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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5-6년간 많은 글을 써 왔다. 전공인 인권법 관련 글은 물론 그것을 넘어 다양한 내용의 대중적인 글을 썼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전공 관련 글은 의무감에서 큰 재미를 못 느끼며 썼지만 대중적인 글은 그것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기쁜 맘으로 썼다. 그렇다 보니 후자의 글이 압도적으로 많아졌고, 그게 책으로 발전해 이미 6권의 교양서를 냈다.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쓰는가? 무슨 목적으로 남들 다 자는 이 신새벽에 글을 쓰는가? 무슨 목적으로 SNS을 통해 그 글들을 전파하는가?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런던에 있는 동안 꼭 한 번 시간을 내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싶었다. 조지 오웰! 오늘 드디어 그가 살던 집을 찾았다. 학교 근처 유스톤 역에서 빅토리아선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면 하이베리 앤 이슬링턴 역에 도착한다. 오웰의 자취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그가 런던 시내를 오갈 때 이용했던 바로 그 역이다. 이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웰이 생애 마지막 시기를 살았던 집이 있다.
캐논베리 27번지! 오웰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3년간 이곳에 살면서 20세기 최고의 문제작 <1984>를 썼다. 한 때는 런던에서 가장 예쁜 공원이라고 불렸던 캐논베리 스퀘어! 오웰이 매일 산책하며 거닐던 집 앞 공원이다. 70년 전 오웰이 살던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 조지 오웰이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살았던 노팅힐의 캐논베리 스퀘어 27번지
나는 공원에서 한참이나 서성이면서 그를 회상했다. ‘아마도 그는 집을 나와 바로 여길 거닐었을 거야. 산책을 하면서 가끔은 벤치에 앉아 뭔가를 생각했겠지...’ 나는 그가 앉았을 듯한 벤치를 찾았다.
오웰이 살았던 집을 보면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글을 썼습니까?”
<나는 왜 쓰는가>(1946년). 그가 바로 이곳에 살면서 쓴 수필이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이 수필을 꼼꼼하게 읽었다. 수필 속의 내용이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오웰은 이 수필에서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매우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글쓰기에는 무릇 4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다. 글쓰기 동기에 관한 오웰의 이론이다. 그가 말한 것을 정리해 보자.
첫째, 순전한 이기심. 어떤 사람은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로 글을 쓴다. 이런 동기는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에게서 나타나는 성공의 심리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인기 작가란 사람들도 대개 이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둘째, 미학적 열정. 어떤 사람은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을 향한 열정이자 기쁨으로 인해 글을 쓴다. 글을 쓰지 않는 누구는 이런 것이 살아가는 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글 자체가 갖는 그 미학적 요소는 쓸모와 관계없이 글을 쓰게 하는 하나의 마력이나 마찬가지이다.
셋째, 역사적 충동. 어떤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후세를 위해 그것들을 보존해 두려는 욕망이 있기에 글을 쓴다. 매일같이 시시콜콜한 내용이라도 글을 써 일기로 남겨두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넷째, 정치적 목적. 어떤 사람은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기 위해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 때문에 글을 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책을 쓰더라도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 자유스러울 수 없다. 만일 누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고 말할 것이다.
오웰은 이렇게 네 가지 글 쓰는 동기를 관찰한 다음 자신은 천성 상, 평화로운 시기에 살았다면,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 번째 동기를 능가해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글을 썼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은 히틀러의 등장을 보면서, 스페인 내전을 경험하면서, 어느 시기부터 한 줄의 글을 쓰더라도,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치적인 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치적 글을 쓰더라도 미학적 열정을 담아 쓰고자 했다는 것이다.
▲ 조지 오웰이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살았던 노팅힐
이제 내게로 돌아와 보자. 내 글쓰기는 오웰의 그것과 비교해 어떠한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말한 첫 번째와 네 번째 동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글을 써서 뭔가 인정받고 싶다. 내 글이 남보다는 더 잘 썼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내가 쓴 글이 쉽게 무시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잘 쓰고자 노력한다. 부끄럽지만 이게 내가 글을 쓰는 일차적 동기다.
첫 번째 동기가 글을 쓰는 주요한 배경이지만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글을 쓰는 동력이지만 그것만 있었다면 지난 5-6년간 어떤 글도 발표 하진 못했을 것이다. 내가 글을 써 발표하는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오웰이 말한대로 그것은 정치적 목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내가 정치인이 되기 위해 사전 포석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내 생각을 전파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함이다. 내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기 위함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는 사회(국가)가 개인을 위해 물질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복지국가다. 이런 국가에서 개인이 존중되고, 개인과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가 가능하다. 나는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해 글을 쓴다.
바람이 있다면, 나도 오웰처럼 정치적 목적의 글을 쓰면서도, 그 글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그게 지금도 바랄 수 있는 꿈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 글쓰기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이기적 욕망의 소유자로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심정에서 글을 쓴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내 미력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출처 : 박찬운 칼럼 ‘박찬운의 아브라카다브라’
■ 박 찬운
현재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이자 변호사. 20대에 법률가가 되어(1984년 사법시험 합격)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변호사로 일하면서 양심범, 사형수, 난민, 한센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과 상임위원(차관급,군인권보호관 겸직)을 역임하면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차별금지법,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인정 등 인권위의 대표적 인권정책 권고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고, 특히 2020년부터 3년간은 수천 건의 진정 사건을 맡아 그중 500여 건을 인권침해로 인정해 관련기관에 피해자 구제를 권고했다. 바쁘게 살면서도 배우고 익히는 것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 미국, 일본, 유럽을 오 가며 전공인 인권법을 연구했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 보편적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2006년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인권연구와 함께 대중적 글쓰기를 시도함으로써 사회변혁을 꿈꾸고 있다. 『인권법』 등 여러 권의 전공서와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를 비롯해 다수의 인문 교양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