래서 자존심과 열등감과 희망과 비관과 열정과 게으름이 한덩어리로 뭉쳐진 논리적인 모순과도 같습니다. 시험때가 되면 자존심과 열심이 힘을 얻어 작동을 하지만 시험만 끝나면 비관과 게으름에 휘어잡히고마는.. 그러기에 아이들은 시계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몇시간, 며칠이 아닌 몇개월 혹은 몇년을 빨리가는 시계가 말이지요.
제 학생들 중의 대부분이 공대나 메디컬 계통으로 전공을 정하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면 어떠할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할때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이 사람은 공대, 메디컬이 아니면 공부라고 생각하지도 않나보다.. 하고 오해하실수 있을것 같아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는 완전히 제 경험의 폭이 좁은데서 기인합니다. 아무래도 과학을 가르치다보니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하고는 인연이 잘 닿지가 않더라구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흥분된 마음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가지게되는 맨처음의 느낌은 ‘힘겹다’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혀 예외없이 하는 말들이 ‘힘겹다’ 였으니 이건 이제 사실로 인정해도 될 법합니다. 그런데, 모두 다 힘겨운건 알겠는데, 그 힘겨움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재미있는 발견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크게 두가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제게 느껴졌습니다. 첫번째는 고교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느냐 혹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학에서 경험하는 아이들의 힘겨움은 컬리지의 과정이 덜 부담스러울수록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손쉽게 컬리지를 졸업할수록 대학에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컬리지과정의 부담은 단지 공부하는 과정에 의해서만 결정되진 않습니다. 재학하는 학교 또한 중요한 요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교는 학생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위해 무진 애를 쓰는데 반해 또 다른 학교는 학생들의 즐거운생활을 위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같은 과정을 공부한다고 하더라고 학교와 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부담이 커질수도 있고 적어질수도 있는 것이지요.
대학생들의 학습부담감을 결정짓는 - 최소한 첫 해에는 - 두번째 요인은 학생의 공부성향 이라고 보여집니다. 저화 대화를 나누었던 학생들은 다들 저하고 근 3년씩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아이들이니 제가 파악하지 못한 공부습관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텐데요. 꾸준하게 적당한 분량의 공부를 지속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심지어는 ‘할만해요’라며 자신감을 표출한 반면 소위 말하는 벼락치기로 성적을 이어오던 아이들은 매우 심한 압박감을 호소했습니다. 그냥 쉽게 말하면 공부습관이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물론 이런 친구들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의젓한 대학생의 면모를 갖추게 될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문제는 첫해 성적으로 전공을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대학생활 첫해를 벼텨내는 학생들.. 이 학생들이 지금 컬리지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미래시계’입니다. 만약 컬리지 학생들이 지금 선배들의 대학생활에 자신의 1년뒤, 2년뒤 모습을 투영할수만 있다면 구지 공부해라 공부해라 재촉하지 않아도 책상앞에 들러붙은 껌딱지가 될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어른도 하기 어려운일일테니까 말입니다.
일년중 학생들이 가장 나태해지는 6월이 되었습니다. 이 즈음의 아이들은 편안합니다. 각 학교의 정책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 해의 중반을 가름하는 Mid year exam도 끝났고 몇 개 학교에서는 축제에 버금가는 Korean night 를 준비하며 ‘무대 위 슈퍼스타’를 꿈 꿉니다. 각 급 오케스트라들이 연주회를 여는 것도 이 즈음이고 두번째 텀 방학때 캠프활동을 하기위해 정기적으로 Fund raising을 하는 학교도 있습니다. 명실공히 공부의 부담감일랑 털어버리고 좀 더 청소년다운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는 시기라고 말 할수 있겠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러한 모습들은 정말 매우 바람직하고 칭찬할만한 학교생활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견을 보일분은 안계실겁니다.
그런데, 다만 한가지 문제는 이 아이들이 실제로 ‘아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즐거운생활을 누리고있는 주체들은 아이들 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논리적인 모순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입니다. 누군가의 지도가 없이는 제 안의 무엇을 끄집어내어야 이 시간을 버텨낼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 입니다.
그래서 이 즐거운 6월의 가지가지 활동들이 조금은 우려스럽습니다. 실컷 놀기도 하고 또 공부할때는 열심히 공부할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겠지만 아직 미숙한 우리의 아이들은 즐거운 생활의 잔영에 휘둘려 제자리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겐 최소한 몇 개월은 빨리가는 시계가 필요합니다. 몇 년뒤의 대학생활까지는 도무지 감이 안잡혀 생각할수 없다 하더라도 불과 몇 개월후 다가올 연말의 살 떨리는 그 시간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보는 정도는 해 낼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간 빠른시계. 그 시계가 지금도 눈 앞에서 녹색 깜빡이처럼 일초 일초를 읽어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시계를 바라보며 한 시간 뒤의 나 자신을 고민하고 대비할수 있듯이 우리의 아이들 또한 몇 개월 빠른시계, 혹은 몇 년이 빠른 시계를 바라보며 그 시간의 자신을 고민하고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