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풍경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성태용
명사칼럼
조기조
김성국
템플스테이
최성길
김도형
강승민
크리스틴 강
정동희
마이클 킴
에이다
골프&인생
이경자
Kevin Kim
정윤성
웬트워스
조성현
전정훈
Mystery
새움터
멜리사 리
휴람
김준
박기태
Timothy Cho
독자기고

오래된 풍경

0 개 1,317 수필기행

‘풍경은 자기 안의 상처를 경유하면서 해석된다.’고 하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떠올리는 것들은 대개 자기 안의 익숙한 어떤 것들이다. 자라면서 독특하게 기호화된 정서들은 어떤 풍경과 접촉하면서 순간적으로 발화한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수록 흡인력은 강하고, 그렇게 재생되면서 추억은 굳건하게 내장되어가는 것일 게다.


갈매기다방


서해안의 작은 포구 한진에 가면 ‘갈매기다방’ 이란 곳이 있다. 낡은 살림집의 내부를 개조해 만든 1970년대 식 다방이다. 시멘트 날바닥에 놓인 다섯 개의 탁자와 분홍 비닐 커버를 씌운 의자, 장식이라곤 없는 휑한 벽 그리고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한 여자가 다방을 지키고 있다.


“이 다방 생긴 지 삼십 년 됐대요.” 여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며 석유스토브에 불을 붙인다. 긴 파마머리에 짧은 가죽반바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 평범하지 않은 화장. <삼포가는 길>에 나오는 국밥집 여자 백화가 겹쳐진다. 오래된 단편소설에나 나올 법한 다방까지 흘러들어온 그녀의 순탄치 않았을 삶을 헤아린다. 텔레비전에선 신파 드라마가 재방송 중이고, 차 주문을 받는 여자의 말투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허물이 없다. 다방이 아니라 이웃집에 마실 온 느낌이다. 


하얀 사기잔에 내온 쌍화차가 꿀물처럼 달달하다. 손님이래야 뱃일을 마친 어부들이 십중팔구일 거고, 걸쭉하게 계란을 띄운 쌍화차만큼 허기를 달래주는 차도 없을 것이다. 반쯤 마시다 내려놓는다. 곰팡내와 함께 올라오던 지하다방의 쓴 커피 냄새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던 젊은 날의 지문이다. 한 기억이 불러내는 애잔함은 낯선 포구의 옛날 식 다방을 순식간에 정감 넘치는 풍경으로 각색시킨다. 여자는 다시 텔레비전에 시선을 박은 채 혼자 히히거리고, 희부연 유리창 너머론 12월의 마른 눈이 흩날리고 있다.


순덕할머니의 가을


순덕할머니는 내가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알게 된 이웃이다. 영감님은 진작 돌아가시고 가교리 산자락 외딴집에서 홀로 산다. 하나 있는 딸자식도 제 앞가림하고 살기 바빠 얼굴 본 지 오래다. 흙집은 주인을 따라 얼기설기한 수숫대가 삐져나올 만큼 쇠락했다. 안방에선 오래된 괘종시계가 뎅그렁뎅그렁 느리게 열두 시를 치고, 봉당에서 바장대던 햇살은 할머니의 꼬부라진 등을 어루만진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건넛마을 사는 황가네 할머니뿐이다. 그나마 요즘은 관절통이 도져 마실 오는 횟수가 드문드문해졌다. 종일 말 한 자락 나눌 사람이 없으니 말 못하는 신세나 다를 바 없다. 벼농사는 접은 지 오래고, 텃밭을 가꾸는 일도 힘에 부쳐 올 농사가 마지막일 것 같다고 한숨을 쉰다. 수확이래야 마른 고추 열 근 남짓, 마늘 예닐곱 접이 전부다. 


그래도 면사무소에서 주는 정부미와 독거노인들에게 제공되는 반찬으로 이만큼 살 수 있다며 고마워한다. 할머니가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명절에 쓸 고추꼭지를 딴다. 눅눅해진 고추꼭지를 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힘대로 잡아 떼다보면 꼭지 끝에 살점이 많이 묻어나간다. 꼭지만 똑 떨어지게 떼려면 끝을 바짝 쥐고 살짝 비틀어 잡아당겨야 한다. 손끝에 기운이 없으니 고추 한 소쿠리를 다듬는 것도 한나절 일거리다. 


할머니는 혹시나 찾아올지 모를 자식을 위해 나박김치라도 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벌써 수년째 얼굴도 안 비치는 자식이 야속하지 않느냐는 내 말에, “못 오는 그 심정은 오죽헐텨…….” 그러면서 물끄러미 동구 밖 신작로를 내다본다. 어릿어릿 흐린 눈에 물기가 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거셨던 내 어머니의 마음이 저러했을 터다. 마당가 늙은 밤나무 쭈그렁밤송이 하나, 제풀에 툭 떨어진다.



웃음


한 장의 흑백사진에 시선이 박힌다. 사진작가 이형록의 <우리 집>이란 작품이다. 배경은 1950년대 면목동. 흙벽에 낸 바라지 창 사이로 한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동글넙데데하니 복스러운 얼굴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깨금발을 했을 아이의 무구한 눈빛이 사랑스럽다. 아마도 골목엔 동네 꼬맹이들의 지껄임이 왁자할 터다. 다부진 굴뚝이 수호신처럼 흙담집의 온기를 지킬 테고, 손끝 야문 아버지 그늘 아래 아이는 푸른 나무처럼 자라겠지. 


연기에 검게 그을리고 갈라진 흙벽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또 어찌 그리 자애로운가. 한참을 서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 나를 본다. 


비루한 삶의 풍경을 전복시키는 치유의 웃음, 살아 있는 벽화다. 새벽 군불을 때는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스미던 청솔연기에 잠 깨어 나른하게 뒤척이던 어린 시절, 그때 내 웃음도 저리 환했을까. 문득 잃어버린 나의 웃음과, 더 이상 ‘즐거운 우리 집’을 노래하지 않는 고독한 개인들을 떠올린다. 


1950년 남짓한 세월의 눈부신 변화는 우리 마음의 황폐를 대가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른다. 이 풍요한 물질문명의 시대에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가난은 잘 웃지 않는 얼굴로 드러난다. 아니, 웃음조차 상품화 되어버린 세상이다. 과연 웃음을 내어주고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더 이상 우리 집일 수 없는 이 시대 ‘우리’의 부재, 그것의 성찰에서 잃어버린 나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오래된 풍경 속에서 내가 만나는 것은 결국 나의 흔적들이다. 잊힌 채 잠들어 있던 내 안의 기억들이다.‘기억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낡은 풍경 속에서 풀려나온 기억의 한 끄트머리가 풍화된 추억을 재현해 낼 때 나는 오롯이 잃어버린 시간과 재회한다. 


회억의 정서란 다분히 낭만 일색이기 쉽지만 때론 외면하고 싶은 상처와의 화해의 대면이기도 하다. 굳이 기쁨이 아닌들 어떠랴. 나는 가끔 그 풍경들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


                                                                                                             - 출처 <수필과 비평>


■ 노 혜숙

≪수필과비평≫ 등단,  저서: ≪조르바의 춤≫.

심전도(心電圖) 검사

댓글 0 | 조회 210 | 1일전
최근 어느 모임에서 만난 지인이 부정맥(不整脈)이 있어 심전도(心電圖) 검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심혈관 질환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고령자는 정… 더보기

가족 및 자원 봉사 간병인을 위한 정부 실행 계획

댓글 0 | 조회 569 | 9일전
Consultation on Action Plan to Support Carers 사회개발부(Ministry of Social Development, MSD)는 … 더보기

타마키 마카우라우 경찰 소수민족 서비스팀 수상 안전 실시

댓글 0 | 조회 303 | 10일전
지난 11월 22일, 타마키 마카우라우 경찰 소수민족 서비스팀은 피하의 바넷 홀에서 소수민족 공동체 지도자들과 함께 수상 안전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 더보기

위험한 감정의 계절: 도박과 멘탈헬스 이야기

댓글 0 | 조회 192 | 2025.12.10
12월은 흔히 ‘축제의 달’로 불린다. 거리의 불빛은 화려하고, 사람들은 마치 잠시 현실을 잊은 듯 들뜬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나 그 화려한 분위기 뒤에는 또 다… 더보기

에델바이스(Edelweiss)의 추억

댓글 0 | 조회 204 | 2025.12.10
음악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감정 표현, 미적 즐거움, 소통, 그리고 심리적 및 신체적 치유 등 다양한 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집단 정체성 확립, 사회통합, … 더보기

18. 루아페후의 고독한 지혜

댓글 0 | 조회 144 | 2025.12.10
# 산 속의 침묵루아페후 산은 뉴질랜드 북섬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다. 높고 험하며 사계절 내내 눈이 덮인 이 산은 항상 침묵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모… 더보기

뉴질랜드 학생들이 국내 대학과 해외 대학 중 어느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비용 …

댓글 0 | 조회 532 | 2025.12.10
비용 효율성과 미래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비교 - 2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3. 영국 및 미국 대학 유학하버드 대학교미국과 영국은 뉴질랜드 유… 더보기

그 해 여름은

댓글 0 | 조회 142 | 2025.12.10
터키의 국기처럼 큰 별 하나를 옆에 둔 상현달이 초저녁 하늘에 떠 있고, 검푸른 하늘엔 뱃전에 부딪혀 흩어지는 하얀 포말처럼 은하수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 더보기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댓글 0 | 조회 137 | 2025.12.10
시인 오 규원1어둠이 내 코 앞, 내 귀 앞, 내 눈 앞에 있다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 더보기

아주 오래된 공동체

댓글 0 | 조회 177 | 2025.12.10
처서가 지나면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올해는 처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꺾이지 않고 도심과 해안을 중심으로 열대야 현상이 계속되었다. ‘습식 사우… 더보기

이삿짐을 싸며

댓글 0 | 조회 573 | 2025.12.09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하루에 조금씩만이삿짐을 꾸렸습니다그래야 헤어짐이늦게 올 것 같았습니다차곡차곡 넣고구석구석 채웠습니다그래야 천천히 올 것 같았습니다짐 드러낸 … 더보기

뉴질랜드 학생에게 독서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

댓글 0 | 조회 534 | 2025.12.09
우리는 뉴질랜드라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영어로 배우고 말하고 평가받지만, 단순한 영어 실력만으로는 뉴질랜드 교육에서 깊이 있는 성취를 보… 더보기

깔끔하게 요약해 본 파트너쉽 비자

댓글 0 | 조회 341 | 2025.12.09
뉴질랜드에서 배우자 또는 파트너로 체류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사실혼(파트너쉽)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신청할 수 있는 영주권 비자와 비영주권 비자가 … 더보기

2026 의대 진학을 위한 연말 전략: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댓글 0 | 조회 235 | 2025.12.09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안녕하세요? 뉴질랜드, 호주 의치약대 입시 및 고등학교 내신관리 전문 컨설턴트 크리스틴입니다. 2026년 뉴질랜드 및 호… 더보기

시큰둥 심드렁

댓글 0 | 조회 111 | 2025.12.09
어떤 사람이 SNS에 적은 글에 뜨끔한 적이 있었다. “눈팅만 말고 ‘좋아요’ 좀 누르면 안 되나요?” 마치 눈팅만 했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발이 저려서… 더보기

언론가처분, 신상 정보 공개 금지 및 국민들의 알 권리

댓글 0 | 조회 227 | 2025.12.09
지난 9월 8월, 본인의 자녀들을 수년간 납치해서 숨어 살았던 톰 필립스 (Tom Phillips)가 경찰에 발견되었고 결국 총격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 소식 … 더보기

고대 수메르 문명은 왜 사라졌는가

댓글 0 | 조회 149 | 2025.12.09
메소포타미아 사막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를 때면, 거친 바람은 먼지를 일으키며 과거의 귓속말을 실어 나른다. 그 속삭임은 무너진 벽돌과 부서진 신전 기둥 사이를 스… 더보기

스코어카드와 인생의 기록 –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

댓글 0 | 조회 116 | 2025.12.09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어카드를 손에 쥐고 라운드를 시작한다. 한 홀 한 홀마다 몇 타에 공을 넣었는지를 적어 내려가며, 18홀을 돌고 나면 총합이 자… 더보기

나도 의대 들어갈 수 있을까 : 의대 경쟁률 10:1 그 진실은?

댓글 0 | 조회 319 | 2025.12.07
출처: https://www.istockphoto.com/kr/%EC%9D%BC%EB%9F%AC%EC%8A%A4%ED%8A% B8/%EC%9D%98%EA%B3%B… 더보기

‘인공 방광’이란

댓글 0 | 조회 289 | 2025.12.06
국민보험공단이 발표한 ‘2024 지역별 의료 이용 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병원에서 진료받은 6대 주요 암 환자 중 유방암 환자가 인구 10만명당 52… 더보기

수공하는 법

댓글 0 | 조회 167 | 2025.12.06
수공(收功)은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동작으로서, 명상을 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형성된 기운을 거두어 단전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명상 중 급한 용무로 명상을 멈추어야 … 더보기

AI 시대의 독서: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독서가 필요한 이유

댓글 0 | 조회 624 | 2025.12.01
공자는 논어 첫 문장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했다. 배움 자체가 인생의 의미가 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더보기

AI 시대의 새로운 교육 방향: AI와 함께 생각하는 힘

댓글 0 | 조회 562 | 2025.11.28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의 등장은 그 속도와 영향력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전환점을 만들어 내고 있… 더보기

무료 유방암 검진 연령 확대

댓글 0 | 조회 334 | 2025.11.26
무료 유방암 검진 연령이 74세까지 전면 확대된다.

에이전시 (대리인) 관련 법

댓글 0 | 조회 230 | 2025.11.26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대신’ 해주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랍니다. 친구가 멀리 던진 공으로부터 내가 더 가까우면 친구 대신 공을 주워서 던져주기도 하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