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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숙자
방금 우체부가 다녀 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우편물에 우체부는 영문 모를 의아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로서 편지는 65통을 채웠다. 9월, 10월 두 달 사이에 날아든 독자들의 편지다. 연예인도 아니요 유명인사도 아닌 평범한 촌부요 수필가인 내게 이렇게 많은 편지가 오다니 우체부의 의아스러움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 9월호 S지에 실린 원고지 8매의 짧은 글이 몰고 온 거센 바람은 얼음 속에서 피어나는 갯벌의 수선화를 내 생활에 피워 주고 있다. 내가 살아 온 이 만큼의 여정에서 이처럼 훈훈하기도 처음이요 부끄럽기 또한 처음이다.
과실 치사죄로 4년을 복역하고 나온 젊은이가 세상의 냉대에 좌절하며 요즈음은 아이들 장난돌에 맞아 바르르 떨며 죽어가는 개구리를 보고도 마음 아파 울어 버린다는 안성의 S군, 나는 S군의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참회의 눈물로 씻긴 맑은 영혼임을 짚어 낸다.
여행길에서 글을 읽고 책장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흐느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K대학의 김군. 누구에게인지 꼭 한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쓰리라고 2년 동안을 수첩 속에 넣고 다니던 우표로 여관방에서 편지를 쓴다는 멀리 제주도의 고경화씨, 그는 40원짜리 우표 두 장을 한꺼번에 붙였다. 또한 35년 동안을 방에만 누워 고독과 싸운다는 경주의 김경화양. 아름다운 영혼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고자 한다는 푸른 군복의 이화식 소위님. 당신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신념에 찬 격려를 보내주신 반도호텔 조형건 대표님, 용기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고 책을 보내주신 설우사 전호윤 사장님.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편지들을 사과가 곱게 익는 가을 과수원에서 울며 웃으며 때로는 가슴 치며 읽었다. 들풀처럼 사는 내게 이렇듯 큰 은총이 넘치다니, 너무나 감사해서 울고 지면을 통해 뼈시리게 전달되는 그들의 고통, 외로움, 절망을 울었다.
요즘에는 멀리 태평양을 건너 날아오는 해외 동포들의 편지에 다시 한번 콧등 아리는 사랑을 느낀다. 깊어 가는 가을밤 잎 지는 창가에서 이슥토록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며 두 영혼이 마주하는 답장을 쓰노라면 비로소 나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나는 편지들을 통하여 놀라움이 컸다. 아침마다 신문 삼면을 장식하는 끔찍한 사건도 많지만 세상에는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또한 풍요의 물질 속에서 어찌하여 마음을 앓고 사는 이들이 이렇게 많을까 하는 의아심도 들었다. 현대처럼 시계 초침에 매달려 전화 한 통화면 용건이 해결되는 편안한 세상에 살면서 휴지처럼 흩어버릴 보잘 것 없는 글에 감동과 위로와 격려를 보내 주었다는 것을 새로운 발견이요, 신비한 개안 이었다.
사람들은 편지를 좋아 한다. 일년 내내 편지 한 장 쓰기를 힘겨워하는 사람도 자기 앞에 날아온 편지는 반가와 한다. 가장 싼값으로 가장 값진 마음을 전달하는 편지란 매체는 그래서 우리 서민의 발이요 눈이요 가슴인 것.
나는 더욱 편지를 좋아 한다. 내게로 오는 편지에는 소인이 없는 편지도 많다. 건들마가 서걱서걱 수수 이파리를 흔들고 지나가는 가을이 오는 계절의 편지도 있고, 노오란 해바라기를 보면 불행한 천재 빈센트 반 고호의‘슬픔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는 거야. 이제 죽고 싶다’고 한 마지막 말이 귓전으로 스며드는 색채의 편지가 있다.
엄정행씨, 그분의 맑고 깊은 노래속에 직통 전화로 걸려오는 내면의 떨림은 속진이 여과되는 정화수. 어찌 이뿐이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열연하는 루돌프 누에예보와 마코트폰데인, 두사람의 발레리나가 온몸으로 퍼내는 강렬한 사랑의 밀어는 황홀한 한 편의 생동하는 편지가 아닌가.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편지를 쓴다. 병상에 누운 친구에게,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운 사람들에게 커피 한잔의 시간을 내서 엽서를 띄운다. 그것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연탄을 사들이는 심정과 흡사 한 것. 내 곁에 방풍림을 심어두는 어한의 몸짓.
추위가 심할수록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고 들어 앉는다. 냉랭한 처마머리 어디 한군데 발 붙일 곳 없는 현대인의 냉기. 물리적인 추위는 문을 닫아야 보온이 되지만 끝없는 마음의 추위는 마음 문을 열어야 녹일 수 있는 것. 우리들의 삶에 있어 끝나지 않는 겨울 속에 있을 때 창문 하나만이라도 열어 보면 그대는 알리라.
작은 창문을 통하여 얼마나 따뜻한 인간애의 햇살이 비춰 오는지를, 그것은 한가닥 남은 희망이기도 하고 위안이기도 한 사랑의 메시지.
우리는 이렇게 추위를 녹여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6.25를 치른 겨울, 춥고 배고픈 교실에 다닥다닥 모여 앉아 우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손비빔을 했다. 손등끼리, 손바닥 끼리 그렇게 한참을 비비고 나면 몽당연필을 쥘 수 없이 곱았던 손에 온기가 살아 났다. 그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비빔이다. 미움과 사랑끼리, 있음과 없음끼리, 마음과 마음끼리 서로 대고 비벼가다 보면 거기 모처럼의 정(情) 이 생기고 애착이 생겨난다. 그러자면 빗장을 열고 마주 서야 한다.
올 가을 내내 내게 수없이 날아오는 독자들의 편지는 이제 문 여는 소리, 나는 반겨 듣고 달려나가 찬 손이나마 뜨겁게 마주 잡아야 한다. 내 무슨 비범한 재능이 있어 불후의 명작을 남기겠는가. 이렇듯 겨울을 사는 이웃들에게 한줄기 따스한 햇살로 부서져 내려 그들의 추위를 녹일 수 있다면 내 문예에의 보람은 성취되는 것. 그러고 보면 예술이란 인간에게 보내지는 가장 진실되고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가 아닐지...
편지는 가슴과 가슴을 잇는 사랑의 징검다리, 그리하여 나는 외로울 때는 음악을, 마음이 추워질 때는 편지를 쓰리라.
* 출처: 한국수필 8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