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촘촘한 연립주택 단지안, 새까만 쎄단이 경사진 거친 길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자가용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햇볕을 받아 새까만 광택이 더욱 눈부신 저 차를 타고 나타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가끔씩 이삿짐 트럭이나 들고 나가는 단지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차는 우리집 앞에서 멈추었다. 뒷문이 열리자마자 콩 튀듯 두명의 남자 아이들이 뛰어내려왔다.
“아줌마ㅡㅡ”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으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들은 지웅이 민웅이었다. 포대기에 아기를 싸 안은 여인이 조심스럽게 내리고 지웅이 아빠가 뒤따라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저거 우리 자가용이에요”
작은아이 민웅이가 손가락으로 차를 가리키며 자랑하느라 아빠의 말을 가로막았다. 인사를 하던 아이의 아빠가 민망한듯 아들의 머리를 툭 건드리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들은 몇 해 전만해도 우리 윗층에서 살았던 가족이었다. 그 때와 가족 구성원이 바뀌긴 했지만....
한 지붕밑,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양 옆 이층 네 세대로 대단위 연립주택이었다.
평수가 큰 집은 아니었지만 아래층인 우리는 넉넉한 마당 차지를 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장독대도 만들고 거친 브록크담장 밑에는 라일락도 심었다.
어느 날 늦은 아침,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다. 상큼한 바람을 타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바이올린 소리같아 주위를 살폈다. 바로 내 머리 위에서였다. 서둘러 밖을 나가보니 어떤 젊은 남자가 창문에 걸터앉아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처음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그가 그 집의 주인 남자라는 걸 그때서야 알게되었다. 우리는 초면 인사를 그렇게 한 셈이 되었다.
언제 이사를 왔는지? 젊은이 인상도 좋았지만 바이올린 솜씨가 예사롭잖아 웬지 친근감이 생겼다.
그는 음악을 전공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개인지도를 한다고 했다.
그 시절에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은 부유층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별세계 사람들로 생각하는 대단한 대상이었기에 그 또한 평범한 인물이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가 알만한 음악가 집 안의 후손이라고 계면쩍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가 음악을 전공한 음악 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단순한 직업인으로 일탈했다. 그렇기에 순수 예술인으로 대접받는 가족들에게 외면 당하고 외롭게 산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춥고 배고픈 예술보다 먼저 생활인이 되어 잘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대하기가 편해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늦은 아침을 먹을때쯤 연습이 시작되었다. 잔잔히 들려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취하면서 우리 부부는 행복한 팬 이 되어갔다.
그가 일하러 나가는 시간은 늘 오후였다.
남자가 어린 두 아들을 돌보다가 두고 나갈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매달리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나가는 그의 발걸음은 늘 무거웠고 표정은 어두웠다. 보이지않는 아이들 엄마의 행보가 궁금했다.
어느 날이었다. 차 한잔 같이하자며 남자가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다.
젊은이들 살림이 얼마나 깔끔할까? 그런 상상을 하며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먼저 눈에 띈건 좁은 복도끝에 큼직하게 버티고 서 있는 냉장고였다. 일반 가정에서는 구경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놀랍게도 세탁기도 있었다.
살림 재미를 모르고 밖으로만 나도는 아내를 달래보려고 무리를 좀 했는데 영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짐작컨데 아내가 어느 사이비 종교단체에 광신자가 되어 이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사람사는 세상이 요지경 속이라더니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일이지만 딱해서 걱정이 되었다.
착하게만 생긴 젊은이가 웬지 내 피붙이 동생같아 맘이 착잡했다. 그 날 마신 차 한잔의 인연이 끈끈하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바이올린 소리가 전처럼 즐겁게 들리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남편만이 여전히 낭만여행을 하듯 즐기고 있었다.
아빠의 출근길을 막아서는 아이들을 달래주다보니 은연 중 내가 아이들을 맡은 꼴이 되어버렸다.
조용한 딸 아이들만 키워온 내게 그 사나이들 장난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거칠고 험해서 지키기가 힘들었다.
라일락 여린 가지가 마구 잘려나가고 꽃밭에 꽃들도 그 아이들 발길에 짓밟히기가 일쑤였다.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말썽을 일으켰다. 내 애들 다 키워놓고 뒤늦게 이게 무슨 고역인가. 남의 일에 매여서 전전긍긍하는 내가 한심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래지않아 그들은 이사를 해 우리 곁을 떠났다. 동네가 조용하고 일상이 다시 평온해졌다.
몇달이나 지났을까?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 남자가 우리집에 불쑥 나타났다. 아이들이 서로 다투어 무슨 말인가를 떠들었다. 애들 말을 가로채듯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엄마가 하늘나라로 영영 떠나갔다고 담담하게 말을 했다. 제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할 만큼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어린 것들을 남겨두고 참으로 비정한 엄마였다. 그토록 무서운 소식을 왜 찾아와서까지 알려주는지 참으로 의아스러웠다.
이 년정도 지났을까. 어느날 그 아이들이 불쑥 우리집에 나타나 깜짝 놀랬다. 새 엄마랑 저 아래에 이사를 왔단다.
그날 저녁 어김없이 남자가 여인과 함께 인사를 왔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지만 웬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여인이 교편생활을 하다가 혼기를 놓쳐 노처녀로 시집을 왔노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날카로운 인상이 비호감이었다. 선머슴아 둘이나 딸린 남자와 결혼을 했을 땐 단단한 각오를 했을 것이다. 고삐풀린 아이들은 교육자 새엄마 만나서 무섭게 훈육을 받았는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를 굴려 어른들 눈치만 보는게 너무 낯설었다. 날개죽지 부러진 새들처럼 어린것들 쳐져있는 어깨가 측은했다. 아이들이 너무 갑자기 동심을 잃은게 아닌가 싶어 가여워 맘이 짠했다.
나한테 야단맞은 기억밖에 없는줄 알았던 아이들이 아줌마 아줌마 하고 따라주는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을 못받은 아이들이 야단치는 것조차 관심이라고 미운정이 들었나보다싶어 콧등이 시큰했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룬 남자는 열심히 일을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이사를 갔다. 전세를 살다가 집을 장만했다며 정식으로 초대를 해 주었다. 넓은 새 집에 멋진 인테리어며 네 식구가 행복해 보여 참으로 보기좋았다.
그들이 우리집에 자주 오기 시작한 건 여인이 아들을 낳은 후 였다. 경사가 겹쳐서 자랑하러 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재혼 가정의 문제는 언제나 아이들 때문이었다. 서로가 속시원히 내뱉지 못하는 심정을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싶은 것이었다. 여인은 여인대로 가슴에 묻어둔. 남자도 또 그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마음이 편해지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편하게 응석같은걸 하다가 돌아가는 그들. 산다는 일이 참으로 고달프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애환을 들으며 내 안의 고충도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것 같아 웃으웠다. 세상 사노라면 누구나가 고충을 품고 살게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도 터득하게 해 준 그들. 부자가 제일 행복할 것이라는 사십대 여인을 세뇌시켜 주었다.
속내를 털어놓아도 별탈없는 인연에 묶여 서로가 오가며 참 잘 지낸 세월이었다. 오래 기억되는 좋은 인연이었다.
그들은 자갈밭을 구르는 마차처럼 매끄럽지않은 길을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단단한 경제적 여유가 버팀목이었을까?
지금도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문득 그들 가족이 생각난다. 지웅이 민웅이도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할머니가 된 나를 보면 옛날 일이 생각날까?
미운 정도 정이라고 보기만하면 아줌마를 부르며 치마끝에 매달리던 아이들.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들 생모는 용서가 안된다. 고충속에서 성숙해 가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누구나가 알면서도 살아간다. 살아보지도 않고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그녀의 무책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웅이 아빠 바이올린 아련한 멜로디에 귀가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