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 전환, 이번에도 물 건너 가나

공화국 전환, 이번에도 물 건너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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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서거 이후 기존 영국 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공화국으로의 전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국왕을 국가 수반으로 하고 있는 영국 연방 국가 가운데 하나인 뉴질랜드에서도 자연스레 공화제 전환 논의가 제기된다. 이전에도 뉴질랜드가 공화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 시기는 항상 먼 미래의 모호한 때로 생각돼 왔었다. 70년 만에 이뤄진 영국 왕권 교체가 공화국 전환에 기폭제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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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서거 후 흔들리는 영국 군주제


최근 공화제 전환 논쟁이 시작된 계기는 영국 연방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와 찰스 3세의 즉위였다.


지난달 8일 타계한 여왕은 당시 예년처럼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서거 이틀 전인 지난달 6일에는 리즈 트러스(Liz Truss) 신임 영국 총리의 임명식을 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미 그간의 재위 기간만으로도 세계적인 최장수 군주 대열에 올라 있다. 그는 1952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70년간 재임해왔다. 


그의 재위 기간은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63년 216일)을 훌쩍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길다. 


세계적으로 봐도 그보다 재위 기간이 긴 군주는 프랑스의 루이 14세(72년 110일) 정도만 손에 꼽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타계는 영 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군주제를 둘러싼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뉴질랜드는 1907년 영국 자치령 지위를 획득했고 1931년 영 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공화국 전환에 대한 논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가장 최근의 논쟁은 지난 2010년 국회에서 열린 개헌 관련 토론회에서 고(故) 마이클 쿨렌(Michael Cullen) 박사가 “뉴질랜드가 공화국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길이다”라고 주장했을 때이다.


헬렌 클락(Helen Clark) 노동당 정부 시절 부총리를 역임했던 그는 “군주제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지만 공화국으로 가는 기류는 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의 군주제가 뉴질랜드의 젊은 세대에겐 의미가 없고 남성의 왕위 계승자와 영국 성공회교도가 현대 뉴질랜드 가치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뉴질랜드가 국가 수반을 스스로 선출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쿨렌 박사의 말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뉴질랜드가 공화국으로 전환하는 가장 적당한 시기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통치시대가 끝나는 때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랜 책임감과 결단력 등으로 뉴질랜드의 여왕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여왕의 서거나 통치 마감에 대비해 스스로 국가 수반을 선출할 수 있는 법 개정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했을 때 뉴질랜드 총독을 새로운 국가 수반으로 선언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향후 국가 수반은 국회나 뉴질랜드 국민에 의해 선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법안은 마련되지 않았고 뉴질랜드 헌법 조항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어 즉위한 찰스 3세가 자동적으로 국가 수반이 됐다.



역대 총리들 공화국은 ‘필연’, 시기는 ‘미정’


그 동안 뉴질랜드의 역대 총리들은 공화국 전환을 얘기할 때 ‘필연’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


지난 1994년 공화국 전환에 열을 올렸던 짐 볼저(Jim Bolger) 당시 총리는 “역사의 조류는 공화국으로 흐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클락 전 총리는 지난 2009년 국회에서 가진 고별연설에서 “군주제로서의 헌법적 지위가 변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이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국기 교체에 대한 국민투표까지 밀어 부쳤던 존 키(John Key) 전(前) 총리도 뉴질랜드가 언젠가는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민감한 정치 문제인 군주제 폐지에 대해서는 한걸음 물러났다. 


자신다 아던(Jacinda Ardern) 총리도 총리가 된 후 공화국 전환에 대한 입장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던 총리는 지난달 12일 “공화국 전환이 내 생애에 발생할 것 같다고 믿지만 단기적 조치 혹은 조만간 불거질 의제가 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던 총리는 자신의 내각이 공화국 전환을 논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논의가 긴박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7년 총리가 되기 몇 달 전에 “뉴질랜드가 이제 공화국 전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말했던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아던 총리는 뉴질랜드가 결국 공화국으로 전환하고 더 이상 영국 군주를 국가 수반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지금이 급격한 전환을 논의할 시기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직면한 문제가 매우 많다”며 “공화국 전환이 곧 발생하거나 그렇게 되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제1야당인 국민당의 크리스토퍼 럭슨(Christopher Luxon) 대표는 공화국 전환 문제에 대해 아던 총리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스스로를 극력하진 않지만 공화주의자라고 밝힌 럭슨 대표는 “뉴질랜드에서 내 생애 언젠가 공화국 전환 논의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오리당과 녹색당은 공화국 논의가 이미 이뤄지고 있으며 헌법 개정이 다시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질랜드 언론도 대체로 공화국 전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언론인 뉴질랜드 헤럴드지는 지난달 13일자 사설에서 군주제의 위대한 가치는 계속성에 있다며 변화는 빨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파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공화제 전환 논의가 이뤄져야 할 최적의 시기 주장


양대 정당과 달리 전문가들은 지금이 국가적으로 공화제 전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오클랜드대 법학과 클레어 차터스(Claire Charters) 부교수는 “뉴질랜드 최상위의 권력을 지구 반대편 나라에 있고 뉴질랜드의 실상과 떨어져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차터스 부교수는 하지만 뉴질랜드는 여왕을 대신해 총독이 형식상 국가 수반으로 돼왔고 사실상 공화국으로 인식돼 왔기 때문에 공화국 전환에 대해 무관심한 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타고 대학의 앤드류 제디스(Andrew Geddis) 교수는 대부분의 뉴질랜드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는 그녀 없는 군주제가 의미 있는지의 질문을 던져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디스 교수는 공화국 전환은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겠지만 국회에서 법률 제정으로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뉴질랜드 헌법’의 저자인 캔터베리 대학의 필립 조셉(Phillip Joseph) 교수도 “총독이 이미 사실상 국가 수반으로 돼있기 때문에 공화국 전환이 현행 헌법 조항들의 대폭적인 변경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조셉 교수는 공화국 전환은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공화제 전환을 지지하는 공화주의자들은 영국의 후손인 뉴질랜드인들이 약 40%이고 나머지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뉴질랜드에서 자체의 국가 수반을 가져야 할 때라고 외치는 반면에 군주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현행 체제가 아무런 피해가 없는데 체제를 바꾸는 것은 변화를 위한 변화에 불과하고 혼란과 불안정성을 가져올 것이라고 역설한다.


지난달 27일 공개된 1뉴스 칸타 퍼블릭(Kantar Public)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0%가 영국 왕을 국가 수반으로 하는 군주제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지난해 11월 조사 때보다 군주제 지지율이 오히려 3% 포인트 올라간 결과이다.


공화제에 대한 지지율은 지난번 조사 때보다 6% 포인트 내려가면서 27%에 머물렀다.


응답자 4명 중 1명에 가까운 숫자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1뉴스는 많은 마오리들은 와이탕이 조약을 맺은 영국 왕실과의 관계가 바뀌게 되면 자신들의 권리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NZ보다 적극적으로 군주제 폐지 요구하는 호주


군주제 폐지 요구는 같은 영연방 국가인 이웃 호주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여왕을 추도하기 위해 호주 정부가 임시 공휴일로 지정한 22일 수도 캔버라 등 호주 곳곳에서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호주 공영 ABC방송은 이날 캔버라 외에 시드니와 멜버른, 브리즈번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군주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고 전했다.


특히 캔버라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공식 추도식이 열리는 가운데 일부 시민들이 여왕을 식민주의•인종학살•약탈의 상징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군주제에 대한 비판과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시위대는 군주제 폐지를 통해 호주의 땅을 진정한 주인인 원주민들에게 돌려주고 이들의 복지와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호주 연방의회의 제3당인 녹색당의 아담 밴트(Adam Bandt) 대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당일 트위터에 “호주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들과의 조약이 필요하며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주는 지난 1999년 공화국으로 전환하는 사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앤소니 알바니지(Anthony Albanese) 호주 총리는 지난 5월 집권한 직후 공화제 전환 담당 장관을 임명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타계 뒤 “내 임기 중에는 국민투표를 하지 않겠다”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대표적인 영연방 국가로 남아 있는 캐나다에서는 지난달 13, 14일 입소스(Ipsos) 여론조사 결과 성인 중 53%는 ‘군주제를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해, “그렇다”(46%)를 웃돌았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군주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캐나다 민주주의는 건강하고 그것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에 항상 개방적”이라며 “정부는 캐나다 국민들에게 중요한 사안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군주제를 강력히 지지하지도, 그렇다고 변화를 위한 논의를 피하지도 않는다는 입장과 동시에 확답은 내리지 않은 것이다. 


공화제 전환은 백인 중심 국가들보다 카리브해의 영 연방 국가들에서 급물살을 타고 있다. 바베이도스는 2021년 10월 영국 왕이 아닌 선출직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지정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394년 만에 영국 왕실과 결별했다. 


자메이카도 공화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3월 앤드루 홀니스 총리는 자국을 국빈 방문한 영국의 윌리엄 왕자 부부에게 대놓고 독립 의사를 밝혔다. 같은 시기, 수도 킹스턴의 영국대사관 앞에선 영국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최소 220만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카리브해 식민지 곳곳에 노예로 끌고 온 것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981년 독립한 앤티가바부다도 2025년 이전에 공화제 전환 국민투표를 실시할 계획이다.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이것이 군주제에 대한 비존중이나 적대감은 아니다. 진정한 주권국이 되는 독립의 최종 단계”라고 말했다. 


앞서 1970년대에도 도미니카, 가이아나, 트리니다드토바고 등 상당수 나라가 영 연방 왕국을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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