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식물 줄기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삼각 돛,
큰 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통나무 배,
긴 나무를 균형지게 본체 좌 우측으로 동여맨 카누에 몸을 싣고,
가족과 친지들을 뒤로하여 폴리네시아 군도를 떠나
언젠가 조상들이 보았다는 전설의 저편을 향해
고향을 떠 난지 근 서너 달이 되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말려 준비해준 식량과 어포는 거의 다 떨어져가고,
아껴 둔 식수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쯤 잠깐이라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영영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저 멀리 대양 너머에 하얀 긴 구름의 띠가 나타났다.
“저것은 틀림없이 어떤 육지에 걸려있는 구름일 거야?”
쿠페는 양팔 근육에 탱탱한 힘을 집어넣어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구름의 띠는 보다 선명 해지며 다가왔다.
그것은 고향에서 멀리 고기잡이 나갔을 때 집이 있는 섬쪽에 어렴풋이 걸려있는 흰구름 바로 그것과 흡사했다.
구름은 멀리 아득하고 길게 산에 걸린 듯 보였다.
눈을 깜박이며 미간에 힘을 주어 시선을 집중하니 짐작은 확신이 되어 다가들었다.
카누는 살랑거리는 파도에 흔들리고 물결은 뱃전을 어르고 있었다.
돛대를 잡고 서서 햇빛을 가린 이마위의 손,
구리 빛 얼굴에 빛나는 눈매
쿠페가 외쳤다.
“아오테아로아”(멀고 긴 흰구름의나라)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
뉴질랜드 마오리의 조상 쿠페가
멀고 긴 흰 구름의 띠를 보고 바다에서 외쳤던 말이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긴 구름의 막을 뚫고 들어온 전설속의 사람,
그로 인하여 뉴질랜드는 시작되었고
그는 마오리의 조상 뉴질랜드의 전설이 되었다.
세계지도를 펴고 태평양을 보라,
육지는 바다 크기에 눌려 작은 윤곽만이 또렷하다.
큰 대양이 눈에 들어오고 점점이 이어지던 작은 섬나라
폴리네시아 군도를 지나 아래쪽을 보면
호주, 남아메리카, 남극,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1시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오래 전 명절때면 부산 가는 길보다도 더 빠르다.
그 가깝고도 먼 길을 항상 서럽게 오고 갔다.
그럴 때마다 처자식 두고 떠나는 심정은,
얼굴엔 미소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뭉클한 느낌을 감추어야만 체면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 살아온 날들이 그러했다.
특히 여행은 더 쓸쓸했다.
그것은 어차피 헤어짐에 대한 연속이다.
외지고 외진 오지에서의 외로움,
그것들이 모여 인생을 알게 하고 철학 또한 생겨난다.
이민 초기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쿠페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의 심정을 헤아려 가며,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뉴질랜드 외진 곳을 골라 약 1개월 정도 여행한 일이 있었다.
어스름 저녁이었다.
지도를 잘못 읽은 탓에
우리 일행은 늦은 뉴질랜드 북쪽 카리카리 반도의 초입을 지나고 있었다.
적막을 뚫고 귓가에 퍼지는 파도소리는 불안했고 달빛은 희미했다.
일행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한참을 지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니
가스등 켜 놓은 허름한 민박집(bnb)이 나타났다.
세속의 동양인을 반갑게 맞이하던 중풍 걸린 할아버지의 그나마 힘들게 흔드는 가냘픈 손,
그 손에 얹힌 희미한 달 빛,
파도 소리는 처량하고
등대의 불빛처럼 가냘픈 자연의 숨소리는
어스름 달빛에 싸여
겨우 새우잠으로 곤한 밤을 깨기를 몇 번
드디어 아침이 오면
백사장에서 허리까지 차오르는 파도를 어르며 낚시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그럴 때면 파도를 타고 넘던 팔뚝보다 큰 물고기는 퍼덕거리고
물결에 쓸려온 나무토막을 도마삼아 듬성듬성 썰어 놓은 투박한 회를
손가락으로 대충 초장에 찍어 먹으며 반찬을 대신하던,
그렇게 우리 일행은 그곳과 함께했다.
나는 뉴질랜드 외진 곳을 셀 수 없이 여행한 경험이 있다.
여행하며 집 고쳐주는 목수일을 하다 보니 전국 어디 든, 심지어는 한국에서 까지도 집 고쳐달라는 연락이 오고
체면을 가리지 않고 떠나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지의 세계에 상륙하던 초창기 원주민들이 그러했을까?
그럴 때마다 가능하면 자연이 내어준 야채, 과일만으로 소식하며 쿠페의 심정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려 거든 모든 것 내려 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여행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하찮게 지나친 나그네일지라도
자연은 여행객의 모두를 담고 그곳에 서있을 것이고
스친 흔적대로 자연은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질랜드 여행은 외롭게 시작해야 한다.
외롭게 시작한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참 길을 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고 외지고 외진 뉴질랜드 오지에서 들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박함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추억은
지나보면 분명 아름다워질 것인데
그런 것들을 통하여 삶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카리카리 반도 끝,
긴 백사장 언저리 가스등 켠 작은 민박 집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노 부부와의 희미한 기억,
흔들리던 시절 삶의 희미한 등대가 되었던 노부부,
초심으로 돌아 가 그들을 다시 기억하고 싶은 날이다.
다시 여행을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