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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
사찰과 숲, 그 특별한 관계
우리나라의 걷기 좋은 숲 중에서도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숲을 꼽으라면 단연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다. 수평의 산책길과 수직의 전나무 고목들이 만들어 낸 조화로움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간간이 섞인 낙엽수 고목들도 운치를 더한다. 살아온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연륜처럼, 하늘을 향해 끝없이 곧고 높게 나아가는 듯하다. 이 숲에 서면 굳이 명상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깊은 사유의 시간에 잠기기 마련이다.
“오대산 숲은 우리 월정사 스님들에게 수행과 기도, 참선의 학교였습니다. 숲이 곧 사찰이고 사찰이 곧 숲이었지요. 우리는 그런 자부심으로 묘목밭을 만들었고, 그렇게 기른 나무로 월정거리에서 월정사까지 (전나무) 가로수도 심었어요. 60여 년 전 내가 월정사에 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완전히 폐허였습니다. 탑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었죠. 불사는커녕 사찰을 운영할 재정도 없었습니다. 산적한 어려움 속에서 오직 믿고 기댈 건 숲뿐이었어요. 임산물을 화전민들이 채취하고 팔아서 그 일부로 사찰을 유지했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원행(遠行) 스님에게 전나무숲은 오랜 도반과도 같다. 스님은 1960년대말 월정사에서 출가한 후 지금까지 이 곳에 머물며 60여 년을 숲과 함께해 온 ‘영원한 산감’이다.
스님이 기억하는 월정사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감내하며 뭇 생명을 품어왔다. 숲에 깃든 온전한 평온함은 수백 년을 이어온 존재의 증명일 터다. 그 평온함에는 한반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숲이 묵묵히 감내해 온 지난 세월의 상처 또한 깊이 스며있다.
필자는 이제 이 숲이 혼자 간직해 온 상처의 세계를 들여다보려 한다. 숲이 겪었던 상처 또한 1,400년을 이어진 역사의 한 단면이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한국의 산사만이 지닌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숲의 아픔은 곧 원행 스님이 겪었던 삶이자 기억이기도 하다. 우리가 월정사 숲이 간직한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은 숲의 무한한 베풂에, 그리고 숲을 지켜온 월정사 스님들의 고행에 비로소 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숲이 주는 거대한 베풂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일주문 전나무숲
일주문에 들어서면서부터 펼쳐진 전나무숲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마치 공간의 이동을 통해 시간을 뛰어넘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이다. 나와 자연이 다르지 않으며, 나와 이 대지가, 전나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인간의 짧은 생애로는 알 수 없는 자연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1,400년 전 월정사를 이곳에 창건한 이유 역시 이 전나무숲이 아니었을까. 맨발로 땅을 디딘채 걷다 보면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을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머릿속에서 질문이 이어진다. 이 숲의 전나무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을까? 과거 자장율사께서 오대산에 발을 디뎠을 때도 전나무숲이 함께 했을까?
월정사 전나무숲의 과거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88년 단원 김홍도 선생이 금강산 여정에 그린 월정사이다. 200년이 훌쩍 넘은 이 그림에서도 거대한 전나무들이 월정사를 둘러싸고 있어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다만, 부도전 주변으로는 어린 전나무 몇 주만이 서 있을 뿐 큰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고목들은 지금의 천왕문 주변인 남쪽에 둘러 위치하고 있었다. 전나무의 강건함이 고스란히 그림에 묻어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로 인해 알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200년 전과 전나무숲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역시 이 숲은 천 년 전에도 이 모습 그대로이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실제 그렇지 않다.
2006년 필자는 오대산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진행한 ‘오대산 월정지구 전나무숲 보전을 위한 연구’에 참여해 전나무숲의 나이를 살펴본 적이 있다. 당시 정확한 수령을 확인할 수 있는 전나무 중 가장 큰 나무는 가슴높이 직경이 84cm(둘레길이 약 264cm)였는데, 나이가 102년으로 확인되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나무였던 가슴높이 직경 64cm(둘레길이 약 201cm)의 전나무 나이는 가장 많은 135년이었다. 가슴높이 직경 100cm를 넘는 나무들은 여러 문제로 인해 수령측정이 불가능했지만, 다른 나무들의 생장 속도를 통해 유추한 결과,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 나무는 약 270년이었다. 이 나무는 예외적으로 많은 나이였고, 가장 큰 130cm 전후의 나무들은 대략 180년 정도로 추정됐다.
현재 월정사를 감싸고 있는 전나무 중 가장 오래된 나무들이라도, 200년 전 김홍도 선생이 월정사를 그릴 당시에는 태어나지 않았던 나무인 셈이다. 천년 숲이 아니라 한들 실망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나무들이 생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전나무 숲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 크기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진다는 것, 전통이란 그런 것임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사중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면 항상 이 길을 걸었습니다. 천천히 걷다 보면 길 옆의 나무들이 말 없는 위로를 건네는 듯했어요.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은 이 나무는 특히나 의지하고 교감했던 도반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대어 있다 보면, 또 힘든 걸 잊고 마음이 평온해졌지요. 오랫동안 받기만 한 이 숲에 이제는 휴식을 주고 싶어요. 우리가 숲에서 받은 많은 혜택을 우리 후손들에게도 물려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대가 아닌, 미래 후손들을 위해 이 숲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음을 느껴요. 다만 몇 년이라도 관광객이 들어가지 못하는 휴식년제를 적용하는 방안도 어떨까 생각합니다.”
원행 스님의 말씀처럼 전나무숲도 휴식이 필요하다.
100년 이상 수령의 나무들이 쓰러지는 일이 잦아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자연휴식년제에 대한 스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면서, 1년에 2주 정도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동안거와 하안거가 입재하는 주간은 어떨까. 어떤 방식이라도 일정 기간 월정사 전나무숲이 온전히 쉼과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된다면 좋을 터다. 우리가 건강한 삶을 위해 이 숲에 기대어 쉬어가는 것처럼 숲을 위해 잠시 방문을 멈추고 고요한 휴식을 준다는 의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연결되는 깨달음의 길, 선재길에는 어떤 상처가 숨어있을까? 곳곳에 숨어있는 이 상처들이 우리를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부도전을 지나 반야교를 건너면 도로도, 숲도 모든 것이 바뀌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도로는 포장되지 않은 흙길로 바뀌고 숲은 상록의 전나무숲에서 낙엽의 활엽수 숲으로 바뀌게 된다.
이 숲의 역사도 기록을 통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 4곳의 사고 중 3곳이 화를 입게 됨에 따라 조선은 전란 후 새로운 사고 건립을 추진했다. 새 사고지의 위치는 화재로부터의 안전을 최우선 기준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1606년, 월정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숲속 한 가운데에 사고가 건립된다. 화재 안전성이 입증됐다는 방증이다.
울창한 원시림 한 가운데가 과연 산불에 안전할까?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활엽수가 울창한 숲은 혹여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금세 꺼지게 된다. 사고지 선정 당시에도 이곳은 활엽수가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오대산사고가 조성된 후에는 사방 30리 경계 안쪽으로는 벌목을 금했다.
숲이 울창해야만 산불이 커지지 않기에 내려진 조치다. 이를 위해 수호군 60명과 승군 20명이 지켰다 하니, 이후 감히 월정사 주변의 숲의 벌목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활엽수 숲은 오랫동안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고난에도 스스로 회복한 숲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작성된 지도를 보면 이 숲이 그대로 보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방산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다 다시 남동쪽 능선으로 이어져 지금의 켄싱턴호텔이 위치한 곳까지 연결되는 능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큰 나무의 활엽수 숲이 유지되고 있다. 반면, 사찰의 영향력이 없는 경계 남쪽의 산은 대부분 나무가 없는 황지로 표시되어 있다. 비록 30리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는 거리이지만, 월정사 주변의 숲이 당시까지 철저히 보존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부도전을 뒤로 하고 만난 선재길에서는 또 다른 숲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물푸레나무와 거제수나무, 왕느릅나무, 층층나무, 벚나무, 졸참나무, 복자기, 고로쇠나무, 가래나무, 피나무, 서어나무, 까치박달나무, 야광나무, 당단풍나무 등등. 이 곳에 들어서는 순간 월정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나무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박달나무와 거제수나무가 대표적이다. 두 나무는 물이 풍부하고 토심이 깊고 토양 내 영양분이 풍부한, 한마디로 비옥한 산림 토양에서 주로 자란다. 수피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자작나무과’의 이 나무들은 아름다운 줄기 색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줄기의 껍질(수피)이 크게 벗겨지는 이채로움을 보여준다. 선재길에는 검은색의 수피가 돌돌 말려 벗겨지는 박달나무와 흰색의 수피가 크게 벗겨지는 거제수나무가 마치 서로 흰색과 검은색 중 어느 색이 더 짙은지를 경쟁하듯 반복된다. 자연 속에서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색을 지닌 두 종의 나무들이 마치 바둑돌 놓이듯이 선재길을 따라 놓여있다. 3월에도 온통 설경인 이곳에서 눈 위로 솟은 나무들이 이룬 흑백의 조화가 이채롭다. 그 모습을 온전히 감상하는 즐거움은 이 숲을 걷는 또 다른 매력이다.
1948년, 후퇴하는 군인에 의해 모두 불에 탄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월정사가,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중후한 고찰의 모습을 회복했다. 이 숲도 언뜻 바라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랜 세월의 고즈넉함을 선사한다. 예전과 같은 고목은 보기 힘들지만, 씨앗들을 땅속에 남겨준 덕분에 어린 후대목들이 같고도 다른 월정사의 아름다움을 수놓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듯 숲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회복한다.
선재길의 끝자락인 상원사가 가까워지면 장엄한 숲이 펼쳐진다. 1,400년 전 자장율사께서 오대산에 처음 발을 들이셨을 당시 숲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일제강점기의 상흔을 입지 않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면 원시림의 울창함까지도 볼 수 있다. 다만 마음 단단히 먹고 나서야 하는 다소 험한 길이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우리나라 산림지도(조선임야분포도, 1910년 작성)를 살펴보면, 북한을 제외한 우리나라 모든 산림 중에서 큰 나무가 자라는 숲은 고작 10% 남짓이었다. 조선 후기까지 대부분의 숲이 벌목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시림을 유지하고 있었던 월정사 숲은 너무나 훌륭한 목재생산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일제는 이 숲에서 박달나무 거목을 집중적으로 반출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박달나무 거목들이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벌목한 나무를 옮기기 위해 상원사까지 협궤철도가 건설됐으며, 나무를 계곡물로 이동시키기 위해 임시로 보를 막고 물을 가두던 시설인 ‘보막이’를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진 보막이는 당시 계곡에 벌목한 나무를 쌓아둔 후 많은 비가 내릴 때 터뜨려 나무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활용됐다. 일제는 이렇게 옮긴 나무를 가공하기 위한 제재소까지 건립했다고 한다. 이 숲의 목재 자원이 얼마나 풍부했는지 알 수 있다. 반야교를 건너면 만나는 좌측의 넓은 평지가 당시 제재소 자리이다. 목재의 반출은 일제강점기에만 이뤄지지 않고 해방 후에도, 전후에도 계속되었다.
숲의 역사 잊지 말아야
해방 직후인 1946년 동아연필이 설립되면서 연필 제조에 필요한 나무가 필요했는데, 이곳 월정사 숲은 최고의 적지였던 것이다. 철길과 제재소를 포함해 당시 벌목을 업으로 삼던 이들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박달 나무를 수확하던 모든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던 곳을 그대로 활용하기만 했으면 되었다. 단지, 주된 수출 목재였던 박달나무 대신 주된 연필 재료인 피나무로, 벌목하는 나무의 수종을 바꾸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이후 1968년 무장 공비 120명이 이 일대로 침투하며 또 다른 거대한 생채기를 남겼고, 이후에도 1975년 국립공원 지정 이전까지 벌목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월정사의 활엽수 숲은 치유하지 못할 것만 같은 상처를 입게 된다. 원행 스님은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재차 당부했다.
“지역주민의 애환이 담긴 회사 거리나 연필공장, 나무의 수탈을 위해 만들었던 ‘보막이’, 제재소와 철길의 흔적, 송진 채취의 흔적과 같이 실질적인 현장들을 꼭 사진으로 남기세요. 이미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떠났습니다. 아픈 역사지만 세월이 지나 사라지더라도 월정사를 찾는 분들께 보여줘야 할 게 아닙니까? 그렇게 실체를 봐야만 그 느낌을 알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뜬구름 잡는 소설책과 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숲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아픔들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숲 곳곳에 새겨진 상처는 마치 아물지 않을 듯 깊었지만, 그 치유와 회복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16군사정변 이후 치산녹화계획이 실행되면서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화전 정리와 식목사업이 추진됐다. 월정사 숲 또한 국립공원 지정 시점인 1975년을 전후하여 빠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360여 가구, 대략 2,500여 명이나 되었던 화전민을 내보내고 화전밭 복원을 진행한 것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활엽수림 사이, 선재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본잎 갈나무는 화전의 정리와 함께 식재된 것으로 보인다. 원행 스님에 따르면 이때 스님들도 식재 작업에 나섰다. 주민들에게 일당을 주고 숲 곳곳에 나무를 심었으며, 산감을 중심으로 벌목을 막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그럼에도 선재길 주변의 숲은 대부분 자연이 복원한 숲이다. 당시 잘린 박달나무와 거제수나무를 포함한 거목의 활엽수들이 남긴 씨앗이 이제 다시 완숙한 숲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곳 활엽수들의 나이는 70~80년 전후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이 정도 수령의 숲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드물다.
최근 강원도에는 외래종인 자작나무를 심기 위해 자생의 훌륭한 숲을 베어내고 있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자연은 이곳에 자생하는 나무를 키웠고 품어왔던 씨앗을 스스로 싹 틔우며 이렇듯 더 아름다운 숲을 선사한다. 모든 생명은 각자의 업을 가지고 태어나며 자신에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현재의 삶 또한 다음 생을 위한 기반이기에 생명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이유 없이 다른 생명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이미 숲에서는 많은 생명들이 어우러져 서로를 도와가며 조화와 균형을 꾀한다. 숲의 백미는 이렇듯 오랜 시간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며 만들어 낸 조화와 균형 속에서 나타난다.
“사찰 숲은 사찰의 역사를 품고 있는 숲이에요. 그냥 이벤트성으로 사찰 숲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사찰 숲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고 전문 연구자를 두어 숲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오랫동안 진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숲의 생태적 리듬은 오랜 시간을 두고 변화하기 때문에, 숲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만 미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월정사 숲을 찾은 대중들이 실질적인 생명사상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명상이니, 참선이니, 염불과 독경 같은 신행도 좋지만, 실제로 숲에 들어가서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선사들이 어떻게 지켜왔는지, 그리고 그 자연이 지금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울창한 숲과 월정사가, 그리고 그 안에 서식하는 동식물들과 함께하는 자체로 보여주는 가르침이 바로 생명사상이고 상생 아니겠습니까?”
숲은 아픔의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 아픔을 오직 스스로 혼자 품으려는 듯 말이 없는 숲이지만, 그럼에도 그 기억을 함께 하는 것이 월정사 숲을 찾는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월정사 숲을 걸으며, 이 숲의 아픔을 함께 온 몸으로 받아내신 월정사의 기억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고자 한다.
■ 오대산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033-339-6800ㅣhttp://woljeongsa.org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