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내가 안 할 걱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영화 시사회를 한다기에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냥 보았다. ‘그대 어이가리’라는 영화인데 사전 정보 없이 보다가 서서히 이건 내 인생인데 싶다. 누가 피해가겠는가? 한 때 건배사로 인기였던 ‘99 88 234’는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을 앓고는 죽자는 염원이었다. 고통 없이 살다 가는 죽음의 복을 소망하는 것이다. 큰 복이겠다.
노연희씨는 건망증이 있다. 아니 치매 초기다. 노망이라고도 했고 알츠하이머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정확히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제정신으로 살고 싶다. 딸을 결혼시킨 뒤 부부가 조용한 시골에 와서 지내려고 한다. 이들 부부는 한 때, 어린 아들을 잃고 힘들어했었지만 그런대로 잘 참고 살아왔다. 재능이 있는 남편이 바깥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아내와 함께 지내고자 하는 것은 아내의 건강이 걱정돼서다. 여기까지는 참 보기 좋다. 누구나 안 좋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것 같다. 반면에 무엇인가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잘 안 된다. 새로운 것을 익히고 숙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대충 듣고 넘기는 버릇 때문에 기억하는 기능이 퇴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거나 관심 있는 것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다고 기억이 망가질까?
나는 자녀들에게 말했다. 살만큼 산 나이가 되면 아플 때 연명치료는 않겠다고. 병원 말고 집에서 조용히 쉬다 가겠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간병의 부담은 주고 싶지 않으니 시간제라도 요양보호사나 간병사를 둘 형편은 되면 좋겠다. 제 발로 화장실 가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많이 들어 알고 있다. 그러니 몸을 아끼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운동이지 싶다. 이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웰 비잉 못지않게 웰 다잉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실이다. 밥을 먹고 살면 다른 욕심은 말고 건강하게는 살다 가고 싶다.
주인공 연희씨는 기억이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깜빡깜빡 한다는 것을 알고 메모 같은 일기를 적는다. 불편한 진실을 알고 존엄하게 죽는 것을 원한다. 당신이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 어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불안한 일이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안락사를 시켜달라지만 가족들은 쓸데없는 말 말라고, 말도 안 된다고 펄쩍뛴다. 그러나 현실은 고통이다. 벽에 0칠을 할 때 까지 살라고 하지만 당해보면 못할 일이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져 간다.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요양병원에 보냈다가 퇴짜를 맞은 연희씨는 중증이다. 끝까지 아내를 집에서 돌보겠다는 남편도 지쳐간다. 거들어 줄 딸은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다. 왜 금세 먹고 또 먹으려 할까? 냄새나는 빨래와 목욕은 감당한다고 해도 불을 내거나 가출을 하는 것은 힘들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 서로 손을 묶고 잔다. 죽일 수는 없으니 죽어주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면제를 먹여서 계속 재워야 할까? 벽에 0칠을 하는 환자는 원쑤다. 의사는 정신병동에 가두라고 조언한다. 이를 어찌할꼬?
‘그대 어이가리’는 일찌감치 제 50회 남부 영화 예술 아카데미 영화제 6관왕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51관왕이 되었다. 특히 제42회 파이브 콘티넨츠 국제영화제에서는 단일 영화 최초로 11개 전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또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사운드 디자인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만큼 ‘그대 어이가리’는 완성도가 높다.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다. 남편 동혁은 소리꾼 같다. 국내에서는 22년 4월에 열린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제 3월 8일 개봉한다. 오랜만에 피해갈 수 없는 우리들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안락사, 존엄사에 대한 많은 논의를 하게 될 것 같다.
남편은 아내를 정갈하게 고운 한복으로 차려 입히고 휠체어를 밀며 마지막 여행을 한다. 들꽃들이 다투어 핀 어느 호숫가, 아내는 후련했을 것이다. 속이 탁 트이는 너른 호수. 시원한 바람. 기억을 못해도 느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곳이라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휠체어를 탄 채로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 하다. 물이 깊지 않기를 바랐다. 낭떠러지가 아니어서 안심이다. 진도 씻김굿의 길 닦음 대목을 부르면서 ‘민살풀이춤’을 추는 남편은 애절하기만 하다. 아니 간절했을까? 살기라고는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많이도 들어서 아는, 한을 느끼게 하는 우리 소리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 나는 간다~”는 구슬픈 곡 소리에 묻히는 장면 하나.
맛있게 먹으라고 아내에게 건네준 찹쌀떡. 기도하듯이 온 힘으로 진혼곡을 부르는 남편은 못 들었을 것이다. 찹쌀떡이 목에 걸려 켁켁거리다가 부들부들 떨며 이내 조용해 진 시간은 30초나 될까? 빌어먹을! 인생이 이건 아니잖아. 뜨거운 눈물은 왜 쏟아지는 거야. 안락사를 바라던 아내는 고마워했을까? 찹쌀떡으로 ‘미필적 고의’의 살인을 했다고 말할 사람 누군가요? 이게 남의 일인가요?
■ 조기조(曺基祚 Kijo Cho)
- 경남대학교 30여년 교수직, 현 명예교수
- Korean Times of Utah에서 오래도록 번역, 칼럼 기고
- 최근 ‘스마트폰 100배 활용하기’출간 (공저)
- 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비상근 이사장으로 봉사
- kjcho@u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