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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정성시’ 포스터
지난해 출간된 현기영 작가의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에는 제주 4·3 시절 산에 올라 투쟁에 나섰던 청년들이 부르던 노래가 소개된다. 이 노래의 가사는 “둥실 떠가는 작은 배 나갈 길 막연해”로 끝난다. 이런 문구에는 당시 그들이 지녔을 마음의 무늬, 그 불안과 정처 없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유튜브(‘산·들·바다의 노래: 음악으로 듣는 4·3’)를 통해 들을 수 있는 노래의 선율은 가사만큼이나 애절하고 서정적이다. 제목이 전해지지 않는 이 노래는 독자로 하여금 ‘제주도우다’에 등장하는 인물의 정서와 생각을 한층 입체적이며 풍부하게 느끼게 만든다.
4·3 당시 항쟁조직의 비밀연락원이던 김시종 시인은 4·3 발발 직전에 제주 중앙우체국 합창단 일원으로 독일 민요 ‘로렐라이’를 함께 부르곤 했다. 당시 시인은 애초 일본어 가사를 스스로 한글로 중역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토록 서정적인 노래를 즐겨 부르던 청년 김시종이 그 직후 우편물 방화 시도 사건에 연루돼 조국을 떠나 지금까지 난민이나 망명자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곡절 많은 인생을 반추해 본다. 그가 로렐라이를 부르던 순간에 과연 이 같은 파란만장한 운명을 상상이나 했을까. 하나의 가정이지만 만약 김시종 시인의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담대했던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면 우체국 직원들과 로렐라이를 합창하는 장면은 꼭 포함되어야 할 테다.
김시종 시인이 일본 밀항 이후 영영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통절한 그리움은 아버지 기일 20주기에 즈음해 발표한 산문 ‘클레멘타인의 노래’(1979, ‘재일의 틈새에서’ 수록)에 담담하게 표출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릎에서 함께 부르다가 기억하게 된 조선의 노래”가 바로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었다. 시인은 뒤늦게 이 노래의 기억을 통해 한때 황국소년이었던 자신과 거리를 두던 아버지의 슬픔과 고민을 이해하게 된다. 두 곡의 노래에 대한 묘사와 언급은 김시종의 역정(歷程)에 한층 생생한 실감과 아련한 여운을 선사한다.
최근에 각본집이 번역 출간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기념비적 영화 ‘비정성시’에도 로렐라이의 선율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타이완 판 제주 4·3이라고 할 수 있는 2·28 사건(1947)을 배경으로 한다. 친구들의 정치적 대화 와중에 축음기에서 울려 퍼지는 로렐라이의 선율은 연인 문청(양조위 분)·관미의 필담과 어우러지며 그토록 슬픈 영화 ‘비정성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조성한다. 일본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수용된 로렐라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였으리라(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도 로렐라이를 부르는 청년이 등장한다). 마치 민들레 홀씨가 퍼져나가듯 한 독일 민요의 선율은 국적과 이념을 초월해 동아시아 민중들의 마음을 관통한다. 70년대 후반 중학교 음악시간에 합창하던 로렐라이의 선율은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곧 제주 4·3 76주년이다. 그 시절 불린 노래를 통해 당시를 바라보면 어떨까. 그런 시도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마음과 고민의 속살, 그 열정과 의기, 빛과 그늘에 대해 한층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다. 서로의 생각과 감성이 극심하게 갈라진 이 시대에 함께 마음에 담아 기억하는 노래가 있다는 건 귀한 축복이 아닐까. 누군가의 창의적 예술혼을 통해, 시대의 우울을 달랠 수 있는 한국판 로렐라이 같은 노래가 만들어지기를 염원한다.
출처 : 한겨레신문
■ 권 성우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