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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인 션 캐럴은 인간의 심장이 박동할 수 있는 횟수가 30억번으로 늘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아니.. 이론물리학자가 뜬금없이 심장이라니.. 하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사실 이 발표는 현대과학의 발전에 의해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한가지 예시로 등장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여러 심혈관 관련 연구소에서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장기 중 하나인 심장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 오고 있는데요. 그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생소할만한 심장의 특징이 ‘총박동수에 의한 수명의 제한’ 입니다. 심장은 하루 평균 10만에서 12만회를 박동하며 평생 15억회 정도 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박동을 다 한 후에는 심장이 수명을 다 해 멈추게 됩니다. 결국 그 심장의 주인 또한 사망에 이르는거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짓을 해도 각 개인에게 정해진 심장의 최대박동수를 바꿀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운동을 한다 해도 최대박동수를 늘릴 수 없고 마약에 찌들어도 최대박동수를 줄일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뒤룩뒤룩 살이 쪄오른 고도비만 환자나 날렵한 몸매로 41.195 Km를 쉬지않고 달리는 마라토너나 심장의 수명은 총 박동수에 의해 정해져 있고, 만약 이 두명의 극단적인 개인들이 똑같은 최대박동수를 가지고 있다면 두명의 인생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끝을 맺는다고 볼수 있겠지요.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떠 올릴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면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는데, 그럼 그만큼 수명이 짧아진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는거 같아요’
그렇습니다. 위의 연구결과가 정확한 과학적 사실이라 한다면 우리의 수명은, 엄밀히 말하면 심장의 수명은, 몇년 몇개월 단위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총 몇번을 뛰었냐로 결정되기 때문에 빠른 심장박동을 유도하는 각종 육체활동들은 이론적으로 우리의 수명을 깎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요.
우리가 운동을 해서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면 심장근육은 그만큼 훈련이 되고 강해져서 한번에 더 많은 양의 피를 뿜어낼 수 있게 발전하고 결국 평상시의 심박수가 뚝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운동을 하는 짧은시간 동안엔 수명을 줄이지만 그외의 훨씬 긴 시간동안 수명을 늘리게 되어 기대수명이 연장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심박수가 적기로 유명한 마라토너들은 대부분 90세를 넘기며 장수하신다고 하네요. 결국 유한한 심박수를 가지고 더욱 긴 시간동안 생존하기 위해서는 심장을 더 강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겠습니다.
어릴적 양계장을 하시는 고모님댁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고모께서는 예쁜조카가 왔다고 기뻐하시면서 씨암탉 한마리를 잡으셨겠지요. 그런데 초등학생 어린나이였던 제가 그 닭이 씨암탉이란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름 도시에서 자라서 닭구경하기가 쉽지도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고모께서 닭을 잡으시면서 닭의 알주머니를 보여주셨거든요. 뱃속에 들어있는 주먹만한 공을 가르자 그 안벽에 질서정연하게 주욱 붙어있는 조그만 미성숙달걀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맨위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점점 크기가 커지다가 맨 아래에서는 딱 봐도 그냥 달걀의 모습을 하고서 세상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씨암탉의 뜻이 생식능력이 있는 암탉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진면목을 마주하면서 등골 어딘가가 으스스 떨리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모께서는 그런 저를 바라보시며 닭이 낳을수있는 달걀의 갯수는 이렇게 알주머니에서 부터 정해져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달걀생산 총량의 법칙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이지요.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 총량의 법칙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시는 법칙이 ‘지* 총량의 법칙’인거같은데요. 한 개인이 평생동안 저지를수있는 지*의 총량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젊어서 건실했던 청년이 장년이 되어 손가락질 받으며 살수도 있고 어려서는 통 될성부르지 않던 사고뭉치가 어른이 되어서는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 갈 수도 있다.. 뭐 그런 얘기입니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세상만사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것 하나 허무맹랑한 것이 없다고 위에서 말씀드린 심장박동수나 닭의 배란숫자도 이런 총량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유용하고도 유한한 자원을 꼽으라한다면 아마 에너지를 꼽을 수 있을거 같습니다. 어른들이 종종 ‘내 나이가 되면 시간이 없는게 아니라 에너지가 없어.. 그래서 뭘 하고 싶어도 못해’ 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에너지 입니다.
깊고 단 잠을 푸욱자고 일어난 아침,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쾌한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그 무엇이 바로 에너지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첫 걸음, 눈앞에 펼쳐놓은 진행계획을 응시하며 느끼는 가슴속의 전율이 바로 에너지입니다. 이러한 삶의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하고 가능성에 집중하게 하고 목표에 다다를 방법을 찾게합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이지요.
그러나 에너지는 유한합니다. 현실의 우주를 지배하는 몇가지 물리법칙 중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버젓이 존재할 정도로 우주의 구성요소가 보유한 에너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요소 중 하나인 인간의 에너지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이는 마치 총박동수가 정해져있는 심장과도 같고 총배란횟수가 정해져 있는 암탉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보유한 에너지의 총량은 그 한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고 그래서 이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 사용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소중한 에너지를 꺼내어 사용하게 하는 몇가지의 동기들이 있습니다. 욕심, 희망, 양심, 주변의 압력 등등..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를 뽑으라하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언가를 향한 끝없는 동경과 추구인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알토란같은 에너지를 꺼내쓰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산을 향한 사랑,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산 정상을 딛고 서 있는 정복자로서의 자아상을 향한 사랑은 오늘도 아령 서너개를 빈 배낭에 챙겨넣고서 밤 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넘게 동네를 걷는 이유가 됩니다. 이성을 향한 사랑, 더 정확히 말하면 나와 그 사람이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의 한 장면을 향한 사랑은 오늘도 졸린눈 비벼가며 전화기를 붙들고 끝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이유가 됩니다. 재물에 대한 사랑,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막대한 부가 가져다주는 자부심을 향한 사랑은 오늘도 쉼없이 기계를 돌리고 계산을 하고 정보를 분석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앎(지식)에 대한 사랑,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의 근간을 이루는 진리에 다가서는 희열에 대한 사랑은 오늘도 논문을 읽고 연구를 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이유가 됩니다.
이 모든 사랑에 기초한 행동들은 사랑이 끌어내는 강력한 동기에 의해 시작되며 사랑이 요구하는 에너지를 댓가로 지불합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면 할수록, 돈을 벌면 벌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의 에너지는 줄어들고 결국에는 고갈될 수 밖에 없지요.
자.. 얘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에 다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자원인 에너지를 골고루 잘 분배해서 전 인생에 걸쳐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에너지소비의 시작점이 사랑이라 한다면 결국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한 개인이 사랑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요소들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 하는가 하는 가치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AI처럼 관심을 쏟고 사랑해야 할 인생의 요소들을 아주 논리적인 추론과정을 거쳐 도출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인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에는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고 싶은 것, 두가지의 부류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황금같은 주말아침, 아빠는 ‘사랑해야 할’ 대상인 가족을 위해 가족야외 활동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사랑하고 싶은’ 대상인 푸른 바다와 그 곁에 홀로서서 낚시대를 드리운 자신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이 둘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한 쪽을 선택하고 그 사랑의 대상을 향해 에너지를 쏟는거지요. 심지어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등짝 스메싱 지수’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지요.
아직 인생의 연차가 오래되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의당 사랑해야 할 것이 있고 사랑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동일하다면 그처럼 반가운 일이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에겐 위의 두가지가 상충합니다. 독자분들 모두가 짐작하시듯 사랑해야 할 것은 학업이고 사랑하고 싶은 것은 노는 일이 되겠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부로 성공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와도 같습니다.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학생은 당연히 사랑해야만 하는 대상인 학업을 향해 에너지의 포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지요.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을 잘못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학생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그냥 공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재물 자체보다는 그로인해 누리게 될 윤택한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오늘도 땀 흘리는 운동선수가 줄넘기 갯수와 들어올리는 무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지난후 더욱 강인해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학생들이 품는 사랑의 대상,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쏟아 부을 그 대상은 자신 스스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웃과 세상에 대한 사랑 또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나 아직도 미성숙한 아이들에게는 조금 시기상조이긴 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긍적적인 미래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소중한 에너지를 부어가며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총박동횟수가 정해진 심장을 구슬려가며 꾸준히 운동을 반복하는 삶과 같습니다. 에너지는 부어져 종국에는 소멸하고 심장은 박동하여 끝내 멈추겠지만 그 에너지가 부어진 곳곳마다 훌륭한 어른이 서고 심장이 박동했던 곳곳마다 흥겨운 발자국이 남을 겁니다.
2025년의 첫달이 저물어 갑니다. 이제 곧 넘겨질 달력의 첫장이 내 삶의 유한한 또 한가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그 처럼 에너지는 유한합니다. 심장의 박동수 또한 유한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심박수를 세어가며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고르듯, 우리의 남은 에너지를 호기롭게 투척할 사랑의 대상을 골라야 하겠습니다. 그 선별의 지혜가 우리의 아이들과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