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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딸 넷에 밑으로 아들 둘을 보셨다. 그 중 셋째인 나와 넷째인 내 동생이 집에서 존재감이 제일 적은 자식들이었다.
7남매의 장남이신 아버지께서는 홀로 되신 할머니와 동생들까지 거둬서 함께 살고 있었기에, 우리 집은 늘 북적거렸다. 결혼을 한 동생들도 모두들 가까이 살았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어디 그 뿐이었는가? 김일 선수가 나오는 레슬링이나 특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방송할 때마다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로 꽉 차곤 했었다.
내성적이면서도 조용한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명절이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럴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작은 엄마들이 음식 장만에 분주한 동안 방 한 칸에 어린 사촌 동생들을 모아 놓고 돌보는 일은 당연 내 동생과 내 차지였다. 나와 달리 동생은 아이들 돌보는 것을 아주 즐겨했다. 이야기책도 재미있게 읽어 주었고,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네 자매들 중 별명이 가장 많은 내 동생이었다. 짓궂은 큰고모부와 작은 아버지들이 지어 놓은 별명들인데, 못난이, 칠칠이, 천방지축.......등의 별명을 지어서 놀려 대곤 했었다. 나 같았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런 내 동생한테 “불알이나 하나 차고 나오지, 쯧쯧.......” 하시면서 안타까워했었다. 그러다가 남동생을 보았으니, 할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컸겠는가? 덜렁거리는 성격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할 때마다 “내가 남동생을 봤는데!”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두 말하면 잔소리이다.
활달한데다 성대모사를 매우 잘하여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반면에 겁이 아주 많아서 놀려먹기도 재미있었다. 귀신 이야기에 새파랗게 질리고, 화장실에 혼자 가지 못해서 쩔쩔 매고, 겁을 주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서의 제일 큰 놀림감은 당연히 내 동생의 몫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나중에 얘가 제일 잘 살 테니 두고 봐라.”라면서 다독거려주셨다. 할머니의 이 말씀을 그냥 넘길 내 동생이 아니다.
할머니의 예언은 내 동생의 내면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녀를 복 많은 여인으로 성장하게 해주었다. 대단한 할머니에 그 손녀인 것 같다.
내 동생과 나는 참 많이도 싸우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내 동생 키가 쑥쑥 자라더니, 덩치가 나보다 더 커져버렸다. 외모적으로 내가 더 나약하고 작으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동생이 언니인줄로 착각들을 했다.
자신이 언니라는 소리를 들으니,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이겨먹으려 했다. 대가족의 집안에서 서열 교육이 확실하게 잡힌 나로서는 여간 짜증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다 나와 항상 다른 의견으로 박박 우겨댄다.
내 고집도 대단한 터라 둘만 있을 땐 무던히도 싸워 제켰다, 싸운 만큼 정이 들었는지, 네 자매들 중에서도 유난히 사이가 좋다. 파미에서도 우리 자매 사이는 남들이 다 부러워할 정도였다.
제부가 4남매 중 막내이다. 그러니 내 동생은 막내며느리이다. 하지만 맏며느리 노릇을 하면서 지냈다. 시부모님께서 내 동생을 가장 편하게 여기셨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서로서로 잘도 도와주면서 지냈다.
아들 학교 자모회에서 회장으로 선출이 되었으니 오죽 바빴으랴. 그림 그리랴 도자기 구우러 다니랴, 오지랖도 넓었다. 시부모님이 옆에서 아이들을 잘 챙겨 주셨으니, 어려움 없이 잘해나갔을 것이다. 이래저래 복이 넘쳐나는 여인인데, 선한 성품이 한몫했을 것이다.
내가 뉴질랜드로 온다고 말하자마자, 내 동생은 곧바로 뉴질랜드 행을 결정했다. 정작 뉴질랜드에는 나보다 일주일 먼저 도착하여, 오클랜드에 정착을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 동생네서 일주일 정도 지내면서 파미로 오는 준비를 했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남동생의 도움으로 중고 가전제품들을 사고,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에 파미로 도착했다. 어둠 속에 비친 뿌연 새벽 공기를 뚫고 다가온 친구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렇게 내 동생과 나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1년이란 생활을 했었다. 오클랜드와 파미. 대도시와 소도시의 삶은 같은 뉴질랜드라도 많은 점들이 달랐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기엔 파미가 더 좋겠다는 생각으로 동생은 파미로 이전을 했다.
아이들한테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지만, 오클랜드의 물을 먹은 내 동생에게 파미라는 곳은 유배지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파미 생활에 적응하여 아주 편안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파미 사람이 다 되었는데, 그렇다고 적응기간인 3년을 우울하게만 지냈던 것은 아니다. 천성이 어디 가겠는가?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영주권도 얻고 수확이 컸다. 항상 둥글둥글 술렁술렁 일이 잘 풀려나가는 편이었다.
내 동생이 왜 이렇게 복이 많은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타고난 팔자에 그녀의 편안한 성격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누구든 그녀를 만나면 다들 편안해 한다. 그 편안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예전에 그녀가 나한테 한 말이 있다. “언니, 내가 좀 모자라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거야. 너무 잘났어봐.” 그녀다운 말이다. 어려서부터 들어왔었던 별명들은 모두다 ‘너 모자라다’는 뜻의 별명이었으니.
자신의 모자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현명한 일이던가? 모자라지 않고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면서 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내 동생한테 항상 잘난 척을 하면서 살고 있다만, 동생이 가끔 이런 명언을 말할 때마다 내가 한 방 맞은 느낌이 든다.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더 비워가는 동생이니 그 누가 그녀를 싫어하겠는가?
남에게 퍼 나르기 좋아하고, 자신의 일은 뒷전으로 하고, 시집이건 친정이건 궂은일은 도맡아서 했다. 한국에 있는 내내 양가 부모님 봉양을 자신의 일로 여기면서 지냈다. 얼마 전 치매 확진을 받아 요양원에 들어가신 아버지의 가장 든든한 딸이기도 했다.
모자람을 인정하는 내 동생이 내년 초에 뉴질랜드로 돌아온다. 한국에 계시는 양가 부모님들의 뒷바라지를 마무리 짓고 아들이 있는 뉴질랜드로 발길을 돌린다. 뉴질랜드에서의 새로운 삶은 제부의 소원이기도 하다.
아내와 아들들을 뉴질랜드로 보내고 10년 동안 기러기 아빠로 지냈던 제부와 또 다시 잠시 동안 떨어져서 지내야 하지만, 그들의 앞날엔 희망이 가득하다. 서로 모자란 것을 채워주면서 아름다운 삶을 엮어 나갈 것으로 기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