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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집필된 만큼 이를 펴낸 출판사도 여럿입니다.
4부(12권)까지 삼성출판사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이어 88년 지식산업사에서 박경리문학전집으로 <토지>개정판을 냈습니다. 완간본(16권)은 93~94년 솔출판사에서 나왔으며 1998년 출판권을 반납함에 따라 구간도서로 존재하다 2002년 나남에서 총 21권으로 새롭게 펴냈습니다.
출생부터 시작된 선생의 고난은 <토지>집필 중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71년, 유방암 수술로 붕대를 가슴에 동여맨 채 병마와 싸우며 밤새워 원고를 메웠고, 70년대 말,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투옥되자 손자 원보까지 돌보며 글을 썼습니다. 80년엔 남편도 없이 시집살이를 하게 된 외동딸 김영주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원주 단구동으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28년을 원주에서 살았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토지> 4,5부를 탈고하였으며, <토지>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학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토지 집필실이었던 단구동의 집은 토지개발로 인해 후에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되었고, 선생은 원주 매지리에 새롭게 조성된 토지문학관에 칩거하면서 후배 소설가들을 위한 창작실 지원과 밭농사, 집필로 은둔생활을 합니다.
<토지>로 명예를 얻었으나 그 명예를 좇아 세상으로 나오는 대신 어려운 후배작가들의 글쓰기를 돕는 것으로 만년의 생을 보냅니다. 후배 작가들을 뒷바라지 하며‘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하고 손수 텃밭에서 일군 유기농 채소들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 두 가지씩 만들어 식당으로 내려 보내곤 했습니다.
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 객원교수로 출강하며, 95년에는 강의 노트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를 냅니다.
선생은 ‘인생이 행복하였으면 문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 문학적 요소는 인간에 대한 동경으로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코 문학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나는 인간으로서 행복을, 인간으로서 참됨을 갈망하여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니까 토지만큼이나 굴곡졌던 선생의 불행한 삶은 선생의 문학을 낳게 한 불씨인 셈입니다.
<토지>를 탈고 후, 9년 만인 2003년 선생은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쓸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창작의지를 불태우지만, <토지>후속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의 지식인 사회를 다루려던 <나비야 청산가자>는 건강악화로 3회로 아쉽게 막을 내립니다.
선생은 정치인보다 지식인을 더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물 밑 지식인들의 의식싸움과 그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회색 지식인이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다루려 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생명과 생존의 가치를 최고로 두었습니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다며,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라던 선생은 ‘글쓰기보다 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저 밥하고 풀 뽑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이 더 본질적이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생명사상으로 선생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환경운동가였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닭장과 거위장 문을 열고, 손수 기른 상추에 아침을 먹고, 텃밭을 일구고, 마당의 돌을 고르고, 뒷산에 올라 칡덩굴을 뽑으며 살았습니다.
토지문학관을 세우면서도 선생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늪지대에 도랑을 치고 수로를 만들어 밭으로 일구는 일이었습니다. 물길을 열어주고, 흙의 숨길을 열어주는 것이 선생의 생명사랑 삶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