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위해 자원했던 NZ 용사들 이야기(I)

자유 위해 자원했던 NZ 용사들 이야기(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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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 27일(목)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3년 1개월이 넘도록 치열하게 벌어졌던 한국전이 끝을 보지 못하고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을 맺은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뉴질랜드는 영연방군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노령의 참전용사들이 일부 생존해 있지만 이미 많은 용사가 별세한 가운데 해가 갈수록 유명을 달리하는 용사가 많아져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다. 


한편 정전 7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가 양국에서 열릴 예정인데, 이를 계기로 73년 전 뉴질랜드 군인들의 한국전 참전 역사를 뉴질랜드와 한국 정부의 기록, 그리고 언론 보도 등을 요약해 독자들에게 두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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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가평에 있는 영연방군 참전 기념비


<한국전 발발과 유엔군 및 뉴질랜드군 참전>

 

1950년 전쟁 발발 당시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나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뒤 1948년 8월 15일에 독립 정부를 수립한 가난한 신생국이었다. 


더욱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분단국 신세를 면하지 못한 가운데 세계는 미국과 소련 등 동서 진영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는 냉전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진영에서는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한국에 연합군(UN군)을 파견하게 됐으며, 7월 초에는 유엔군 사령부가 구성됐고 사령관으로는 일본에 주둔 중인 극동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임명됐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면서 회원국에 전투병 지원 요청을 했고 뉴질랜드는 이에 가장 먼저 응답하고 나선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뉴질랜드 정부는 전쟁이 발발한 지 단 나흘만인 6월 29일에 호위함 2척 파견을 제안했다. 


당시 시드니 조지 홀랜드(Sidney George Holland) 뉴질랜드 총리는 의회에서, 정부는 영국과 미국 정부와 긴밀한 협조 속에 필요하면 호위함을 파견하겠다고 발언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에 따라 ‘투티라(HMNZS Tutira)함’과 ‘푸카키(HMNZS Pukaki)함’이 7월 3일 오클랜드를 떠났으며, 한 달 뒤인 8월 2일 일본 사세보(Sasebo)항에 도착해 유엔군 함대에 합류한 뒤 일본과 부산항을 오가는 보급선 호위 임무에 곧바로 투입됐다. 


이들 호위함은 당시 뉴질랜드 해군이 보유한 6척의 ‘로크급 대잠 호위함(Loch class frigate)’ 중 일부이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대에 건조됐다. 


배수량은 1435톤에 승조원은 각각 114명이었는데 파병 당시 푸카키함은 L. E. 헤릭(Herrick) 소령이, 투티라함은 P. J. H. 호아레(Hoare) 소령이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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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Z 해군의 ‘푸카키(HMNZS Pukaki)함’


뉴질랜드는 이와 함께 1950년 7월 26일에 유엔의 트뤼그베 리(Trygve Lie) 사무총장으로부터 지상군 파병도 요청받았는데, 하지만 2차대전 후 제한된 숫자의 정규군만 유지하던 지상군은 파견이 쉽지 않았다. 


이에 따라 요청을 받은 당일 뉴질랜드 정부는 곧바로 1000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포병 부대를 창설해 파견하기로 결정한 뒤 이튿날 의회 동의까지 받고 즉시 모병에 들어갔다. 


모병 시작 9일 만에 전국에서 5982명이 나서는 등 ‘자원자(volunteer)’가 몰려 결국 인원을 가려 뽑아아만 했으며, 자원자 중에는 마오리도 상당수가 포함됐는데 당시 뉴질랜드 인구는 총 190만 명이었다.


이후 11월 말에 훈련을 마친 1056명으로 4개 포대가 속한 ‘제16 야전 포병연대(16th Field Regiment of artillery)’를 만들었고 이들은 24문의 ‘25 파운드 곡사포(Ordnance QF 25-pounder guns)’로 무장했다. 


(참조: 영국군은 포병이나 기갑, 통신 등의 부대에는 한국군의 대대급 규모 부대에 전통적으로 ‘연대 - Regiment -’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이런 전통은 뉴질랜드군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대장에는 무디(J. W. Moodie) 중령이 임명됐으며 대포를 포함한 중장비는 그해 11월 말에 ‘갠지스(Ganges)호’를 이용해 먼저 출발했다.


이른바 ‘Kayforce(K-force)’로 불리게 된 이들은 1950년 12월 10일에 엄청난 인파의 전송을 받으며 여객선 ‘와히네(Wahine)호’를 타고 웰링턴의 아오테아 부두(Aotea Quay)를 출발했다. 


부대는 20여 일 항해 끝에 새해 전날인 12월 31일 부산항을 거쳐 송도 인근 숙영지에 도착했는데, 현재 이곳에는 2001년 5월에 부산 서구청에서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용사회에서 기증한 거북 형상의 돌로 설치한 뉴질랜드군 참전 기념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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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 서구 암남동 암남공원의 ‘뉴질랜드군 참전 기념석’


당시 한창 겨울이었던 한국은 특히 그해는 추위가 더 맹위를 떨쳤는데, 생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엄청난 추위를 경험했었다고 한 참전용사는 몇 년 전에 필자에게 그때의 기억을 전한 바 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추위는 해군 참전용사들도 기억하는데, 한 해군 병사는 밖에서 망을 보는 견시 업무를 20분 이상 하기가 어려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한편 도착 후 장비 점검 등 바쁜 시간을 보낸 포병 부대는 부산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밀양의 밀양천 변에서 투입 전 포구 수정 훈련을 하라는 유엔군 지시를 받고 1951년 1월 13일 현지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명이 탄 차량이 삼랑진에서 길을 잘못 들어 대열에서 이탈했으며 이들은 북한군 유격대와 만나는 바람에 한 명은 중상을 입었고 포수인 로날드 맥도날드(Ronald MacDonald) 일병은 결국 사망하면서 뉴질랜드 군인 중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Kayforce는 이후 1951년 1월 21일에 경기도 이천으로 이동한 후 영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의 ‘제27 보병여단(27th British Commonwealth Infantry Brigade)’에 배속된 후 나흘 뒤부터 본격적으로 작전에 투입됐다. 


특히 2월 15일 경기도 여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방 관측장교였던 A. A. 록스버(Roxburgh) 대위는 통신병 H. K. 맥거빈(McGubbin) 하사와 함께 정확한 사격 지령은 물론 진지까지 접근한 중공군을 수류탄과 소총으로 물리치고 진지를 사수해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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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병 전 북섬 중부 내륙 와이오우루(Waiouru)에서 훈련 중인 Kayforce


<가평 전투 승리에 공헌한 K-force> 


개전 후 한때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여세를 몰아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한 뒤 북진을 계속해 그해 10월 19일에는 평양에 도착했다.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의 중국 국경을 향해 전진하던 유엔군은 그해 10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한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내주는 이른바 ‘1.4 후퇴’를 하게 됐다. 


이미 개전 초기부터 참전한 뉴질랜드 해군은 수송선단 엄호는 물론 해상 초계 및 지상군 함포 지원 사격과 기뢰 제거 작전 등에 임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에도 초계 및 유엔군의 대형 함정 엄호 부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1950년 말에 부산에 도착했던 지상군인 Kayforce 역시 이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51년 1월 무렵 전쟁은 중국이 휴전회담을 하자는 유엔군 측 제의를 거절한 가운데 지금의 휴전선 인근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고지전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중공군과 북한군은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다. 


특히 1951년 벌어진 중공군의 춘계 공세 중 5차 공세였던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경기도 가평(Kap’yong) 일대에서 벌어진 ‘가평 전투’에서는 중공군과 영연방군의 제27 보병여단이 격돌한 가운데 뉴질랜드군이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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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yforce가 사용했던 ‘25파운드 곡사포’가 크라이스트처치 파파누이(Papanui) 재향군인회 마당에 전시된 모습


영국제인 이 대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연방군의 주요 화포였으며 구경은 87.6mm, 고폭탄 기준 최대 사거리는 1만 2253m이다. 


25 파운드(11.3kg) 포탄을 사용하고 6명이 조작하는데, 포성이 크고 워낙 자주 발사해 많은 참전용사가 전후에도 청력 장애로 고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 포는 지금도 웰링턴에서 열리는 국가 행사에서 예포로 사용된다. 



<안작데이 기념일에 거둔 승리> 


특히 뉴질랜드 포병은 중공군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사투를 벌이던 ‘호주 왕립 연대 3대대(3rd Battalion, Royal Australian Regiment)’와 ‘캐나다 패트리샤 공주 경보병 연대 2대대(Canadian 2nd Battalion, Princess Patricia’s Light Infantry)’를 고폭탄과 연막탄 등을 쏘면서 필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전투에서 호주군은 32명, 캐나다군도 1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결국 이 전투는 영연방군의 분전으로 가평 계곡을 따라 서울-춘천 도로를 차단해 유엔군을 동서로 분할한 뒤 서울로 다시 진격하려던 중공군의 공세가 좌절되면서 서울이 또 한 번 함락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엄청난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중공군 공세를 막아냈던 이 전투에서, 그러나 뉴질랜드군에서도 관측장교였던 데니스 필든(Denis Fielden, 당시 32세) 중위가 머리에 총을 맞고 전사하면서 참전 후 본격적인 전투에서의 첫 전사자가 발생했다. 


당시 포병인 뉴질랜드군은 포 진지 근처까지 밀어닥친 중공군과 직접 소총 총격전을 벌일 정도로 전투는 치열하고 급박했다. 


특히 이들 영연방군이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던 4월 25일은 뉴질랜드와 호주 연합군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튀르키예의 갈리폴리에 상륙했던 ‘안작데이(ANZAC Day)’이기도 했다. 


당시 3일 동안의 전투에서 뉴질랜드 포병은 사거리 3000~1만m에서 1만 발에 달하는 포격을 가했으며 이와 같은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은 호주군 대대 앞에서만 4000여 병력이 죽거나 다치는 큰 손해를 입었다. 


연대장 무디 중령은 전선이 크게 혼란한 가운데도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에서 중공군 대부대 추격을 받으면서도 단 한 문의 포도 잃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부대를 철수시키는 지휘 역량을 보여줘 무공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받았다. 


또한 이 전투의 공로로 뉴질랜드군에게는 이듬해에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이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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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유엔군 묘지의 데니스 필든 중위 묘, 영국 하트퍼드셔(Hertfordshire) 출신인 그는 한국전 참전 뉴질랜드 군인 중 두 번째 전사자이다. 


<지원 병력 추가 수송 중 좌초한 수송선> 


한편 영연방군은 가평 전투 후 양평으로 이동해 ‘제28 영연방 보병여단(28th British Commonwealth Infantry Brigade)’으로 개편됐으며 여단은 1951년 10월에는 서울 북쪽 임진강 전선에 배치된 상태였다. 


당시 뉴질랜드군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자 전선을 5~7km가량 북쪽으로 밀어 올리는 ‘코만도 작전(Operation Commando)’에 참여해 6일간의 작전 기간 중 7만 2000발에 달하는 포탄을 발사하면서 참전 이래 가장 바쁜 한 달을 보냈다. 


당시 공격에 나섰던 호주군 대대는 경기도 연천 마량산(317 고지)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전 이래 호주군이 겪었던 가장 치열했던 중공군의 포격을 받으면서도 결국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뉴질랜드 포병의 지원 아래 일명 ‘능선 달리기(Running the ridges)’라는 전술로 마량산과 고왕산을 지켜낸 당시 전투에서 호주군은 20명의 전사자와 104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 전투 이후 한국전은 본격적인 피아 간 고지 쟁탈전으로 전쟁 상황이 바뀐다.


마량산 전투는 호주군의 한국전 참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됐고 지금도 매년 현지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안타깝게도 마량산 일대는 현재 북한에 속해 있다.


한편 1951년 11월에는 중공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영연방군이 일부 전선에서 뒤로 밀린 가운데 뉴질랜드 포병은 전선을 지원하고자 11월 4일에는 하루에 무려 1만 발이나 되는 포탄을 발사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작전은 영국 제29 여단과 제28 영연방 여단, 그리고 제27 캐나다 여단으로 구성된 ‘제1 영연방 사단(1st Commonwealth Division)’에 의해 진행됐는데, 이후 뉴질랜드군은 통신 및 수송 지원부대를 편성해 부대 규모를 1500명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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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군을 부산까지 수송했던 ‘와히네(Wahine)호’ 


이에 따라 지원부대 병력이 1951년 8월 2일에 웰링턴을 떠났는데, 당시 이들이 탑승했던 ‘와히네호’가 불행히도 호주 다윈(Darwin) 북쪽의 ‘마젤라(Masela)섬’ 인근에서 좌초하는 사고가 났다. 

그러나 탑승자 전원이 무사히 구조됐으며 이들은 나중에 1951년 6월부터 일본 히로(Hiro)에 이미 설치됐던 뉴질랜드군 기지로 항공편으로 이송됐으며, 1951년 10월 15일에는 ‘제10 지원 중대(10th Company RNZASC)’가 창설돼 영연방군에 합류했다. 


참고로 와히네호는 1913년에 스코틀랜드에서 건조돼 페리로 사용하다가 한국전 발발 당시 뉴질랜드 정부가 임대해 병력 수송선으로 사용했지만 1951년 8월 발생한 좌초 사고로 결국 폐기됐다. 


한편 1964년에 영국에서 건조돼 웰링턴과 크라이스트처치의 리틀턴(Lyttelton) 구간을 운행하던 중 1966년에 웰링턴 항만 부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좌초하면서 53명이 숨지는 대형 해난 사고를 일으켰던 ‘TEV 와히네호’와는 다른 배이다. (다음 호에 계속)


남섬지국장 서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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