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의 한계가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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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력의 한계가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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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3일 평양 외곽 백화원초대소에 있었습니다.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에 온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에 묵고 있었지요. 나는 평양 방문 첫째 날은 수행원 숙소인 보통강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대통령 연설문을 위해 백화원초대소에 갔습니다.


정상회담을 마친 대통령의 귀경길, 도라산역에서 그 결과를 보고하는 연설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청화대에서 대통령 연설문을 쓴 지 8년째였지만, 이때 가장 긴장했지요. 포털사이트에 있는 온라인 국어사전을 그 곳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가장 먼저 온라인 국어사전을 엽니다. 내 머릿속에 생각난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떠오르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쳐보고 유의어 중에 더 맞는 단어를 찾아 씁니다. 조지 오웰이 그랬다지요. 딱 맞는 단어와 적당히 맞는 단어는 번갯불과 반딧불 차이라고요. 딱 맞는 단어를 찾았을 때 짜릿한 기쁨을 맛봅니다. 그 순간 내 글이 좋아지고 나의 어휘력이 향상되지요.


평양에서 쓸 단어의 유의어를 미리 찾아 들고 갔습니다. 예를 들어 ‘말했다’와 비슷한 말 ‘밝혔다’ ‘언급했다’ ‘설명했다’ ‘강조했다’ ‘토로했다’ ‘운을 뗐다’ ‘반박했다’ ‘공감했다’ 등등. 저녁 식사 시간 무렵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해서 정상회담 결과를 듣고 연설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까지 대통령께 연설문을 전해드려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낱말과 저 낱말 사이에서 방황할 시간이 없었지요. 서울에서 들고 간 유의어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습니다. 유의어 덕분에 무사히 연설문 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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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휘력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사고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휘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어휘력이 좋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단어의 뜻을 아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워낙 읽기를 많이 해서 단어 뜻은 잘 이해해요. 어휘력은 또한 유의어를 많이 떠올리고, 맞는 단어를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떠올리지 못하면 찾아내지도 못하죠. 일차적으로 떠올려야 하고 떠올린 단어 중에 맞는 단어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여러 단어를 떠올릴수록 좋겠지요. 이런 어휘력을 기르는 데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이 바로 국어사전을 열어놓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어휘력은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의 개념을 많이 아는 것도 포함합니다. 사자성어나 신조어, 전문용어도요. 그래서 나는 국어사전과 함께 포털사이트에 있는 백과사전도 함께 열어놓고 글을 씁니다. 백과사전은 중학생, 고등학생을 위한 백과사전부터 철학사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나는 주로 중고등학생을 위한 사전을 보고, 때로는 초등학생을 위한 백과사전도 봅니다. 말이건 글이건 쉽게 설명할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왜 어휘력을 키워야 할까요. 공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정 수준의 어휘력을 갖추지 못하면 선생님 말씀이나 책에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단어를 모르면 영어 공부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올라갈수록 공부가 어려워집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요구하는 어휘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한 몫을 합니다.


공부할 때 접하는 어휘 수준은 높아지는데 자신의 어휘력은 제자리 걸음하고 있으면 공부가 어려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도 어휘력이 필수적입니다. 영어를 우리말로 이해하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하지요. 첫 단계는 영어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알아낸 영어 뜻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단계입니다. 영어 단어를 많이 알면 해석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말 어휘력이 약하면 번역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민 2세대나 3세대가 우리말을 더듬거리는 것처럼 말이죠. 모든 과목이 마찬가지입니다. 시험 볼 때 지문을 얼마나 빨리 읽어낼 수 있는가, 문제를 읽고 출제자 의도를 누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어휘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글을 쓰고 말을 잘하려면 어휘력이 필요합니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어휘로 하는 것이니까요. 부족한 벽돌로는 멋진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 말하기나 글쓰기는 어휘를 계속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어휘가 빨리, 다채롭게 떠오르면 글을 풍성하게 빨리 쓸 수 있고, 말도 유창하게 할 수 있지요. 딱 맞는 단어를 고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정확하고 명료한 말하기와 글쓰기가 가능해집니다.



어휘력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사고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휘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니까요. 담을 그릇이 없는데 무슨 내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식인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걸 표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고 했고, 조지 오웰 역시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표현할 단어를 못 찾으면 나중에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어휘로 표현할 수 있는 것까지가 아는 것이지요. 표현하지 못하면 모른 것이고요. 그러니 어휘력이 빈약하면 사고력이 빈곤해질 수밖에 없지요.


우리 자녀 세대가 모든 면에서 훌륭합니다. 단 어휘력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릴 적부터 영상이나 만화 등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어와 어휘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세대처럼 한자를 가깝게 하지 않는 것도 어휘력이 약해지는 요인입니다. 우리가 쓰는 단어 가운데 70% 이상이 한자어이니까요. 또한 글을 접하는 통로가 과거에는 책이었으나 갈수록 그 비중은 줄어들고 휴대전화나 노트북 화면을 통해 글과 마주합니다. 글을 한자 한자 읽는 게 아니라 덩어리로 훑어 내려갑니다. 아들과 글을 읽으면 스크롤이 어찌나 빨리 내려가는지 도저히 따라가질 못합니다. 읽는 게 아니라 본다고 해야 할까요? 뜻을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문맥으로 때려잡으며 넘어갑니다. 결과적으로 어휘력이 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적 왕자 크레파스라는 게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은 12색 크레파스를, 부잣집 아이는 54색 크레파스를 들고 다녔지요. 그림 실력이 있어도 12가지 색깔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휘력은 몇가지 색깔 크레파스인가요. 어휘력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습니다.


* 출처 : 한겨레 신문


■ 강 원국 칼럼 ‘공부하면 뭐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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