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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언제 나무라고 불러 달라고 했나!
산이 언제 우리더러 산이라 부르라 했는가!
바다가 언제 바다라 불러달라 부탁한 적 있는가!
바람이 언제 바람이라 불리길 원한 적이 있나?
인간은 만나는 대상마다 이름을 만들어낸다
공장제품에 라벨 붙이듯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실제 모습은 사라진다
활발발하고 약동하는 그들의 생명은 갇혀버린다
소돔과 고모라의 소금기둥처럼...
사망선고다!!
이름을 붙이면서 산과 바다는 도구가 되고 화석화되고
개념화 되고
갈수록 그들은 빛을 잃고 초라해진다
사람들은 친근감도 존중도 없다, 다만 부르기만 할뿐..
사실 별 관심도 없다 그 의미조차도..
인간은 무지하다
무지한 채로 시도 쓰고 소설도 쓴다
자연을 예찬하고 논쟁도 하고 ..
넌센스다, 옛날 프로레슬링같다
아! 인간들 ... 어찌할꼬!
말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고.
사람끼리 관계도 별반 다를바 없어 보인다
몇년을 보고 지내도 아는 것은 고작 서로의 이름..
그리고 이름으로 포장된 배경들
보이지 않는 벽들이 그 속에 숨어있다
마침 우리집 게라지에 쓸만한 망치가 하나 있다..
부탁하시면 빌려드릴수도...
‘산’이라는 말로 산의 실제모습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 산이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라서 겨울에 잠을 자고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물을 내보내는 생명이다.
그 생명성을 산이라는 고유명사가 대신하고 그것이 생성하는 역동성을 말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린다. 다만 고유명사는 지시체로써 그 기능을 수행한다.
모든언어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사물의 이름은 언어로 만들어진다. 언어명제는 참이라 보기 힘들고 이런 관점에서 그것은 대상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이 없다.
인간의 대부분의 사유와 인식은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렇게 나타나는 의미는 언제나 2차적이다.
문학에서 문장을 표현할 때 ‘내마음은 호수다’ 처럼 은유와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니체는 은유를 혁명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말하는 자체가 은유다” 지시하는 인간의 모든 언어의 사용자체를 은유라 말한다. 즉 모든 개념어 사용을 은유와 비유라 말한다.
인간은 은유로 밖에는 사물을 볼 수 없고 보이는 모든 것이 은유라 주장한다. 여기서 혁명이 일어난다. 그것이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다시말해 일차적으로는 언어의 해체라 볼수있다.
이런 입장에서 누가 감히 직접 진리를 / 진실을 자신있게 말할수 있겠는가? 우리의 인식자체가 은유고 비유이며 2차적인 재해석의 결과물이란 것이다.
그 언어는 내가 말하기 전에 밖의 사물에 형성되어 있고, 내 안에서는 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시대적으로 환경적으로 학습되고 습득된 개념들이 밖으로 선택되어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사실 무엇에 대해 내가 직접 말을 한다기 보다는 말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수용한다면 보다 더 겸손해지고 사물에 대한 통찰도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일상은 말로 되어있음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을 경험한다.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무엇을 언어의 구조속에서 체계화시켜서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왜곡과 삭제, 억압, 흔적과 모호한 환상을 우리들에게 고발하고 있다.
우리 세계는 말할수 있는 것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세계의 사물들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고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과 만날 때 우리는 그것을 신비라 부른다. “신비를 만났을 때 우리는 침묵해야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속삭인다.....
독자들께 작은 망치를 드리려 글을 올렸는데 오히려 벽이 더 두터워진 것 같아서 ....
그러나 인식의 벽을 깨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