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이 익어가듯 마음을 숙성시킬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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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익어가듯 마음을 숙성시킬 수 있다면

0 개 131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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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늬밤을 만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산책길에 다섯 알, 열 알씩 주워 모은 것이라며 알밤 한 상자를 선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정되어 있던 택배를 받는 날,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한 상자의 밤이 더 도착했으니 앉은 자리에서 밤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껍질이 잘 까지도록 밤을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벌레 먹어 동동 떠오른 것들을 추려내고 겉껍질을 벗겼습니다. 보늬밤을 만들 때 속껍질이 벗겨져 알맹이가 드러나면 이후 조리 과정에서 쉬이 터져버리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셋에 하나는 속껍질에 상처가 나고 말았습니다.


‘겉껍질 속에 있는 속껍질’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보늬’라 합니다. 보늬밤은 속껍질째로 데치고 조려 만든 저장음식인데요. 몇 해 전, 소박하고 아름다운 우리 먹거리와 일상을 담아낸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통해 대중에 소개된 이후 후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도전’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겉껍질을 깐 밤을 서너 차례 데치고, 마지막으로 설탕물에 충분히 조려내면 보늬밤이 완성됩니다. 아니, 여기에 완성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까 다시 생각합니다.


보늬밤은 만든 직후보다 한두 달 저온 숙성하여 먹으면 그 식감과 감칠맛이 더 좋아진다 하니 말입니다.


깨진 것들은 깨진 것들끼리, 온전한 것들은 온전한 것들끼리 모아 담았습니다. 오늘의 수고로 겨우내 건강한 간식을 까먹을 수 있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과거 저장음식은 생존을 위한 음식이었겠지만, 지금은 소소한 즐거움과 달달함을 담보하는 낭만의 음식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보늬밤을 만들며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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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음식이 익어가는 사찰 장독대 풍경


혹독한 추위로 동물은 물론 식물도 긴 휴식에 들어가는 겨울의 초입, 인류는 저장음식으로 다가올 계절을 대비했습니다. 장기간 저장할 수 있으면서 그 시간 동안 천천히 익어가는 발효음식으로 곤궁한 먹거리 사정을 이겨냈지요.

대표적인 발효음식으로는 각종 장류와 청국장, 김치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콩으로 메주를 쑤어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맑은 액체를 걸러내면 간장이 되고, 나머지 부산물을 건져 치댄 후에 숙성시키면 된장이 됩니다. 고추장은 고춧가루와 메줏가루에 쌀누룩을 혼합 해 익힌 것이고, 청국장은 삶은 콩을 짚에 넣어 발효시킨 것입니다. 장아찌는 채소를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에 넣어 삭혀 먹는 것으로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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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들에 핀 산야초나 열매 따위를 설탕에 절여 발효시키면 대용차(茶)나 에이드로 마실 수 있는 발효청이 됩니다. 절인 배추를 각종 양념에 무쳐 만드는 김치도 빼놓으면 서운하지요.


어린 시절 할머니 집 마당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항아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청소년일 때, 항아리들의 존재는 마당 한 구석에 그저 놓여 있는 오브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쨍쨍하다가 여우비라도 올라치면 “언능 가서 장독 뚜껑 닫아라!” 하는 호령이 떨어졌지요. ‘뚜껑을 처음부터 꼭 닫아 놓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열었다 닫았다 할까?’ 속으로는 불평도 했습니다.


장독대라고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고, 어떤 정성을 들이는 지는 남도의 한 사찰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절 후원에는 터줏대감과 같은 공양주 보살님이 계십니다. 스무 살 앳된 나이에 큰절 공양간에 들어가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 현역으로 공양상 마련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그의 ‘사찰음식’ 내공이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점심공양 시간, 밥종 치는 소리에 대웅전 앞마당을 가로질러 장독대 담벼락 아래를 지나면 항아리를 닦고 있는 공양주 보살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었던 주지 스님채 앞마당은 아마도 절에서 가장 양지바른 자리였을 거예요. 마른 헝겊으로 정성스레 당신의 몸집보다 뚱뚱한 수십 개의 항아리를 천천히 닦는 모습은 일견 수행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볕이 좋고 하늘이 맑은 날엔 후원 식구들이 분주하게 독 뚜껑을 열고, 공양주 보살님이 신중하게 그 안을 들여다보는 풍경도 무척 정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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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울력에서 체화한 보시 바라밀을 느끼며


메주, 된장, 고추장, 김치…. 관리와 조리는 공양간의 몫이지만 만드는 데에는 절집 대중 전체의 손이 필요합니다. 사찰음식은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만들고 공동체를 위해 만드는 음식입니다만, ‘같이의 가치’가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면 역시 겨울날 다양한 저장음식을 마련할 때의 울력(함께 일하기)일 것입니다.


11월 말 김장철이 되면 후원이 분주해집니다. 더욱이 채전에 직접 농사를 짓는 큰절이라면 무, 배추 뽑기부터가 김장의 시작입니다. 사찰 대중 100여 명과 신도, 참배객들이 다음 일 년 간 먹을 양이니 배추 1,500포기쯤은 예사입니다.


이전에는 직접 뽑아 운반한 배추를 흐르는 계곡물에 씻어 대형 고무 대야에 절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상황에 따라 인근 마을 김장 시설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찰이라면 이미 절여진 배추를 장만할 수도 있겠지요.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은 김칫소 만들기에 바쁩니다. 오신채와 젓갈이 없는 대신 대대로 내려오는 사찰의 비법을 담아 빨간 양념을 만들어 두어야 하고요. 40~50명이 함께 일할 수 있는 ‘무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결전의 날, 스님들은 물론 직원과 봉사자 심지어 템플스테이 참가자까지 이 공동체 울력에 투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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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앞치마를 걸치고 분홍색 고무장갑을 추켜올립니다. 희고 노랬던 배추가 붉게 물들어갑니다. 노스님이라고 열외일까요. 절집에 산 세월만큼 김장 울력에 참여해온 베테랑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맛깔나게 김치를 버무리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그 와중에 눈과 손은 빠르게 재료들을 훑어내고, 더러는 잘게 찢은 생김치를 옆 사람의 입 안에 넣어주는 재미로 김장 울력날의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하얀 입김이 나는 겨울의 초입에서, 대체로 야외 공간에서, 내내 허리를 숙여야 하는 고된 노동을 자처하는 것은 그것이 대중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절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만이 대중이 아닙니다. 소외된 이들과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이들도 우리의 대중입니다. 김장울력이 끝나면 절집마다 ‘자비의 김장 나누기’를 실천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을 실천해도 보시 없이는 수행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울력에 참여하는 것은 보시 바라밀을 체화하는 수행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잘 익은 발효의 맛처럼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가르침 


누군가의 혹은 모두의 노력의 결실로 잘 익은 발효음식은 이후 쓰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제대로 된 발효음식은 다른 음식을 만났을 때 더욱 깊은 감칠맛을 냅니다. 장 한 수저만으로도 무언가 심심하고 어설픈 맛을 근사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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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도 장과 같은 조미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심심하고 어설픈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이것을 만나면 번뜩 정신이 차려집니다. 거칠고 날것이었던 내면이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익어가고 있음을 불현듯 느끼게 됩니다. 제게는 그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발효음식과 마찬가지로 삶과 어우러져 숙성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듭니다. 혼자 뚝딱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과 도반의 힘으로 함께 나아가게 됩니다. 자칫 ‘옳으신 말씀’을 방패나 채찍처럼 휘두르다간 지나치게 발효된 된장처럼 그르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익어가고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이 익어감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관여하고 있는지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별의 별 재료로 별의 별 김치를 다 만드는 것처럼 별의 별 감정과 상황과 경험들이 인연법이라는 진리로 귀결됩니다. 무엇보다 이것, 준비하는 과정은 어렵지만 한 번 장만해 놓으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든든합니다. 이 모든 결실을 혼자 누리는 것보다 함께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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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잘 익혀가는 일에 대하여


깨진 보늬밤을 모아 놓은 병을 열었습니다. 달팽이 진액처럼 찐득하고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정체모를 실패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경험치 하나를 얻었으니 나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실패와 경험이 생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원인과 조건에 따라 다가오는 것들을 원료 삼아 마음을 잘 익혀가는 것만이 부처님의 제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일 것 입니다.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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