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풍경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최성길
Danielle Park
김도형
Timothy Cho
강승민
크리스틴 강
들 풀
김수동
멜리사 리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정동희
EduExperts

오래된 풍경

0 개 1,123 수필기행

‘풍경은 자기 안의 상처를 경유하면서 해석된다.’고 하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떠올리는 것들은 대개 자기 안의 익숙한 어떤 것들이다. 자라면서 독특하게 기호화된 정서들은 어떤 풍경과 접촉하면서 순간적으로 발화한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수록 흡인력은 강하고, 그렇게 재생되면서 추억은 굳건하게 내장되어가는 것일 게다.


갈매기다방


서해안의 작은 포구 한진에 가면 ‘갈매기다방’ 이란 곳이 있다. 낡은 살림집의 내부를 개조해 만든 1970년대 식 다방이다. 시멘트 날바닥에 놓인 다섯 개의 탁자와 분홍 비닐 커버를 씌운 의자, 장식이라곤 없는 휑한 벽 그리고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한 여자가 다방을 지키고 있다.


“이 다방 생긴 지 삼십 년 됐대요.” 여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며 석유스토브에 불을 붙인다. 긴 파마머리에 짧은 가죽반바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 평범하지 않은 화장. <삼포가는 길>에 나오는 국밥집 여자 백화가 겹쳐진다. 오래된 단편소설에나 나올 법한 다방까지 흘러들어온 그녀의 순탄치 않았을 삶을 헤아린다. 텔레비전에선 신파 드라마가 재방송 중이고, 차 주문을 받는 여자의 말투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허물이 없다. 다방이 아니라 이웃집에 마실 온 느낌이다. 


하얀 사기잔에 내온 쌍화차가 꿀물처럼 달달하다. 손님이래야 뱃일을 마친 어부들이 십중팔구일 거고, 걸쭉하게 계란을 띄운 쌍화차만큼 허기를 달래주는 차도 없을 것이다. 반쯤 마시다 내려놓는다. 곰팡내와 함께 올라오던 지하다방의 쓴 커피 냄새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던 젊은 날의 지문이다. 한 기억이 불러내는 애잔함은 낯선 포구의 옛날 식 다방을 순식간에 정감 넘치는 풍경으로 각색시킨다. 여자는 다시 텔레비전에 시선을 박은 채 혼자 히히거리고, 희부연 유리창 너머론 12월의 마른 눈이 흩날리고 있다.


순덕할머니의 가을


순덕할머니는 내가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알게 된 이웃이다. 영감님은 진작 돌아가시고 가교리 산자락 외딴집에서 홀로 산다. 하나 있는 딸자식도 제 앞가림하고 살기 바빠 얼굴 본 지 오래다. 흙집은 주인을 따라 얼기설기한 수숫대가 삐져나올 만큼 쇠락했다. 안방에선 오래된 괘종시계가 뎅그렁뎅그렁 느리게 열두 시를 치고, 봉당에서 바장대던 햇살은 할머니의 꼬부라진 등을 어루만진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건넛마을 사는 황가네 할머니뿐이다. 그나마 요즘은 관절통이 도져 마실 오는 횟수가 드문드문해졌다. 종일 말 한 자락 나눌 사람이 없으니 말 못하는 신세나 다를 바 없다. 벼농사는 접은 지 오래고, 텃밭을 가꾸는 일도 힘에 부쳐 올 농사가 마지막일 것 같다고 한숨을 쉰다. 수확이래야 마른 고추 열 근 남짓, 마늘 예닐곱 접이 전부다. 


그래도 면사무소에서 주는 정부미와 독거노인들에게 제공되는 반찬으로 이만큼 살 수 있다며 고마워한다. 할머니가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명절에 쓸 고추꼭지를 딴다. 눅눅해진 고추꼭지를 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힘대로 잡아 떼다보면 꼭지 끝에 살점이 많이 묻어나간다. 꼭지만 똑 떨어지게 떼려면 끝을 바짝 쥐고 살짝 비틀어 잡아당겨야 한다. 손끝에 기운이 없으니 고추 한 소쿠리를 다듬는 것도 한나절 일거리다. 


할머니는 혹시나 찾아올지 모를 자식을 위해 나박김치라도 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벌써 수년째 얼굴도 안 비치는 자식이 야속하지 않느냐는 내 말에, “못 오는 그 심정은 오죽헐텨…….” 그러면서 물끄러미 동구 밖 신작로를 내다본다. 어릿어릿 흐린 눈에 물기가 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거셨던 내 어머니의 마음이 저러했을 터다. 마당가 늙은 밤나무 쭈그렁밤송이 하나, 제풀에 툭 떨어진다.



웃음


한 장의 흑백사진에 시선이 박힌다. 사진작가 이형록의 <우리 집>이란 작품이다. 배경은 1950년대 면목동. 흙벽에 낸 바라지 창 사이로 한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동글넙데데하니 복스러운 얼굴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깨금발을 했을 아이의 무구한 눈빛이 사랑스럽다. 아마도 골목엔 동네 꼬맹이들의 지껄임이 왁자할 터다. 다부진 굴뚝이 수호신처럼 흙담집의 온기를 지킬 테고, 손끝 야문 아버지 그늘 아래 아이는 푸른 나무처럼 자라겠지. 


연기에 검게 그을리고 갈라진 흙벽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또 어찌 그리 자애로운가. 한참을 서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 나를 본다. 


비루한 삶의 풍경을 전복시키는 치유의 웃음, 살아 있는 벽화다. 새벽 군불을 때는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스미던 청솔연기에 잠 깨어 나른하게 뒤척이던 어린 시절, 그때 내 웃음도 저리 환했을까. 문득 잃어버린 나의 웃음과, 더 이상 ‘즐거운 우리 집’을 노래하지 않는 고독한 개인들을 떠올린다. 


1950년 남짓한 세월의 눈부신 변화는 우리 마음의 황폐를 대가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른다. 이 풍요한 물질문명의 시대에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가난은 잘 웃지 않는 얼굴로 드러난다. 아니, 웃음조차 상품화 되어버린 세상이다. 과연 웃음을 내어주고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더 이상 우리 집일 수 없는 이 시대 ‘우리’의 부재, 그것의 성찰에서 잃어버린 나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오래된 풍경 속에서 내가 만나는 것은 결국 나의 흔적들이다. 잊힌 채 잠들어 있던 내 안의 기억들이다.‘기억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낡은 풍경 속에서 풀려나온 기억의 한 끄트머리가 풍화된 추억을 재현해 낼 때 나는 오롯이 잃어버린 시간과 재회한다. 


회억의 정서란 다분히 낭만 일색이기 쉽지만 때론 외면하고 싶은 상처와의 화해의 대면이기도 하다. 굳이 기쁨이 아닌들 어떠랴. 나는 가끔 그 풍경들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


                                                                                                             - 출처 <수필과 비평>


■ 노 혜숙

≪수필과비평≫ 등단,  저서: ≪조르바의 춤≫.

잊혀져 버린 정의, 그들을 기억하며

댓글 0 | 조회 261 | 3일전
▲ 항일 투쟁과 반독재 투쟁으로 점철된 생애를 담은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의 작가 김학철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였던 고 김학철(1916~2001)의 인생을 다룬… 더보기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댓글 0 | 조회 153 | 3일전
언젠가 TV에선 얼굴 없는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더군요. 미국에 얼굴 없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데 아이입니다. 태어난 지 2년 반 쯤 되었는데 얼굴이 없답니다… 더보기

11월의 기도

댓글 0 | 조회 133 | 3일전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주님!올해 겪은 놀란 일을더 여유롭게 견뎌내지 못해부끄럽습니다당신 손 놓치지 않을나를 뽑아 견디게 하셨으니슬펐지만 아름다움이었습니다기차역에서… 더보기

대자유의 맛, 다선일미의 차 명상

댓글 0 | 조회 117 | 3일전
예로부터 스님들은 차를 마시며 수행을 했다. 차가 수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벽암록』의 저자인 송대 원오 극근(圓悟 克勤:1063~1135) 선사의 다선일미… 더보기

욕실 리노가 망설여지는 이유

댓글 0 | 조회 560 | 3일전
최근 몇 주 동안 잘못된 욕실 설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계신 고객분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욕실은 단순히 깨끗하고 예쁘게 마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안 보이는 곳… 더보기

사랑

댓글 0 | 조회 98 | 3일전
시인 정 호승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모든 애인들이 … 더보기

아오테아로아 (멀고 긴 흰구름의 나라)

댓글 0 | 조회 182 | 3일전
식물 줄기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삼각 돛,큰 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통나무 배,긴 나무를 균형지게 본체 좌 우측으로 동여맨 카누에 몸을 싣고,가족과 친지들을 뒤로… 더보기

전하지못한 이야기 ‘해금강’

댓글 0 | 조회 182 | 5일전
지인 j 님께!H 여사와 우리 셋이 모이면 노후의 삶을 어디에서 살면 좋겠냐는 말을 자주 했었지요.서울에서 나고자라 나이먹은 사람들끼리 시골살이를 동경하는 막연한… 더보기

지피지기 백전백승! 뉴질랜드/호주 의대 제대로 도전하기

댓글 0 | 조회 783 | 5일전
의대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심상치 않은 요즘, 뉴질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전문직에 대한 직업 안정성과 지속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의대 치대 약대 등의 … 더보기

고요할 수록 밝아지는 것들

댓글 0 | 조회 161 | 5일전
경남대학교에서 86년부터 18년까지, 33년을 일 하다가 은퇴한 지 6년이 되어간다. 어느 사이 고희(古稀)에 들었고 앞만 보고 가려하는데, 원고 청탁을 받아 잠… 더보기

35. 몸의 진액 부족이 가져다 준 소화 불량과 다양한 문제들

댓글 0 | 조회 454 | 5일전
몸의 모든 신진대사 활동은 물, 더 정확히 말하면 몸의 진액과 관계된다. 그래서 진액이 고갈되면 다양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기계의 그리스나 윤활류가 부… 더보기

(A2+) 프리미엄 우유가 온다

댓글 0 | 조회 1,305 | 8일전
완전식품(完全食品)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갖춘 식품을 말한다.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요리가 아닌 가공하지 않은 원료 상태로 섭취해도 사람에게 필요한 영… 더보기

한국의대 입시 어디로 갈 것인가? 파트 2

댓글 0 | 조회 324 | 10일전
11월 14일 2025학년도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수시전형은 11월 현재 진행중이며 내년 1월 정시전형을 앞두고 있다.2025학년도는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변화가 … 더보기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댓글 0 | 조회 344 | 2024.11.06
시인 헨리 나우헨그리우면 그립다고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불가능 속에서도한줄기 빛을 보기 위해애쓰는 사람이 좋고다른 사람을 위해호탕하게 웃어 줄 수 있는 사람이 … 더보기

작가 한강의 노고를 기리며

댓글 0 | 조회 367 | 2024.11.06
▲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훌륭한 번역을 통해 세계의 독자들이 비로소 한국문학이라는 두꺼운 책의 한 … 더보기

받아 적고 읽어 주고

댓글 0 | 조회 167 | 2024.11.06
나는 타자(打字)가 서툴고 느리다. 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타자하는 수고를 벗어나게 되었다. 말하면 그걸 글자로 바꾸어 주고(STT; Speech t… 더보기

달이와 함께 만난 동물 부처들

댓글 0 | 조회 143 | 2024.11.06
안동 봉정사 영산암 응진전 용과 사슴, 영덕 장육사 대웅전 사자와 코끼리사찰 곳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절을 아름답게 하고 이야기를 담는다.아이가 처음 세상을 배울 … 더보기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댓글 0 | 조회 425 | 2024.11.06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 중 “4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 대한 내용이 생각난다. 4촌이 논을 사면 기뻐할 일인데 왜 배가 아파야… 더보기

Panic Attack

댓글 0 | 조회 495 | 2024.11.05
공황발작은 갑작스럽고 강렬한 불안감이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입니다. 이 발작은 보통 예기치 않게 발생하며, 몇 분 안에 극심한 공포나 불안이 솟구치는 특징이 있습니… 더보기

New NCEA

댓글 0 | 조회 436 | 2024.11.05
대부분의 학부모님께서 이미 알고계시듯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사교육의 천국입니다. 대형입시학원은 말할것도 없고 입시학원 입학을 위한 또 다른 입시학원, 취업… 더보기

34. 소화기관의 병은 이런 순서로 치료해 보세요

댓글 0 | 조회 324 | 2024.11.05
몸의 각종 부위 중에 피부와 점막들은 손상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외부 세계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질을 자주 접하는 신체 기관들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손상… 더보기

아플수록 마음관리를 잘 해야

댓글 0 | 조회 237 | 2024.11.05
장영희 교수님을 아시나요? 제가 이 분 글을 인용하면서 참 좋아했는데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휠체어에 탄 모습으로 환하게 사진을 찍었더군요. 열두 번 예정된 항암… 더보기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댓글 0 | 조회 883 | 2024.11.02
한국인 232만명이 고혈압(高血壓), 당뇨병(糖尿病), 고지혈증(高脂血症)을 모두 앓고 있는 복합 만성질환자이다. 이 세 가지 질병은 동시다발적으로 생기며, 나이… 더보기

한국의대 입시 어디로 갈 것인가? 파트1

댓글 0 | 조회 494 | 2024.10.31
대한민국은 4대 개혁 의료개혁, 연금개혁, 노동개혁 그리고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그 중 의료개혁을 추진하며 2024년 2월 초 20여년동안 정원 변화 없이 한… 더보기

33. 음식, 식습관, 장건강, 심성 그리고 영성의 축

댓글 0 | 조회 410 | 2024.10.30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장건강을 지배하고, 장건강은 뇌에 바로 영향을 준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음식, 식습관, 장건강, 심성 그리고 영성이 하나의 축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