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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요즘 파미의 하늘은 이렇듯 멋진 가을의 노래를 불러준다.
날씨와 상관없이 그동안 내 몸은 대상포진으로 미칠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면서, 진통제도 모자라서 신경안정제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지냈다. 아직 통증이 남아있지만, 목과 머리 두피에 올라온 발진들은 딱지가 붙어서 아물고 있다.
몸 상태가 좋아지니 가을 햇볕이 더욱 사랑스럽고 평온하게 다가온다.
대상포진을 앓으면서 몸 안의 독소가 몸 밖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다. 아직 내 왼쪽 날갯죽지로부터 목을 타고 정수리 부분까지 칼로 베는 것 같은 통증이 내 신경을 자극하지만, 약의 도움 없이 견딜만하다. 다 떠나버릴 것을 알기에 더 견딜만하다.
내가 침대에 자리 잡고 누워있는 동안에 내 책상 위의 호접란이 8개월 이상 피워냈던 꽃들을 다 떨어뜨렸다. 하지만 마지막 한 송이는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나 보다. 둘이 함께 박제가 되어 고고하게 서 있다.
호접란이 내 방에 온 이후로 24송이의 꽃들을 피웠으며, 그들이 지는 동안 생성해낸 27송이의 꽃 몽우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활짝 얼굴을 펼쳤다. 그렇게 나비처럼 앉아서 팔랑팔랑 날갯짓을 했었던 녀석들이 갑자기 앞을 다퉈가면서 고개를 숙이고 떨어져버린 것이다. 박제품 옆에 튼실한 꽃대가 쑥 올라와 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야 그 상황이 이해가 갔다.
호접란이 새로운 꽃대를 키운 것처럼 내 몸 역시 새로운 세포들을 생산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세포 역시 우주의 생성과 소멸처럼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지 않던가? 세포뿐만 아니라 내 뱃속의 미생물 역시 마찬가지리라.
대변이 단순히 음식물 찌꺼기만은 아니라고 한다. 미생물의 사체 역시 대변에 속해 있다고 하니, 내 뱃속의 좋은 미생물과 나쁜 미생물이 한바탕 난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 전쟁이 힘들어서 대상포진을 앓게 되었을지도.
연초부터 이렇게 지속적으로 몇 달간 심하게 아팠던 시기도 없었다. 병이 릴레이 경주를 하듯 바톤을 넘겼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몸살에 귀앓이에 지속적인 체기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오십견에.......
하지만 나는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내 몸이 하나 둘 바뀌어 가고 있는 중으로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유명하다는 대상포진도 나를 우울하게 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청소부가 되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한 15년 전 남섬 여행 중에 산 넘어 산만 있는 끝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산골짜기를 달리고 또 달렸던 기억이 난다. 집은커녕 차 한 대도 만날 수 없는 오지였다. 가족이 함께 차 안에 타고 있었지만, 끝이 어딘지 가늠이 가지 않는 길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산 넘어 산. 지나가고 또 지나가도 또 나오는 산. 가다가 그냥 그 안에 갇혀서 못 나갈 것만 같았던 길을 에너지가 가장 적게 드는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에서 멈춰버릴 것만 같았던 두려움. 다행히 끝까지 무사히 잘 도착했지만, 가는 내내 마음을 졸였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마을 초입의 주유소 앞에 닿아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생길도 이렇듯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이다. 그래서 인생지도를 꼼꼼히 살펴가면서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도록, 정비도 미리미리 잘 해두면서 살살 잘 끌고 가야 한다.
그런데 난 아파서 쓰러지기 전까지 호기를 부리면서 살았던 거 같다. 호기와 더불어 두려움도 주머니에 늘 넣어두고 다녔지만, 안전운전보다는 안일운전을 하면서 지냈던 거 같다. 그 결과를 지금 톡톡히 겪고 있지만, 새롭게 태어나는 몸을 조심스럽게 다뤄 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타고난 건강이 있기 나름이다. 그러나 좋은 습관은 그 나름대로의 건강을 잘 지켜나갈 수 있게 해준다. 뒤늦게라도 인생길의 안전운전을 지키게 되면 천수를 누리는데 도움이 된다.
요즘 나는 나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병원 문 출입이 잦다. 하지만 그에 대한 불만은 없다. 병원에서도 정기적으로 나를 찾는 반면 내가 먼저 병원을 찾기도 한다. 이 또한 안전운전의 한 방편이다.
오늘은 가슴에 장착한 페이스메이커 점검하는 날. 아침부터 서둘러서 웰링턴 종합병원에 다녀왔는데, 단 10분의 검사를 위해 하루를 다 소진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갑갑했었던 마음에 콧바람을 넣었다.
푸른 산에 둘러싸인 파미를 떠나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점심을 먹었고, 백사장에서 뛰노는 강아지들과 한 마음이 되어 바다의 하늘을 가슴에 담고 온 것이다. 대상포진이 아직 완전히 치유가 되지 않은 상태라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녹초가 되었지만, 좋은 결과를 얻은 하루라서 기분이 좋다.
지금 둘째 짝쿵의 아버지께서도 대상포진에 걸리셨다고 한다. 건장하고 젊게 보이는 분인데도 병마의 침범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에너지의 전이는 코비드19와 달리 거리에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다면서, 양쪽 모두 다 빨리 쾌차하길 바라는 큰애의 덕담에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렸다.
쭉정이가 다 된 호접난 꽃대와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들은 속으로 곯았을 것도 같다. 그렇게 곯은 몸으로 시든 얼굴을 매달고 남은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억울하고도 슬프다.
새로 올라오는 꽃대를 자식이 아닌 나 자신으로 바꿔서 본다. 새롭게 태어나는 나 자신. 제 2의 인생. 바라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귀하다. 쑥쑥 자라서 꽃망울을 열고 나비춤을 훨훨 추는 내 모습.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내 남은 인생길. 좋은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살아가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내 인생의 운전 수칙을 잘 지켜나가며 안전운전 마일리지를 차근차근 적립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