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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머인 난민신청자 라트나·자나크 씨의 아주 특별한 증심사 템플스테이
두 남자가 웃었다. 활짝 창문을 열고 온 마음을 열어 웃는
웃음은 증심사 대웅전 계단에 드리운 새봄의 햇살을
닮아있었다. 봄의 아름다움 너머 감동인 건 겨울을
지나왔기 때문일 터이다. 두 사람은 인생의 기나긴
겨울을 지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웃음은 추위가
절정에 이르면 봄이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듯했다.
드넓은 우주에서 보면 작디작은 하나의 점처럼 보인다고 해서 지구의 가치가 미미하다고 볼 수 없다. 여기 줌머인이 있다. 벵골인이 1억 6천만 명을 차지하는 방글라데시에서 줌머인들은 75만 명으로 약 0.5%의 소수민족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치타공 산악지대에 살던 선주민인 줌머인들이 방글라데시 영토로 들어갔다.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벵골인이었던 방글라데시는 정부 차원에서 불교도인 줌머인을 탄압했다. 줌머인들은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항거했지만 중과부적이었고 많은 이들이 인도, 미얀마를 비롯해 전 세계로 망명했다. 이들은 자신의 뿌리인 치타공을 잊지 못하며 지금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박해·학살 사건 등 인권 탄압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줌머인은 약 100만 명, 이 가운데 180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2008년 한국에 온 라트나(44, Ratna Kirti Chakma) 씨는 재한줌머인연대에서 회장을 맡는 등 고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스님 신분이었다. 영주 성혈사를 거쳐 서울 화계사 등에서 템플스테이 외국인 담당 지도법사 소임도 맡았다. 현재 그는 난민신청자 신분이다. 생계를 위해 승복을 벗고 재가자로 돌아왔지만, 취업 제한 등으로 한국에서의 생활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재한줌머인연대 사람들과 따뜻한 교류 속에서, 가끔은 템플스테이 체험으로 신심을 다지며 작은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봄기운이 살짝 내비치던 3월의 첫 주말, 그가 동생처럼 여기는 줌머인 자나크(30, Janak Dewan)씨에게 증심사 템플스테이 동행을 청했다. 오랜만의 외출에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두 사람이 줌머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김포를 떠나 광주광역시 증심사로 향했다. 한국에 온 지 15년 된 라트나와 4년 된 자나크 씨는 증심사를 처음 방문한다고 했다.
증심사 대웅전에서 나에게 절을 하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서울에서 광주에 도착하여 잠시 쉬어갈 때 두 사람에게 그간 한국에서의 삶이 어떠했는지 묻자 자나크 씨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자못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확신에 찬 대답을 하는 얼굴엔 웃음이 잔잔히 번졌다.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그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한 라트나 씨도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었다. 두 사람만의 이심전심인가 하여 이유를 물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가보지 못한 세계, 알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진 않아요.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도요.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자 행복의 열쇠인 불교가 있으니까요. 불자로서 고맙고 기쁘게 생각해요. 한국은 낯선 곳이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서툰 한국말이지만 삶을 대하는 진취적이면서도 따듯한 마음이 그 미소에 담뿍 담겼다.
인도 명문 콜카타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나크 씨는 불안정한 난민신청자의 삶 속에서도 재한 줌머인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말한 ‘좋은 사람’ 라트나 씨가 그래왔듯이.
KTX 광주송정역에서 약 20분 이동해 마침내 증심사에 도착했다. 서울은 꽃샘추위에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씨였지만 사찰 곳곳의 나무들은 연둣빛이 감돌고 수선화, 목련은 바야흐로 꽃봉오리 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산수유와 매화는 노랗고 흰빛을 화사하게 발하고 있었다. 사철 푸른 신우대를 본 라트나 씨는 치아공 고향마을에도 같은 대나무가 많다며 반가워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증심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 덕성입니다. 자, 주위를 둘러보세요. 저기 증심사를 감싸고 있는 산이 유명한 무등산입니다. 사찰을 둘러보기에 앞서 저 무등산처럼 깊이 숨을 쉬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깊이 숨을 쉬며 그것을 느껴보세요.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나의 숨에 집중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두 사람을 처음 맞아준 증심사 템플스테이 지도 법사 덕성 스님은 사찰 안내에 앞서 숨쉬기를 권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환기한 뒤 이틀간 도반이 된 다른 한국인 참가자들과 대웅전을 비롯해 비로전, 오백전, 삼층석탑 등을 둘러보고 그 안에 담긴 뜻과 역사를 공부했다. 대웅전에는 깨달음에 이른 석가모니 부처님이, 비로전에는 모든 진리의 통합체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오백전에는 가장 불교적인 인격체인 오백나한이, 삼층석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것이 새삼 든든한 ‘기댈 언덕’처럼 다가왔다. 공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이 비워져 있다면 무엇 하랴.
고향 집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그리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타종 체험을 하고 저녁예불을 올리기 위해 대웅전으로 향했다. 먼저 대웅전에 들어갔던 라트나 씨는 뒤따라 들어 가는 자나크 씨를 보다가 특유의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함께 대웅전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대웅전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면 먼저 합장을 하고 반배를 올리지.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고. 예불을 마치고 나갈 때도 휙 나가지 말고 문 앞에서 이렇게 반배를 올리는 거야. 자, 같이 반배를 올리고 다시 들어가 보자.” 사찰 예절이 낯선 자나크 씨를 세심하게 이끄는 모습이 정다웠다. 예불을 올리기 전 덕성 스님의 말씀도 새로웠다. 스님은 “위대한 스승님께 존경의 예로 절을 올리는 것이지만 이번에 절을 할 땐 나 자신에게 절을 올린다고 여기며 해보세요. 나를 존중할 줄 알아야 타인을 높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희망을 꽃피운 주지스님의 공감
저녁 공양을 마친 후 증심사 주지 중현 스님께서 차를 내어주시며 두 사람을 맞아주셨다.
“제가 얼마 전에 대만을 방문했습니다. 그곳 박물관에 들렀는데 좀 더 찬찬히 보고 싶어서 일행을 먼저 보냈는데 어느새 박물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나오니 교통편이 쉽지 않았어요.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혼자되니 여간 낭패가 아니었습니다. 어렵게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짧은 시간도 황망했는데 낯선 타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생활은 얼마나 힘드실까요?” 긴장한 두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스님의 이야기는 공감이 얼마나 따뜻한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했다.
평소 광주지역 불자들의 동사섭 봉사 모임인 자비신행회와 함께 매월 ‘스님의 피자가게’를 열어 청소년을 돕고, 지역 외국인노동자들과 연대활동을 펼치는 등 실천행에 앞장서 온 스님은 두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다. 라트나 씨가 “줌머인 2세 어린이들이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 안타깝습니다.”라고 하자 스님은 “템플스테이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언제나 증심사의 문을 열어놓겠습니다. 언제든지 줌머인 어린이들과 함께 꼭 찾아주세요!”라고 하셨다.
잔잔한 호수에 인 작은 파문이 호수를 가득 채우듯 스님의 공감은 손에 잡히는 희망이 되어 고즈넉했던 차실의 공기에 생기를 채웠다.
차실을 나와 어둠이 내려앉은 경내를 걸어 숙소로 향하던 라트나 씨와 자나크 씨의 미소에도 희망이 어려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에서 나아가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지요!”라는 라트나 씨의 말이 명징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완전한 평등의 산에서
이튿날 새벽 4시 새벽예불에 참석한 두 사람은 덕성 스님과 함께 증심사가 깃들어 있는 무등산을 올랐다. 무등(無等)이란 견줄 상대가 없기에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으로 평등의 절대적 가치인 ‘완전한 평등’을 일컫는다. 아울러 무등(無等)은 불교의 ‘무등등(無等等),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유래했다. ‘비할 데 없이 높고,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은 가장 높아 견줄 이가 없는 스승, 부처를 지칭한다. 그 넉넉하고 푸근한 품으로 하여 광주의 어머니산으로 자리매김한 무등산 초입에서 수령 500여 년의 당산나무를 만나 그 아래서 스님과 함께 참선의 시간을 가졌다. 발걸음도, 의식도 멈춘 당산나무 아래로 부는 청신한 아침 바람, 흐르는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새삼 ‘고여 있지 말고 흘러라’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바야흐로 꽃소식이 시작되는 계절, 산을 내려온 두 사람은 동심으로 돌아가 한지로 연꽃을 만들었다. 꽃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던 최진수 템플스테이 팀장이 “꽃잎이 가지런하게 붙지 않아도 괜찮아요. 실제로 연꽃을 보면 붙어있다시피 한 꽃잎도 있거든요.”라며 이야기해 주었지만, 라트나씨는 어쩐지 꽃잎이 들쑥날쑥하다며 민망해했고 자나크 씨는 그저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추위 속에서도 봄을 꽃피우는 매화처럼
두 사람이 연꽃을 완성해 갈 무렵, 창밖에는 하루새 매화가 만개해 있었다. 맨 처음 봄을 알린다는 매화. 다른 꽃들이 피어나기를 주저하는,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시기에도 미세하게 꿈틀대는 봄기운을 감지하는 용감한 지혜의 꽃. 매화는 작지만 분명한 희망의 힘으로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매화를 바라보는 라트나 씨와 자나크 씨의 얼굴에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이 번져갔다.
난민신청자란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일 터이다. 그들에겐 문을 열 권한이 없다. 문 저편의 사람이 빗장을 열어주어야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랜 세월 문 앞에 선 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시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으로도 마음을 환하게 밝히고 사는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증심사 경내를 산책하며 기념사진을 찍던 자나크가 “오늘 참 행복했어요!”라고 말하자 그를 증심사로 안내한 라다크 씨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퍼졌다. 어려움이 9할이라도 오늘 1할의 웃음을 선택할 지혜와 용기가 있다면 가장 먼저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처럼!
■ 무등산 증심사
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길 177
062-226-0108 I https://jeungsimsa.org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