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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게!
기래끽반곤래면 (飢來喫飯困來眠)
조선 중기의 선사 指月(지월)은 선풍(仙風)을 밋밋하고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그리면서 그의 담시 마지막 구절에 이문장을 얹어놓았다.
어느 수좌가 선사에게 묻는다.
수좌: 저희들이 어떤도리로 정진해야 할지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선사: 나는 도리는 잘 모르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기래끽반 곤래면)
수좌: 저도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잡니다.
뭐 그리 시시한 말씀을 하십니까?
선사: 나는 밥먹을때 밥만먹고 잠오면 잠만잔다.
수좌: (답답한 표정)
왜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십니까?
선사: 이놈아!
너는 밥먹을때도 생각에 빠져서 먹고 꿈속에서도 온갖 일을 벌리지 않느냐!
나는 밥먹을땐 밥만먹고 잘때는 잠만 잔다.
수좌: 엎드려 절을 세번하고 물러간다.
선사나 수행자나 겉으로 보면 똑 같다.
소위 도통했거나 한 소식했다해도 별 차이가 있겠는가?
먹고 마시고 떠들고 일하고 싸고 그리고 잔다.
뭐 하나 다를바 없다.
다만 마음이 텅 비어있을뿐이다.
텅 비었다! 마음을 비우라!
이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마음은 비울수 있는 것인가?
비울수 있다면 먼저 마음이 뚜렷이 있다는 말이다.
또 비우고 나서도 마음은 깨끗하게 남아있다는 것인가?
과연 그러한가/ 확인할수 있는가?
확인한다 하더라도 각자의 관점이나 체험또는 종교적차이에 따라 평가는 천차만별일수 있다.
이 평가에 대해 일반적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말이 “몰라”! 이다.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고 둘다 아닌것도 아니고 숭산 선사는 ONLY DO NOT KNOW 오직 모를뿐!
그러나 그 알수없는 미지의 당처로 뛰어들기 위해 끝없는 정진을 하는 구도자들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의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장터 싸구려옷 처름 내뱉는 이들은 실제로 자신은 마음을 텅비운듯이 설법을 한다.
근기가 모자라서 단상아래에서 그 법문을 간절히 듣는 대중들은 마음을 텅비우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발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심과 발심이 구도의 동력이고 그 힘이 없다면 수행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설법자들은 자세히 안내하기 보다는 대중들은 시절인연이 오면 수승할수 있다는 희망고문으로 어수룩하고 모순된 상황을 모른채 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근기가 모자라니 물어보기도 어렵고 그저 내탓이라 여기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108배 절을 하거나 공덕을 쌓아가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사실 둘러보면 마음을 텅 비운다!
이 한마디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선지식이 드물다.
딱 떨어지는 답을 달라는 뜻도 아니다.
일상에서 예를 끄집어내던지 수행중 체험을 전하든지 아니면 경전속에서 각성한바를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전달하든지 아니면 실참의 수행방법을 통해서 자신만의 방편을 대중을 위해 한보따리 풀어 내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산문걸어 잠그고 일도 참선에 평생을 매진하던지!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자주 들리고 나자신도 내뱉는 한마디가 마음을 비워야지!
상식에 비추어보면 그뜻을 욕심을 버려라,
집착을 내려놔라, 결과를 붙잡으려 너무 힘주지마라,
주변도 돌아보면서 느긋하게 가라!
대개 이런 테두리 안에서 해석한다.
좀더 들어가보자!
우리 마음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 따라 한 생각 일어난다.
그 생각이 가만있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기대들과 맞물리고 엉뚱한 상상/ 희망 /집착/ 원망등 다양한 감정들과 연결되면서 갑자기 화가 나기도하고 원망스럽고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가족간 직장의 스트레스나 인간관계속에서 이그러진 잠재적 문제들이 튀어나오면서 고민과 번뇌에 빠지는경우도 다반사다.
시간이 지나서 해결되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출구를 찾는경우는 극히 드물며 찾는다는 보장도 없다.
지나고 보면 단지 고통에 시달렸을 뿐이다.
이런 불안속에 빠져있을때 몸도 굳어버린다
몸안의 흐름이 막히고 몸전체가 경직되기 쉽상이다.
나중에 이유없이 무겁거나 피곤하기만 하다.
고민만 했지 시간투자 대비해서 얻은것은 피곤과 스트레스등 감정적 소모 이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생각 일어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이 생각의 연속적 고리를 어떻게 다스릴것인가?
그러면 내가 해결해보겠다 마음먹고 명상이나 참선으로 들어갔을때 고요하게 자리만 지키고 시키는대로 하면 마음이 텅 비워지는가?
십중팔구 초심자들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수많은 망상들이 머리속으로 자꾸 밀려옴을 체험한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잡생각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무수히 지나간다.
최근의 일이나 기억도 있으나 ,10년전 심지어 어릴때 경험들이 무작위로 떠 올라서 이게 뭐지! 하고 당황스런경우도 많다.
마음을 텅 비운다는 일이 머나먼다리 처름 가물 가물해진다.
그러나 진흙속에 연꽃이 피듯이 이런 번뇌/망상이 내 모습이고 명상을 통해 처음으로 실제로 나는 이런 복잡하고 산만한 생각의 더미속에 둘러 싸여 그렇게 떠오른 그 망념중의 하나를 붙잡고 밤새도록 헤맬수도 있겠구나!
하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내 바깥에서 바라보는 경험속에서 확인 한다면 이것만해도 엄청난 수확이다.
내몸은 60조개 이상의 세포와 그 10배이상의 박테리아와 함께 살아가고 나의 피부세포는 매순간 죽고 새로 태어나고 내몸의 대부분세포들은 1년이 지나면 대부분 새롭게 바뀐다.
내 몸을 들여다볼수도 없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다만 몸에서 보내는 신호에 맟주어 상황에 따라 반응을 한다.
이것도 선험적으로 내가 있어서 알아차리기 보다는 몸의 후천적사건에 따라 내가 쫓아가는 모습이다.
생각도 내가 의도한대로 스스로 선택해서 행하기도 하지만 주로 과거의 습관 기억들이 감각을 통한 인지능력과 밀착하여 일을 만들고 나는 그 통합적 만남에 의해 함께 참여하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평소에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보지못하고 단지 반사적으로 행동하던지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텅 비운다는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실제 일상생활을 하고 일을 할때와 멈추고 명상이나 참선에 들어갔을때 또는 집에서 혼자 고민 번뇌에 사로잡힐때를 구분해서 별도로 체크해야 한다.
세상의 일들은 하나 에서 출발하여 둘로 가고 둘은 셋으로 셋은 만물을 만든다.
이 말은 노자 42장에서
도법일 일법이 이법삼 삼법만물! (道法一 一法二 二法三 三法萬物)
“일”(1)은 태극이다 . 음과양이 구분되기 이전이다.
“이”(2) 는 음/양 남/녀 해/달 등 음과양이다
“삼”(3)은 삼재다 . 천(하늘), 지(땅), 인(사람) 을 말한다.
그리고 2와 3을 결합한것이 오행(五行)이다.
오행에다 2를 더하면 7이된다.
결국 3,5,7 은 3이 근본이고 한가지로 본다.
그래서 만물은 3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들어와야 삼재가 완성되고 만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동양고전에서는 인간의 역할이나 작용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세상의 일은 이렇게 하나에서 점점 커져서 둘,셋 오행 만물로 자라나간다.
반면 우리의 마음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多( 많을다) - 5 -3 -2 - 1 -? (0)
多는 만물이다.
마음을 보려면 / 마음을 텅 비우려면 多에서 하나로 와야한다.
일상에서 갈갈이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수렴해가야만 마음과 만날수 있다.
이 과정을 설명한것이 명상이고 참선이다.
수렴을 쭉 해주는것이 수행이다.
세상이 펼쳐지는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라하고
마음으로 수렴해가는것을 性起 (성품성/ 일어날기) 라 한다.
연기는 밖으로 향해 가지만
성기는 내 안으로 향해야만 한다.
방향이 바르지 못하면 낭패를 본다.
마음을 비우는데 가장 큰 장애가 “2” 이다.
2 는 분별심이다.
너와내가 분별되고 여자/남자, 낮과밤, 선과악, 사랑과 미움, 길고 짧음 ,좋고 싫음
이러한 이분법에서 우리의 삶은 멈춰있다.
그럴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나쁘다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것의 출발이 이분법에서 벗어나는것이다.
이 벽을 넘지못하면 수행이나 마음비움은 먼 나라 이야기다.
명상이 깊어져서 하나에서 무심(無心) 의 자리까지 도달하는것은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훗날을 기약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과정과 당처를 주마간산으로 둘러 보았다.
“마음을 비운다” 한문장을 설명하기 위해 말을 풀어놓았지만 충분하지 않은듯 하다.
먼저 부족한 나의 실력을 탓 할수밖에 없고 더불어 언어의 한계도 절실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