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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전히 비가 많이 내리고 아직도 여전히 패딩조끼를 입어야 하는 날이 많지만, 거꾸로 매달려도 절대로 쉬지 않는다는 국방부 시계처럼 계절은 끊임없이 돌고 돌아 어느덧 봄의 초입에 서 있습니다. 두어주 전까지만 해도 ‘봄의 초입’ 보다는 ‘겨울의 끝자락’ 이나 ‘ 을씨년스러운 늦겨울 궂은비’가 더 어울렸었는데 이젠 ‘섣부른 꽃망울’ 이나 ‘노곤한 오후 햇살’이 더 어울리는 시절이 되었으니.. 머리속으로야 이 모든 변화가 지구의 공전이나 23.5도 기울어진 지축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지만 그러한 ‘우주과학적 주기성’의 결과로 일어나는 눈 앞의 계절변화는 똑부러지는 숫자나 깔끔한 그래프로는 절대 표현할 수없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듯 합니다. 뭐랄까.. ‘생활 밀착형 감성’이라고나 할까요?
따뜻한 오후 햇살 아래에서 정원일을 했습니다. 제가 뭐 꽃을 키우거나 잔디를 기가막히게 관리하거나 하는 정성스러운 사람은 못 되어서 언제나 정원이 덥수룩한 잡초로 뒤덮이기 일쑤이지만 그래도 매년 이맘때만 되면 팔 걷어부치고 해야 할 정원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미니텃밭에 거름을 주는 일이 그것입니다. 길이는 꽤 길지만 너비가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기~일쭉한 텃밭은 네단으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어서 몇 가지 채소들을 구분해서 키우기에 아주 좋습니다.
작년엔 파도 심어서 키워먹었고 어디선가 굴러 들어온 토마토가지를 꼽아 주었더니 쭉쭉 잘 자라는 바람에 아침마다 Roman 토마토를 챙겨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었습니다. 깻잎은 한동안 지지부진하다가 갑자기 자라기 시작하더니만 무섭게 커 올라오는 통에 다 먹지를 못하다가 결국 한꺼번에 다 따 모아서 깻잎김치를 담그기도 했지요. 그렇게 한 해 여름 두세달을 아침이면 피조아와 토마토 따는 재미로, 일요일이면 깻잎따서 삼겹살 싸먹는 재미로 보내고 나면 남은 9개월동안 그 날들을 기다리게되고 그래서 더 준비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이젠 연례행사처럼 텃밭에 거름을 주게 되었네요.
작년에 아예 거름 몇 포대를 사다놓았고 그래서 올해엔 이리저리 발품 팔 필요없이 한 포대 쭉 뜯어서 부어주면 되었지요. 비료를 주는 일은 단순한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손쉬운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반년 이상 잡초로 덮여있던 텃밭을 먼저 정리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예 날을 잡아서 아침부터 장갑에 밀짚모자에 중무장을 하고나서 덤벼야 그래도 속 시원할 정도로 잡초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프로농군분들이야 손바닥 두어번 탁탁 털면 끝내실 일이지만 저같은 애송이야 언감생심 가당찮지요. 한 두 시간동안 풀을 뽑고 또 뽑아 어느정도 깨끗해지고 나면 이제는 흙을 파 엎어서 공기구멍을 내주어야 합니다. 인터넷에 그렇게 나와 있더라구요. 마침 가지고 있는 적당한 삽이 한자루 있어서 어릴적 새마을 운동 곁눈질했던 기억을 살려 푹푹 파서 뒤엎어줍니다. 덩어리진 흙뭉치는 설겅설겅 부수어야 하고 어느 녀석이 흘리고 갔는지 모를 잔뿌리 덩어리는 꼼꼼하게 긁어 모아서 내다버려야겠지요. 이렇게 텃밭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이제 드디어 거름을 부어줄 시간입니다.
‘환경과학’에서 SOM이라 부르는 이 자연거름은 전통적인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발효시킨 동식물 찌꺼기.. 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을거 같기는 한데 그것 또한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는 어렵겠네요. 하여간에 비료를 적당히 나누어 칸칸히 부어준 뒤 다시한번 삽으로 흙을 뒤집어가며 섞어주면 드디어 작업이 끝납니다. 이제 가래같은 걸로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주기만하면 끝이지요. 온몸이 땀에 젖을정도로 일을 하고나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당장 눈 앞에 드러난 결과를 감상하는 뿌듯함은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을 완수했을 때의 뿌듯함과는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드디어 끝났다.. 하는 안도감과 팔다리가 뻐근한 육체의 피곤함이 열매를 꿈꾸는 기대감에 감싸여진듯한.. 그런 야릇한 느낌입니다.
이제 며칠후면 씨를 뿌리든 모종을 심든 뭔가를 할테고.. 그 이후론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며 하루에 1mm 싹 자라는 손가락만한 아이들을 기꺼워할테고.. 그러다가 때가되면 열매를 거두고 잎을 따먹는 기쁨을 누릴겁니다. 텃밭을 가꾸는 일은 이렇게 잡초를 제거하는 그 첫날부터 한 해의 마지막 토마토를 거둬들이는 그 마지막 날까지 온통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즐거움의 양은 텃밭에 부어진 거름의 질과 양에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밭을 일구고 흙에 거름을 섞어주는 반나절의 노동은 한 해의 가장 즐거운 몇 개월을 예약하는 소중한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텃밭에서 자라날 미래의 즐거움들이 뿌리를 뻣어 쭈욱쭈욱 빨아먹을 수 있도록 양분을 준비하는 중요한 과정이니 말입니다. 이 거름이 식물의 생장을 거쳐가면서 튼실하고도 달큰한 열매가 될 것이고 손바닥보다 크지만 씹을수록 아삭거리는 이파리들로 자라날 겁니다.
거름은 이렇게 흙에 섞어주는 양분입니다.
뿌리를 통해 흡수되기에 흙 속에 머물러야하고 물에 섞여 흡수되기에 흙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고 싶다면 뿌리에 거름을 더 할 일입니다.
열매를 키우자고 열매에 거름을 바르는 것은 풍요로운 수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텃밭에 씨앗이 심겨지기도 전..
얼마만큼의 수확이 날런지 예상도 하기 전..
아니, 심지어는 무얼 키울것인지 결정도 하기 전..
아직은 미지의 영역에 머무르는 생육과 수확의 희망을 마음에 품고서 반나절 땀을 흘려 섞어주는 거름은 그 자체로 확신이고 비젼이고 또한 소망입니다.
열매를 좀 맺었으면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그런 관계도 있습니다. 이 모든 열매들이 튼실하고 풍성하게 맺히게 하려면 진즉에 거름을 부어주었어야 합니다. 뿌리가 흡수할 수 있도록 흙을 파서 섞어주었어야 합니다. 다 늦게 열매를 키우겠다며 겨우 몽우리 잡힌 열매에 거름을 치덕치덕 바른다면 그건 주객이 전도되고 전과 후가 뒤집어진 일이 되고 말 것 입니다.
밤낮없이 비즈니스에 몰두하며 돈을 쫓기보다는 그 비즈니스를 통해 고객과 직원들, 더 나아가 세상 모든이들에게 유익끼치기 위해 애 쓰는 것이 거름을 주는 일 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 모양 저 모양 최고의 스펙으로 치장하기 위해 고민하기 보다는 그 자녀들을 세상의 빛된 일군으로 키워내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거름을 주는 일 입니다. 다른이들과의 관계속에서 내 이름을 더 빛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이들을 더 빛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거름을 주는 농군의 모습입니다.
고객, 직원, 그리고 관계된 모든이들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비즈니스가 풍족한 재물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혼란한 세상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녀들이 사랑받고 존중받고 능력을 인정받는 성장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른이를 추켜주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이가 존경과 사랑받음의 열매를 맺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름과 열매의 상관관계는 우리의 아이들이 임하는 학업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때로 학생은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할 시기가 있습니다.
아직 전문성의 씨앗이 심겨지기도 전..
얼마만큼의 성취를 이룰수 있을지 예상도 하기 전..
아니, 심지어는 어느 방향의 공부를 할지 결정도 하기 전..
아직은 미지의 영역에 머무르는 발전과 성취의 희망을 마음에 품고서 하루하루 땀을 흘려 학업에 섞어주는 노력은 그 자체로 확신이고 비젼이고 또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아쉽게도.. 매년 이 시기가 되면 많은 아이들이 이제 겨우 몽우리가 진 열매에 거름을 바릅니다. 누가 더 많이 바르느냐 경쟁이라도 하듯 치덕치덕 열매에 거름을 발라놓습니다. 하지만 앙분이 부족해 제대로 영글지 못한 열매가 뒤늦게 거름을 떡칠한다고 해서 튼실해 질 수는 없습니다. 거름은 이미 오래전에 부어졌어야 하고 열매가 아닌 흙 속에 섞여졌어야 합니다. 당연히 열매위의 거름은 비에 씻겨 사라지고 당연히 열매는 여전히 허약하고 부실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끔씩 별종들이 있어서 열매에 바른 거름으로도 어느정도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일까요..
열매를 보고 싶다면 뿌리에 거름을 더 할 일입니다.
탐스런 수확에 기뻐하고 싶다면 애초에 거름을 섞어줄 양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취를 보이고 싶다면 학습의 근본에 힘을 더 할 일입니다.
놀라운 결과에 기뻐하고 싶다면 미리부터 차근차근 노력할 양입니다.
열매를 키우자고 제 욕심에만 거름을 바르는 것은 성장의 길을 걸어야하는 학생의 삶에 한치의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 한줌의 거름이라도 적당한 때에 적당한 장소에 부어주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연말시험을 코 앞에 둔 어느 날,
나무위에 풍성히 맺힐 열매를 꿈꾸며 오히려 땅을 파고 거름을 붓는 지혜가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