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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배신

0 개 319 오소영

<미수(米壽, 88세) 기념작> - 단편소설 


주말 늦잠을 자던 시연이 눈을 떴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뭘 이렇게 일찍부터 지지고 볶을까?”


시연은 주방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트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방을 나섰다.


“날씨 꾸물거리지 않아요. 이런 주말엔 김치부침개라도 부쳐 먹으며 놀아야죠. 호호…….”


줄리는 날쌘 손놀림으로 부침개를 뒤집으며 얼른 돌아서서 웃는다.


“늦잠에 꿈자리 좋더니 이렇게 별식을 먹게 되는구먼. 그래 맛있게 먹어줄게.”


시연의 좋아하는 표정을 보며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줄리는 “그럼 내친김에 멋지게 와인 파티라도 할까요? 안주 좋잖아요.”라고 말했다. 줄리는 평소 자주 있었던 일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하며 어깨마저 들썩거렸다.


“오늘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리 들떠 있어?”


시연이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줄리를 바라봤다.


“점 치세요? 어찌 그리 남의 마음을 잘도 헤아리신데.”


“진짜 뭐 있구나. 좋은 일이면 진즉 말했어야지. 얼른 말 해봐. 궁금해 죽겠네.”


“오늘 저녁에 손님이 오시거든요. 그것도 남자 손님, 기분 나이스에요.”


“그렇구나. 정말 기대해도 되는 손님인가 보네.”


줄리가 들 떠 있는 걸 보니 드디어 될성 부른 사람을 만났나 싶어 시연도 기뻤다. 줄리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시연에게 예쁘게 단장하고 있으라고 했다.


‘얼씨구. 자기 손님에 왜 나까지 끌어들여?’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시연은 욕실로 들어갔다. 이 아침에 파티를 하자는 데 세수 정도는 하고 나와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줄리가 커다란 쟁반에 부침개 접시를 올려놓고 와인잔도 챙기며 주섬주섬 상을 차렸다. 시연이 곱게 포장된 와인병을 들고 나왔다.


“거실로 오세요. 난로 피워 놨어요.”


줄리가 명랑한 목소리로 불렀다. 난로는 빨갛게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계절을 재촉하듯 곧 추위를 몰고올 초겨울 비였다. 꿉꿉하던 실내 공기가 온기로 가득 찼다.


시연이 이 낡은 집에서 제일로 꼽는 게 벽난로였다. 빨간 벽돌로 쌓아 만든 아담한 난로가 소박한 거실에 너무 잘 어울렸다. 분위기 메이커 첫번째로 재미있는 상상을 많이 했었다. 불빛 고운 난로 곁에 포근한 모포로 무릎을 덮고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뜨개질도 하리라.


“선물 받은 건 귀한 손님 오실 때나 쓰시고요, 지금은 그냥 이걸로 해요.”


무슨 생각인지 줄리가 와인병을 뺐어 제 뒤로 감추면서 말했다. 주절이주절이 수다를 떨면서 먼저 갖다 놓은 병을 추켜들었다. 빛깔 고운 빨간색 와인이 투명한 잔에 예쁘게 따라졌다. 두 여인은 잔뜩 멋을 부려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외쳤다. 목줄기를 따라 뜨겁게 내려가는 와인 한 잔에 벌써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연이 천천히 한 잔 마실 동안 줄리는 입에 쏟아붓듯 연거푸 잔을 비웠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켜는 것 같았다.


“아줌마. 거울 좀 보세요 얼른요. 너무 예쁘시다아.”


술기운이 벌써 올랐는지 줄리가 깔깔거리며 시연에게 재촉했다. 시연의 볼에 물든 홍조가 예쁘다고 수선을 떠는 거였다. 술 마신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녀가 놀라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참 오랜만에 마신 술이 전신으로 퍼지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화사하게 화장하고 다니라고 줄리가 부추겼다.


“왜 한물 간 나를 들쳐. 젊은 줄리가 더 예뻐져야지. 오늘 손님 맞으려면 때 빼고 광 내고 멋지게 치장하셔야지. 그런데 많이 궁금하다. 어떤 신사일까?”


적당히 취기가 오른 두 여인은 거침없는 수다를 펼쳤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줄리가 벌떡 일어섰다. 겉표지가 딱딱한 책을 한 권 들고 나오더니 머리 위에 얹었다. 책이 떨어지지 않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시연이 의아한 시선으로 줄리를 바라보았다.


“아줌마. 춤 춰요. 처음엔 이런 동작으로 스텝을 배우는 거예요. 호호호.”


줄리의 통통한 몸매가 그렇게 날렵한 모습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 엉덩이까지 살짝살짝 흔들어대는데 정말 멋지고 매력적이었다.


“정말 멋있다. 줄리는 요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춤도 잘 추고 못하는 게 없네. 대단해.”


시연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재롱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뭔가 뻐근하게 가슴으로 치올라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한동안 많이 우울하게 보냈다. 빵빵한 풍선처럼 잘못 건드리면 금방 터질 것 같아서 말을 건네기도 겁이 났었다. 오늘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정말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줄리는 매일매일 사는 게 가시방석 같다고 했다. 안타까워 피가 말라간다고도 했다. 영주권 때문이었다.


“아줌마 샘 노인하고 결혼할까 봐요.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면 되지 않겠어요.”


줄리는 시연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이 말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하고 그냥 한 번 떠보는 게 분명했다. 못할 말을 했다는 듯 얼른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측은했다. 왜 남의 나라에 무작정 와서 저리 고통을 당하며 사는지. 속사정을 모르니 그저 딱하기만 했다.


반 년 전쯤이었다. 처음 보는 현지 노인이 줄리를 찾아왔다. 뒤뜰까지 들어온 낯선 노인을 시연은 지레 겁을 먹고 경계했다. 줄리가 없는 것을 안 노인이 손에 들고 온 비닐 봉지를 빨래줄에 매달았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돌아갔다. 물고기였다. 다른 봉지에는 포도가 달랑 한 송이 들어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내게 맡겨도 될 것을 굳이 빨래줄에 매달다니.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뱃사람 샘 할아버지를 바닷가에 나갔다가 만나서 친구가 된 게 좀 되었다고 했다. 인상도 부드럽고 친절한 70대의 노인이었다. 가끔 전기톱을 들고 와서 마당에 어질러진 나무들을 잘라 가지런히 쌓아 놓아주기도 했다. 자주 만나 영어도 배우는 등 바닷가 인근에 있는 샘에 집에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었다.


샘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가 잡은 물고기들을 수시로 들고 왔다. 어떤 때는 들꽃 몇 송이를 들고 오기도 했다. 시연이 집을 비우는 날이면 노인을 불러 밥도 해서 같이 먹고 놀다 가기도 한다고 했다. 나이가 조금만 젊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시연은 그게 늘 안타까웠다.


어느 날 일찍 외출을 했는지 줄리가 보이지 않았다. 시연이 혼자서 아침을 먹으려는 참이었다. 그 때였다. 줄리가 무엇에 쫓기듯 허둥거리며 들이닥쳤다. 말 한마디 없이 급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 나오려나 기다리는 데 영 기척이 없었다.


“줄리, 아침 아직 안 먹었지? 나 지금 먹으려던 참이야. 얼른 나와. 밥 먹자.”


시연은 수저와 밥공기를 놓으며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줄리, 왜 안 나와? 밥 다 식는다.”


들고 있던 수저를 놓고 줄리가 어디 아픈가 싶어 가만히 방 문을 두드려 봤다. 기척이 없어 살며시 문을 밀었다. 그녀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놀라서 다가가니 이불자락이 들썩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췄다. 이불 속에 젖은 휴지뭉치가 한가득이었다. 눈물 콧물에 얼굴이 엉망이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어느새 퉁퉁 부어 있었다. 시연은 더 물을 수가 없어 그녀의 머리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소리 내어 더 격하게 울었다.


“울어야 할 일이라면 그래 실컷 울어. 그렇게 풀어내야 또 살아가지.”


시연이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딱하고 불쌍해서 시연도 눈물이 나왔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 아니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얼굴도 못 들고 웅얼거리다가 다시 시연의 품으로 무너져 버렸다. 듣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샘 할아버지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을 것이다. 게 잡으려다 구럭조차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니 그 절망감이 오죽했을까?


줄리는 그 상처를 다 털어낼 때까지 많이 힘들어했다. 기대했던 어리석음이 그만큼 분노를 더하게 했을 것이다. 친정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며 살고 싶다 했는데. ‘솔직히 영주권이 아니었어도 그랬을까?’ 줄리의 진심을 알 수 없는 시연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십 대 한참 나이에 칠십이 훌쩍 넘은 노인이라니. 말도 안 돼.’


설거지를 마쳤는지 줄리가 고구마 몇 개를 들고 난로 앞으로 왔다. 그는 잿불을 앞으로 끌어내고 그 속으로 고구마를 던졌다.


“고구마 진짜 맛있겠다. 줄리는 센스 백 단이야. 오늘 너무 행복해.”


오랜만에 찾은 줄리의 밝은 모습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싶었다. 와인에 취해서 시연도 말이 조금 헤퍼진 것이다.


“아줌마, 저 기술 자격증도 여러 개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다 소용없어요. 이미 비틀려버린 운명이에요.” 


영주권만 있으면 활개치고 어떤 일이든 겁 없이 잘 살 자신이 있다고 줄리는 말했다.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다. 부지런 한데다 음식 솜씨가 좋아서 교회 식구들이 반찬 주문을 자주 했다. 지천으로 깔린 민들레를 뜯어 담근 김치도 맛이 있었다. 전라도 손맛 그대로여서 생활은 그럭저럭 해결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연이 밥만 하면 반찬은 식탁에 차려 놓은 것으로 해결하며 나날이 도타운 정이 들어 피붙이 동생 같았다.


“저는 아주 나쁜 카드를 쥐고 태어난 인생인가 봐요. 좋은 일이 별로 없었어요.”


줄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또 닥쳐오는 비자 만료일에 신경이 쓰인다는 엊그제 말이 생각났다. 언제까지 저러고 살 수 있을지 시연도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온다는 손님은 도대체 누구일까? 제발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면 좋겠는데……. 속으로 간절하게 빌어주었다.


비는 그쳤다 다시 내리고 온종일을 그렇게 축축하게 지냈다. 시연은 온다는 손님을 위해 자리도 피해주고 싶었고 무료함도 달랠 겸 저녁 무렵 집을 나서려고 일어섰다.


“어딜 가시려고요? 집에 계셔야 해요. 예쁘게 화장이나 하시구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손에 집어 들려던 우산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줌마, 사실은요. 제 손님이 아니고 아줌마 손님이 오셔요.”


시연이 놀란 눈으로 줄리를 돌아보았다.


“리처드라는 분 아시죠? 그동안 집에 몇 차례 다녀가셨는데 오늘은 꼭 뵈어야 한다며 저한테 부탁했어요.”


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줄리를 빤히 쳐다봤다.


“어이구, 멋진 신사 분이던데요. 언제 그렇게 사귀셨어요.”


그녀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시연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오후 시간이 지루했던 시연은 정임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대 지금 뭐하셔?”


“하긴 뭘 해요. 손주들과 뒹굴고 있지. 왜에?”


“그럼 우리 만납시다. 내가 지금 당신 집 아래 공원 앞으로 올라갈게.”


시연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비가 온 뒤라 공원에는 아무도 없을 거였다. 정임씨랑 실컷 수다라도 떨 심산이었다. 거리상 시연쪽이 좀 더 먼 편이라 재빠르게 걸었다. 저만치 공원이 보였다. 정임씨 옆으로 다가가는데 어떤 남자가 앞을 가로막아 섰다. 키가 훤칠하고 인상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피부를 보니 중동쪽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코리언을 만나서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시연은 어찌할 줄 몰라 어정쩡한 상태로 서 있었다. 부산에서 8년이나 살았다고. 그가 더듬거리며 한국 말을 했다. 그래서 코리언을 만나면 너무 반갑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던 시절 그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의 반가워하는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공원에 올라가려는 여인들을 자기 차로 데려다 주겠다며 호의를 보였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여인들의 뜻을 알았는지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운전면허증이었다. 자기 신분을 밝혔으니 걱정 말라는 의도임을 알고 웃음이 나왔다.


이름은 리처드. 나이는 57세였다. 시연과 동갑네인 정임씨가 “동생이구먼” 하면서 서슴없이 먼저 차에 올랐다. 그는 천천히 공원을 올라가 한 바퀴를 돌았다. 작은 공원 한 바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출구를 향해 내려오며 그가 말했다. “더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싶은데 괜찮겠느냐”는 거였다.


리처드가 여인들을 데려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원추리공원이었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까? 고목으로 가득 찬 공원은 언제 봐도 경외감으로 눈이 휘둥그래지는 곳이었다. 언덕바지를 뱅글뱅글 돌아서 정상에 오르니 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아래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그래서 ‘원추리(One Tree)공원’이라고 부른다고 남자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공원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툭 터져 온 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다. 비에 씻긴 초록색 나무들이 집들 사이사이에서 산뜻하게 돋보였다. 시연은 아이들을 따라 한두 번 가 보긴 했지만 여유 있게 정상까지는 가보지 못했었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구경을 하며 잔잔한 감동으로 가슴이 꽉 차 왔다. 초행인 정임씨는 공원 입구서부터 눈이 휘둥그레 가지고 감탄의 말을 쏟아냈다.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자랑한다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리처드가 흡족해하는 건 물론이었다. 자기도 기쁘다며 점잖게 웃어주었다. 그는 곧장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때서야 시연은 꼭 잡은 정임씨의 손을 놓을 수가 있었다. 든든히 지켜주는 남편이 있어 그런지 정임씨는 담대했다. 가끔씩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을 툭툭 건드렸다. 혼자인 시연에게 잘 해보라는 신호였다.


“이 사람 점심은 먹었는지 몰라. 커피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을까?”


정임씨가 시연에게 넌지시 귓속말로 전해왔다. 누구 해 먹이기를 좋아하는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정임씨가 자기 집으로 가면 애들하고 얘기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그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반색을 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서 위로 힘껏 올려 보였다. ‘그냥 보냈으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두 여인은 마주보며 웃었다.


정임씨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외출을 했고 설상가상으로 정임씨는 열쇠도 안 챙겨 나왔다. 그렇다고 리처드를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할 수 없이 시연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시연은 줄리와 함께 사는 집이니 사실 가기가 꺼렸다. 윗사람으로 체면도 그렇고 민망해서 쭈뼛거렸던 것이다.


정임씨는 아들 집에 잠간 다니러 와 있는 형편이었다. 오래 사귄 친구는 아니었지만 모임에도 같이 나가고 많이 이무러운 사이이긴 했다. 그래도 조심할 건 해야 했다. 자기 집에서 한다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묘하게 일이 꼬였다.


마침 줄리는 집에 없었다. 포트에 급하게 물을 끓여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대접했다. 리처드는 코리언 커피 맛있다며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고맙게도 줄리가 오기 전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그때가 언제라고. 웃기는 사람일세. 그 사람이 왜 날 찾아와?”


“점잖고 멋져 보였어요. 잘 해 보시지 왜요?” 


줄리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연이 민망해서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리처드는 그 사람이 약속했다는 정확한 시간에 정말로 왔다. 말끔하게 차리고 나타난 리처드는 전에 본 그 리처드가 아닌 것 같았다. 시연이 당황하고 놀란 것은 그동안 여러차례 다녀갔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반갑다고 입을 크게 벌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어린애 같이 소박하고 순수해 보였다. 어쩐 일인지 지난번에 보았던 인상과는 너무도 달라보였다. 조심스럽게 같이 좀 나가자고 말하는데 시연은 겁이 났다. 친구 집으로 가서 정임씨와 함께 하자고 했다.


리처드가 시연을 차에 태우고 달려간 곳은 정임씨의 집이 아니었다. 시티에 있는 조용하고 예쁜 카페였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마주 앉았다. 처음 맞이한 경험이라 시연은 앉아있는 그 자체가 불편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벽에 걸린 액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그냥 넘길 리 없는 그가 두 손을 테이블 위로 가만히 올려 놓았다. 그리고 넌지시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왜 그리도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저 눈빛. 시연의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남편에게서 느꼈던 눈빛. 저런 눈빛을 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아득했다. 리처드가 뭘 마시겠냐고 묻는 바람에 퍼뜩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과 친구하고 싶었다고 조용히 속삭였다. 거의 매일을 시연의 집 주변에서 서성였다며 부끄러운 듯 고백을 했다. 그도 긴장을 했는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내 맘은 이런데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왜 이제 나타났느냐고 따지고도 싶었다. 그러나 시연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떨리는 속을 달래기에 바빴다. 자기의 일방적인 생각이니까 잘 생각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놓여 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날은 그렇게 점잖게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쑥 건넸다. “언제든 당신의 택시가 될 테니까 필요하면 꼭 불러달라”고 부탁처럼 말하며 돌아갔다.


시연은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리처드의 투박한 얼굴에서 빛나던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가 눈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잘 생긴 새까만 눈썹과 동그란 눈이 떠올랐다. ‘택시가 되겠다니…….’ 처음으로 느껴보는 묘한 감정을 수습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창문으로 비껴 드는 보름달 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일렁이는지 문 틈으로 들어온 샛바람에 가볍게 커튼자락이 흔들렸다. ‘이 나이에 남자라니……. 미쳤지. 말도 안 돼. 안 돼. 안 돼. 재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친구하자는 데 그것도 못해?’


혼자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했다. 긍정을 했다가 또 부정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 나이까지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면 여자로서의 행복은 없었다. 이성의 사랑이 뭔지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외국인 남자 특유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시연은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결혼을 했다. 그리고 스물여덟에 청상(靑孀)이 되었으니 기구한 운명이었다. 신랑은 부모님들이 형제간처럼 지내는 이웃집 오빠였다. 철들기 전부터 그의 손을 잡고 오빠 오빠하며 따라다녔던 남자. 그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모님들이 결혼을 시켰다.


남편은 집에서 좀 떨어진 지방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주말부부로 살면서 남매를 낳았다. 손주 손녀가 예뻐 분가를 시켜주지 않는 부모님들이 야속했지만 아이들이 유치원 갈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남편은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언제나 심야버스를 이용했다. 어느 날 밤, 그 버스를 탄 게 남편과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졸음운전이 불러온 대형사고에 남편은 저세상으로 떠났다. 서른 살 청춘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시연은 친구들한테 일찍이 좋은 신랑 만나 잘 사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평화롭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게다가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갑자기 치매끼가 온 시어머님은 날마다 아들이 왜 안 오냐며 며느리를 들볶았다.


“네 년이 뭔가를 잘못했기에 이렇게 안 오지.”


애써 다독이고 힘이 되어주던 시아버님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아들이 있는 먼 곳으로 떠나가셨다. 친구들은 어엿한 처녀로 신나게 놀고 있는데 왜 그리 일찍 시집을 갔는지. 거기 나보다 더 좋은 여자가 있었던가. 뭐가 그리 급해 서둘러 갔을까. 원망스러워 하늘을 쳐다봤다. 이 아이들을 어찌 키우라고 그리 갔느냐고 허공에다 소리쳤다. 그리고 밤이면 이불 속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 저~어거 아빠별.”


엄마 무릎에서 뒹굴던 아이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옹알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막연하지만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엄마를 지켜주는 등불이었다.


여동생 하연이가 서울로 시집을 갔다. 사돈 어른들의 인품이 좋았다. 신랑은 물론 가족 모두가 따뜻해서 정이 가는 집안이라고 좋아했다. 시연은 동생이 언니를 닮지 말고 백년해로하고 잘 살아주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이북에서 피난을 나온 사돈 어른들이 피눈물나게 일군 재산이 광장시장에 깔려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조금도 부자티를 내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가정이라 하연이 적응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연로해진 시어머님이 운영하던 포목상을 하연에게 물려줬다. 시연과 다르게 적극성이 있는 하연이 시어머님 맘에 들게 장사를 잘했다. 일손이 모자라 사람을 쓰려고 할 때마다 하연은 언니를 떠올렸다. 치매 시어머님 잘 모신다고 도청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았다는 언니. 문중의 추천이란 게 언니를 꽁꽁 붙들어 묶는 것 같아 하연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아이들은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 가끔씩 좋은 상대가 있다며 친정 부모님들이 시연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비록 세상 등진 사람이지만 시연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사람뿐이었다. 한번도 재혼이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잠 못 이루는 밤에는 두어 번 뜨거웠던 남편과의 특별한 밤이 떠오르곤 했다.


“엄마, 나 서울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어쩌지?”


아들 준수가 어느 날 불쑥 한마디를 내뱉으며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 나도 서울 가고 싶어. 이모집으로 가면 안 될까?”


딸 미경이까지. 이들은 전에부터 가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눈치였다. 어느 날 하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발 서울로 올라와 함께 일하며 살자는 제안이었다. 시연이 독하게 맘을 먹고 하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문중 어른들도 그동안 애썼다며 이제 아이들만 잘 키우라고 격려해 주었다. 치매가 심해진 시어머님은 시설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연이 언니에게 맡긴 일은 침구 파트였다.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 솜씨가 야물다고 칭찬을 듣더니 역시나 적임자였다. 혼수 이불을 맡기러 오는 손님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언니의 일처리에 만족해하는 시어머님을 보며 하연은 기뻤다.


이불가게라는 특성상 손님들이 거의 다 아줌마들이라 늘 질펀한 수다판으로 시끄러웠다. 이불 속 야담을 거칠 게 없이 쏟아내기도 했다. 서로 내기라도 하듯 저마다 수선을 피웠다. 듣는 쪽이 부끄럽고 민망해서 귀를 닫고 싶었다. 청상의 슬픔을 겪은 시연이 알 수 없는 질척한 그 무수한 말, 말들.


사실 처음에 시연은 화려하고 고운 신방 이불을 꿰매며 자주 흔들렸다. 이불속에서 벌어졌던 남편과의 은밀한 밤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편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립고 보고 싶었다. 오래 잠재웠던 본능에 휘둘려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구에게 그런 마음을 들킬까 봐 허둥대다가 여러 번 바늘에 찔리기도 했다. 이제는 바쁜 일속에 파묻혀 그런 감정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시장 바닥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심으로 열심히 일만 했다. 오직 아이들만 생각하며 세월이 가는 것도 잊고 살았다. 바깥 세상 일은 귀동냥으로만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갔다.


“엄마 많이 힘드시죠. 우리가 얼른 커서 엄마 고생 안 하게 해 드릴께요.”


늦은 시간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이렇게 따듯하게 말해주는 아이들의 위로가 힘이 되었다.


“아니야. 너희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내가 더 고맙지.”


사실이었다. 아무 것도 더 바랄 게 없었다. 시연에게 재혼의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다 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말썽 없이 자라주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시연의 착실함을 보고 사돈 어른이 추천해 주는 자리는 정말 아깝기도 했다.


“언니, 요즘 누가 자식들만 믿고 살아? 그 애들도 이제 많이 컸으니 이해할 거야.”


애들 때문으로만 알고 동생이 설득하려 했지만 시연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동네 오빠가 남편이 되던 날의 뜨거웠던 밤의 황홀을. 그리고 주말 부부로서 짧은 만남의 시간이 안타깝던 때가 떠올랐다. 그 추억으로 만족했다.


준수가 대학생이 되던 날 시연은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듬직한 아들의 손을 잡으며 남편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울음이 솟구쳐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내가 더 좋은 대학을 못 가서 그러세요? 열심히 공부해서 직장은 최고로 좋은 곳을 잡을게요.”


준수는 엄마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런 준수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래 그래. 너는 꼭 그렇게 될 거야. 엄마가 믿을게.”


시연은 그렇게 얼버무려 마음을 달랬다.


대학을 졸업한 딸 미경이 오빠보다 먼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학교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괜찮은 녀석이었다. 세계를 품 안에 안고 살겠다는 꿈 많은 예비 사위. 시집을 보내더라도 곁에 가까이 두고 살고 싶었는데 이민을 가야 한다는 말로 시연의 맘을 아프게 만들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더니…….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의 꿈을 꺾을 수 없어 결국 보내야 했다. 나라 이름도 생소한 뉴질랜드였다.


시장 바닥에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시연의 시각도 넓어지고 생각도 좀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건 오직 남자를 바라보는 무관심 하나뿐일까?


“엄마, 오빠 마마보이 만들면 안 돼. 그럼 오빠 장가도 못 간다니까.”


미경이 자주 그런 말을 했었다.


“조용히 해라. 나 밖에서 인기 많은 남자야. 장가를 못 가다니.”


“어이구. 오직 칠칠치 못하면 엄마가 외국 여행가서까지 아침 잠을 깨울까? 오빠가 바보야? 엄마가 지나친 거야?”


시연이 정말 그랬다. 시차까지 맞춰서 전화를 거는 그를 친구들이 놀렸다. 크리스털 소품들을 주워 모으며 며느리 집 장식장에 넣어줄 거라고 자랑도 했다. 시연에게는 아들이 하늘이고 방패며 든든한 남편이었다.


“아들아. 너 좋다는 여자는 그리 없는 거냐?”


“왜요? 저 인기 많아요.”


“그런데 결혼은 언제 할 건데?”


“나 좋다는 여자 많아요. 그런데 엄마 같은 여자가 없어 문제지요.”


시연은 덜컥 겁이 났다. 그렇잖아도 자기가 아들 결혼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늘 불안불안했다. 홀시어머니 외아들이라는 최악의 조건 때문이었다. 얼마 안 있어 결국 아들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눈치만 살필 뿐 시연은 어떠한 조건도 내세우지 못하는 시어머니 처지가 되었다. 간절히 바라기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만 살아주길 속으로 애원했다. 준수 내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시연은 한없이 들뜬 기분으로 음식 장만을 했다.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이다 못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새 며느리에게 잘 보이려고 꼭 간추려 할 말만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 여행 잘 다녀왔어요. 그런데 여기 처가에서 밥 먹으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시연은 전화기를 든 채 넋이 나간 사람이 되어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신혼집도 아내 회사 가까운 처가 근처에 이미 마련했다고 들었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아들은 키워봤자 다른 여자의 것이 된다는 소리를 많이도 들어왔지만 정말 남의 말로만 알았다.


시연의 인생은 회한 그 자체였다. 살아갈 의욕도 재미도 없었다. 동생의 주선으로 여기저기 모임에도 나가 보았지만 역시 재미가 없었다. 노래방에도 가보고 등산도 따라가 보았지만 역시 신통치 않았다. 쌍쌍이 짝들이 있어 재미있어 하는데 혼자이니 외로웠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벌레를 본 것처럼 도망쳤다. 사람들이 그녀를 외계인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기러기 모임에 나갔을 때 조금 맘이 편했다. 혼자가 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 교감이 쉬었다.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말들하지만 뼛속 깊이 외로운 건 혼자가 되어봐야 안다는 사실이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일만 알고 살아온 시연이 뒤늦게 깨달았다.


이성에 대한 사랑. 단체모임 뒤에 맘에 드는 쌍쌍이 같이 차도 마시고 밥도 먹으러 간다는 걸 알았다. 몇 번 추파를 던져오는 남성을 의식하면서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 이런 게 연애감정인가보다라고 깨달았다. 철도 들기 전 소꿉동무와 결혼을 했으니 연애가 뭔 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뒤늦게 이성과 만나며 묘한 기분에 들뜬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모르게 두렵다. 


“엄마, 여기 좀 오세요. 거긴 춥지만 여기는 지금 여름이 한창이에요. 환상적인 날씨에요.”


딸 미경이 여러 번 보챘지만 너무 멀다는 이유로 거절하곤 했다. 그런데 이젠 좀 떠나보고 싶었다. 시연은 여행가방만 하나 달랑 들고 오클랜드에 내렸다.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새들의 지저귐이 합창처럼 들려왔다. 커튼을 젖히니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이 눈부셨다. 산사에 들어와 신선한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이랄까. 싱그러운 바람을 심호흡으로 들이마시며 ‘여기가 정말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연은 수십 년을 시장 바닥에서 탁한 공기만 마시며 살아왔다. 사람들 가까이에서 뭔가를 쪼아먹고 노는 경계심 없는 뉴질랜드 새들의 자유로움도 새로웠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평화스러움이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만나면 방긋 웃어주며 인사해 주는 친절함. 모두가 잘 아는 이웃 같았다. 조금만 살아보고 돌아가겠다던 시연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제 시간에 퇴근해 오는 사위를 맞이하는 것도 재미 중 하나였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같이 먹고 와인 잔을 기울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은 또 얼마나 멋진 일인지.


“엄마. 우리만 행복해서 미안해. 아직 안 늦었어요. 엄마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 좋을 텐데.”


아들은 그런 말을 안 해도 딸은 언제나 엄마 편이었다. 좋은 인연이 생기면 놓치지 말라고 안달이었다.


“왜, 엄마가 네들 짐이 될까 봐 겁나서?”


“진심이야. 내가 결혼해 보니까 이제 알겠어. 엄마 정말 너무 불쌍해서 그래. 제발 부탁이야.”


시연은 딸의 그런 말을 들으며 혼란스러웠다. 늙으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 게 뻔한 일. 그렇다고 이 나이에 재혼을 한다는 건 생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 좋은 말벗이나 해볼까?


남편 없이 살았어도 동생 덕에 바느질만 했으니 그리 거칠지는 않았다. 육십이 코 앞이라도 아직 고운 티가 남아있는 아줌마였다. 정성껏 차리고 나서면 귀티가 철철 흐른다나. 문제없다고 친구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기러기 모임에 나갔을 때 눈 여겨 보는 이가 꽤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연이 뉴질랜드에 눌러앉은 세월이 훌쩍 일 년이 지나갔다. 종교 모임을 통해 친구들이 생겨서 자주 외출도 했다. 지리에도 익숙해지니 가 볼 곳도 많이 생겼다. 아이들 신혼살이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독립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딸 내외의 반대를 과감히 물리쳤다. 아기를 낳으면 돌봐 주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는 조건을 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시연이 줄리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요즘 줄리의 태도가 눈에 띄게 이상해져 간다고 느꼈다. 잘 하지 않던 화장도 하고 눈썹까지 붙이며 외출도 자주 했다. 늘 주절대던 수다스러움은 어디로 보냈는지 영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바쁘다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같이 밥을 먹은 게 꽤 오래 되었다. 아무리 가족처럼 지내도 타인임이 틀림없다.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까지 들으려고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어느 날 갑자기 줄리가 방에서 여행 가방을 끌고 나왔다. 집에 일이 생겨 가게 되었다며 한 마디를 툭 건네곤 서둘러 떠나갔다. 노부모님이 전라도 어딘가에 생존해 계시다는 말을 떠올리며 궁금증을 달랬다. 그렇더라도 앞뒤 사정은 얘기하고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갑자기 혼자가 되니 너무 쓸쓸했다.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과 둘이 남았을 때 그도 결혼시키고 나면 혼자서 어찌 사나 걱정이었다. 아들 준수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 결혼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혼자가 되고 말았지만……. 그때의 뼈저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줄리의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가 줄리에게 기대고 산다는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났다. 그에게 너무 부담이 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밤이면 줄리보다 리처드 생각이 더 많이 났다. 그 부드러운 음성, 따뜻한 눈빛이 몹시 그리웠다. 그리고 보니 이번엔 만난 지가 제법 되는 것 같았다. 어디 먼 곳에 출장을 간다는 소리도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길한 생각이 들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엊그제 딸하고 통화를 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아주 밝아졌다고 좋아했다. 본인도 모르게 은연중 감정을 들켜버린 것이었다. 민망함을 감추고 며칠 후에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시연이 딸에게 친구가 생겼다고 말을 하리라 결심을 했다. ‘리처드가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큰 일을 한 것처럼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에게 얼른 알리고 싶은데 빨리 나타나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리처드에게 전화를 해볼까. 그러나 시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토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기다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리처드는 언제나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와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말이 부족한 그에게 전화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민망하기도 했다. 그냥 좀 더 기다리는 수밖에. 누군가에게 자기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스스로 얼굴이 빨개지는 60대 여인 시연이었다. 그래서 얼른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꿈에라도 리처드가 나와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시연의 마음을 샘부리듯 줄리가 먼저 돌아왔다. 2주만에 돌아온 그녀가 반갑고 고마웠다.


“어이구. 빨리 왔네. 그래 집에 무슨 일이야? 부모님들은 별일 없으시고.”


줄리가 무슨 말인가를 하긴 하는데 입속말로 혼자 지껄이는 것 같아 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별 일이 아닌 것에 우선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저 표정은 뭐지?’ 영주권 때문에 초조해 할 때의 난감한 표정은 이미 많이 봐서 잘 알고 있다. 기쁘면 소리 내어 크게 웃는 줄리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저 표정은 알 도리가 없이 참으로 묘했다.


시연은 갑자기 돌변한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느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가 되었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더라도 이유는 알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와인 병을 들고 나온 줄리가 시연을 불렀다.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잔을 손에 들려주며 시연을 의자에 앉혔다.


“앉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한마디 툭 던지는데 어떤 결의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그는 잔에 와인을 따랐다. 한 잔을 마시고나서 한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만 있더니 입을 열었다.


“아줌마. 나 결혼해요.”


“어머, 잘 됐네. 그럼 내가 축하주를 따라줘야지.”


시연이 그렇게 말하며 와인 병을 나꿔 채듯 빼앗아 그녀의 잔에 한 가득 따라주었다. 줄리는 술이 급했던 사람처럼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또 한 잔을 물 마시듯이 벌컥 마셨다.


“진심으로 축하해. 말해 봐. 신랑은 어떤 사람이야. 선보러 갔었구나. 그 좋은 일을 왜 이제 말 해.”


시연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어 숨도 안 쉬고 연거푸 물었다. 줄리가 와인 한 잔을 더 따라 입 안에 쏟아부었다. 빨갛게 취기가 오른 그녀의 볼에 갑자기 물기가 반짝였다. 시연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만에 줄리가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줌마,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줄리는 그 말만 던져 놓고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한참만에 줄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눈곱 만치도 없었는데…….” 하고 뜸을 들이더니 리처드를 유혹했다고 실토했다. 그와 같이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고. 곧 결혼을 한다고 고백했다. 시연이 일시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갑자기 까만 장막 속에 갇힌 것처럼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등 뒤에서 줄리가 큰 소리로 울며 무슨 말인가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아줌마는 계속 친구하세요. 제 사정 아시잖아요. 결혼해도 아줌마랑은 친구로 지낼 거라고 리처드도 말했어요. 제발 저 좀 봐주세요.” 


시연은 있는 힘껏 귀를 틀어막았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 딱 그대로였다.


시연이 딸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탔다. 사정을 모르는 딸은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나 밝던 며칠 전의 엄마 목소리는 어디 가고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가 뭘까. 급한 볼일이라니 제발 좋은 일이었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엄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 같지 않은 낯설게 무거운 표정도 영 마음에 걸렸다. 시연은 뉴질랜드 땅이 아주 작은 한 점으로 구름에 덮여 사라질 때까지 아래를 굽어보았다. 머리가 무겁고 정신이 아득했다. 문득 리처드 옆에 앉아 지금 여행을 가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아닌 유럽행 비행기. 그가 하도 많이 들려준 여행 이야기가 떠올라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시연은 깜짝 놀라 무섭게 도리질을 했다. 카레이서가 꿈이었던 그는 드라이브가 생활처럼 되어 있어 늘 길로 쏘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 여인과 결혼해서 수 년을 살았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장모와 같이 살면서 늘 함께 여행을 했다.


해마다 4주 휴가를 받아 일본이나 유럽 쪽으로 나가면 3000km 이상을 달리고 온다고 했다. 이루지 못한 레이서의 꿈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오면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연에게 비하면 그는 아주 가볍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었다고 들었다. 뉴질랜드가 행운의 나라라고 좋아했다. 연로해진 장모가 어느 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참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일본으로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결국 이혼이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모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녀들도 없으니 거칠 것 없는 그는 지금도 드라이브가 좋아서 자주 여행을 한다고 했다. 시연이 따라주었다면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 했을 것이었다. 지금 와서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줄리가 어떻게 리처드를 유혹했을까. 한 대 맞은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머리가 이제서야 돌아가는지 궁금한 게 많아졌다. 줄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리처드를 불러내서 몸으로 구애를 했을 것이 뻔했다. 젊은 여인의 적극적인 구애를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두 사람이 뒤엉킨 뜨거운 정사 장면이 눈 앞에 그려져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줄리의 몸을 애무하며 시연을 계속 친구하겠다고 말했다는 게 사실일까.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문화 충격을 떠나서 마지막 그 남자의 양심을 믿고 싶었다. 잠시라도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 리처드를 지나치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시연 스스로가 더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줄리보다 리처드가 더 미운 건 사실이었다. 아니 리처드보다 자기 스스로가 더 싫었다. 그들을 믿었던 한없이 어리석은 여인이…….


눈을 꼭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기내의 안내방송 소리가 웅웅 들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문득 옆을 보니 젊은 군인이 신문을 손에 든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에 아들 준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급하게 아들이 보고 싶었다.


엄마의 진심을 몰라 안타깝게 돌아서던 공항에서의 딸 모습도 눈앞에 그려졌다. 마음이 아팠다. 서서히 깨어나는 이성의 파란 신호였음이 분명했다. 줄리가 자기에게 그리도 큰 잘못을 한 게 맞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시연이 조금 먼저 알았다는 사실뿐. 만나서 말벗하고 친구한 게 전부인데. 그것뿐이었는데. 실없는 웃음이 입가로 번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줄리, 제발 잘 살아야 한다. 이 드넓은 하늘만큼 행복하게 말이야.’


줄리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녀가 지금의 자기 마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연은 안타까웠다. 창 밖으로 펼쳐진 하얀 솜구름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짓눌렸던 가슴이 조금씩 시원해지고 있어 살 것 같았다.


‘준수 아빠. 나 정말 잘 했지! 내게 남자는 당신뿐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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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전화상담을 하거나 대면상담을 할 때 부모님들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저희 아이는 성격이 차분해서 의대에 진학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는… 더보기

시간이 접힌 선상에서

댓글 0 | 조회 206 | 2025.03.11
여정이 길게 늘어선 선착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 시간이 근 30분을 넘었을 때,하얗게 햇살 머금은 큰 여객선이 기적을 울리며 웰링톤 인터아일랜드 선착장으로 다가들… 더보기

이 기(氣)가 막힐 현실을 어찌하오리까?

댓글 0 | 조회 360 | 2025.03.11
설날이 지난 어느 날 서울에 있는 딸하고 통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인사말로 시작했으나 작년에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던 한 강 작가가 생각나서 비꼬듯 한… 더보기

길 위에서 만난 마음

댓글 0 | 조회 99 | 2025.03.11
김천 직지사-명적암-중암3월이 코앞이다. 봄이 오고 있다는데, 어디쯤 오고 있을까? 겨울이 길었던 탓인지 괜히 안달이 나서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직지사(直指寺)로… 더보기

달래 냉이 씀바귀...

댓글 0 | 조회 196 | 2025.03.11
춥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 김장이었다. 오래 두고 먹으려면 짜게 담가야 했다. 무는 뿌리를 씻어 통째로 동치미를 담그거나 네 가닥 정도로 쪼개어 김치를 담갔다… 더보기

새롭게 알아가는 가디언 비자

댓글 0 | 조회 517 | 2025.03.11
유학생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신청 가능한 비자가 따로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학 자녀를 돌보기 위해 어떻게든 체류하고자 학생비자를 신청해서 억지로 공부해야만 했… 더보기

자녀와의 갈등, 공감으로 풀어보세요!

댓글 0 | 조회 249 | 2025.03.11
“환경을 바꾸면 학교에 잘 다닐까 싶어 이곳에 왔는데, 학교에 가지 않고 방 안에만 있으니 답답합니다.” “오늘은 배가 아프다며 학교에 가기 힘들겠다고 하네요. … 더보기

자동차 유리(윈드스크린) 손상 시 대처법

댓글 0 | 조회 395 | 2025.03.11
교체 vs. 수리, 보험 적용 여부자동차 윈드스크린에 손상이 가면, 수리와 교체 중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고민될 수 있습니다.자동차 윈드스크린은 더블 글레이징(… 더보기

폭설

댓글 0 | 조회 185 | 2025.03.11
시인 장 석남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꺽이는 소리, 비명… 더보기

정신질환(Mental Disease)

댓글 0 | 조회 397 | 2025.03.07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질환을 하나는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신질환이 매우 흔하다. 성인 중 거의 절반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정신질환의 증상을 경험한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