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10월 14일 치러졌고 국민당이 최다 의석을 차지해 1당에 올라섰지만 한 달이 휠씬 지나도록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서 외교와 국정에 차질을 빚었다. 이유는 국민당이 과반을 이루지 못하면서 8석을 차지해 제5당이 된 뉴질랜드제일당과의 연정 협상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선거제도인 혼합비례투표제(MMP, Mixed Member Proportional)는 사표(死票)를 방지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가 가능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오직 뉴질랜드제일당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제도로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
‘킹 메이커’ 로 부활한 뉴질랜드제일당
총선이 실시된 10월 14일의 밤에 나온 예비 개표 결과 국민당이 정당 득표율 39%로 50석을 차지하고, 액트(ACT)당이 11석을 얻으면서 최종 개표 결과에 대한 우려는 남아 있었지만 중도 우파 연립정부가 순조롭게 출발한 것으로 보였다.
국민당 크리스토퍼 럭슨(Christopher Luxon) 대표는 “오늘 밤 득표율로써 국민당은 차기 정부를 이끌 위치에 오를 것”이라며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자신의 정부는 “경제를 재건하고 세 부담을 줄일 것”이라며 “생계비도 낮추고 법과 질서도 회복하겠다”고 강조했다.
국민당의 승리 원인으로 집권 노동당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추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윈스턴 피터스(Winston Peters) 대표가 이끄는 뉴질랜드제일당은 정당 득표율 6.5%로 비례대표 의석으로만 8석을 차지하며 의회에 재입성했다.
뉴질랜드제일당은 2020년 총선에서 5% 득표를 못해 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2당으로 밀린 노동당은 녹색당, 마오리당, 뉴질랜드제일당 등의 연정을 통해 과반 지지를 확보하면 정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지만, 선거 기간 뉴질랜드제일당과의 연정을 배제한 노동당의 크리스 힙킨스(Chris Hipkins) 총리는 14일 밤 “수치를 보면 노동당이 차기 정부를 구성할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 럭슨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패배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차기 총리는 럭슨 대표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3일 재외국민투표와 부재자투표 등 60만3,257표의 특별투표를 포함한 2023년 총선 최종 개표 결과가 나오면서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이 특별투표 수는 전체투표 수의 거의 21%에 해당되는 것으로 지난 2020년과 2017년 총선 때의 17%에 비해서도 늘었다.
이번 총선은 등록한 유권자의 78.2%가 투표해 2020년 총선 때보다 4%포인트 낮았다.
공식 개표 결과 국민당은 예비 결과 때보다 2석을 잃어 48석으로 줄었고, 녹색당은 1석 추가한 15석, 그리고 마오리당이 2석을 추가하면서 6석으로 창당 이래 가장 많은 의석 수를 확보하게 됐다.
이번 의회는 선거기간 중 액트당 후보가 사망하여 지난달 25일 보궐선거가 실시된 포트 와이카토(Port Waikato) 지역 의석까지 총 123석으로 역대 가장 많은 의원들로 열리게 됐다.
■ 2023년 총선 공식 개표 결과
총선 40일 만에 정부 구성 합의
총선 최종 개표 결과 중도 보수 연합인 국민당과 액트당은 합쳐도 59석을 얻는 데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하면서 우익 성향의 민족주의 정당인 뉴질랜드제일당 지지가 필요하게 됐다.
만약 연정 합의에 이르지 못해 정부 구성 실패를 선언하면 총리는 총독에게 국회 해산과 재선거를 요청, 다시 총선을 치르게 된다.
법에 따르면 뉴질랜드 의회는 공식 선거 결과 후 6주 이내에 새로 소집돼야 하지만, 정부 구성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에어뉴질랜드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럭슨 대표는 많은 협상을 했고 합병을 성사시킨 경험이 있다고 과시했다.
그는 짐 볼저(Jim Bolger), 존 키(John Key), 빌 잉글리쉬(Bill English) 등 전(前) 총리들의 협상 방식을 비판하며, 본인이 더 나은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정 협상이 진행되면서 주도권은 정치 9단 피터스 대표에게 넘어갔고 럭슨 대표는 협상 기술에 대한 지탄을 받았다.
연정 협상이 늦어지면서 선거에서 패한 노동당 정부의 권한도 계속됐다.
힙킨스 총리는 지난달 11일로 임기가 끝났지만, 총독에 의해 재임명 됐으며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과도 정부를 이끌었다.
정부 구성이 늦어지면서 지난달 15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럭슨 대표가 참석하지 않고 퇴임하는 노동당 정부 장관을 보냈다.
세계 정상들이 참석한 APEC에 럭슨 대표가 연정 협상 때문에 불참한 것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여론이 나왔다.
지난달 14일 웰링턴에서 가질 예정이었던 3당 대표의 협상에 피터스 대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석연치 않았다.
피터스 대표는 오클랜드에서 퍼시픽 아일랜드 포럼을 마친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그와 만나고 싶다고 하여 웰링턴에 내려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뉴질랜드 국민도 듣지 못했는데 이미 피터스 대표가 외무장관으로 내정될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피터스 대표가 외무장관에 임명되기도 전에 주제넘게 싱가포르 외무장관을 접견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로부터 10일 후 피터스 대표는 정부 구성을 위한 합의를 이루면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연정 협상 과정에서 액트당의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 대표는 민주주의에선 비례주의가 중요하고 정부 구성 정당 중 득표율 2위인 액트당에서 부총리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피터스 대표와 첨예하게 맞섰다.
결국 부총리직은 두 대표가 양분하여 2025년 5월까지는 피터스 대표가 맡고 그 후 18개월 동안은 시모어 대표가 맡는 것으로 합의됐다.
뉴질랜드 선거제도에 대한 논란
뉴질랜드의 선거제도인 MMP는 독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독일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선택의 여지 없이 MMP를 채택한데 비해 뉴질랜드는 지난 1993년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했다.
이전에 실시했던 단순다수투표제(FPP)는 1990년대 초반 많은 유권자들이 양대 정당인 국민당과 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낙선한 지역구 후보에 투표한 유권자들이 심한 박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국민투표에 부쳐진 것이다.
MMP는 다수제와 비례대표제를 결합시키되 비례대표제의 성격을 더 강하게 하는 선거 방식으로 사표를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으로 평가 받는다.
MMP는 비교적 정당 득표율대로 각 정당이 걸맞은 의석을 가져간다는 점과 사표를 없애 총선 때 투표에 참여한 거의 모든 유권자들의 민의를 수용할 수 있다는 점, 그에 따라 사표방지심리를 없앤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MMP는 정당이 크든 작든 최소 5%의 정당 득표만 획득하면 의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어 다당제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FPP에 비해 여성 의원과 소수민족 출신 의원들이 많이 선출되는 등 보다 다양화된 국회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6선의 위업을 달성한 국민당 멜리사 리(Melissa Lee) 의원도 MMP 제도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의회 진출이 어려웠을 것이다.
뉴질랜드의 MMP는 연동형으로 초과의석(Overhang seat)이라는 문제가 있다.
초과의석이란 어떤 정당의 지역구 당선자 수가 정당투표에 따라 그 정당에 할당된 의석수를 초과하는 경우를 말한다.
또한 극단적 성향을 가진 정당이더라도 일정 수준의 득표율만 얻으면 원내에 진입하기가 비교적 쉬워진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뉴질랜드제일당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한 정당이 의회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기 어려운 MMP에서는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군소 정당들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소수 정당이 킹메이커 역할을 하는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지난 2011년 총선에서 선거제도 변경을 묻는 국민투표도 함께 실시됐는데, MMP를 유지하는 의견이 57.8%로 변경 42.2%보다 많았다.
현재 뉴질랜드 정당 구성으로 보면 중도 우파인 국민당과 액트당은 항상 같이 가고, 중도 좌파인 노동당과 녹색당도 동반 관계로 여겨진다.
지난 2004년 해저 및 해안에 대한 문제로 노동당에서 탈당한 타리아나 투리아(Tariana Turia) 등이 주도해 창당한 마오리당은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노동당과 가깝다.
포퓰리즘 성향의 뉴질랜드제일당만 총선 때마다 입장을 유보하며 킹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뉴질랜드제일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피터스 대표에게 기회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이유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17년 총선이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이 이번 총선보다 높은 44.4%의 정당 득표율로 1당 지위를 유지하고 노동당은 36.9%에 그쳤지만 피터스 대표가 노동당을 선택하면서 자신다 아던(Jacinda Ardern) 노동당 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단지 7.2%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한 뉴질랜드제일당이 뉴질랜드 총리와 정부를 결정하는 매우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불안한 ‘한지붕 세가족’ 연정
국민당, 액트당, 뉴질랜드제일당 등 3당 연정은 총선 전부터 예상됐던 시나리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정한 것으로 예상했다.
총선 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절대 다수인 63%가 3당 우파 연립정부가 불안정할 것이라고 답했고, 안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한 응답자는 26.4%에 불과했다.
특히 40세의 시모어 액트당 대표는 78세의 피터스 대표에 과거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이라고 언급하는 등 두 사람은 껄끄러운 관계를 보여 왔다.
총선 이후 40일 만인 지난달 23일 국민당은 액트당, 뉴질랜드제일당과 정부 구성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고 24일 서명식을 가졌다.
3당은 이날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합의한 정책들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국민당의 대표적인 선거 공약인 외국인 주택 구입세가 뉴질랜드제일당의 반대로 백지화됐다.
노령연급 수급 개시 연령은 뉴질랜드제일당의 주장 대로 현행 65세를 유지하게 된다.
새로운 정부는 노동당 정부가 도입했던 주요 정책들을 폐지하기로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해양 석유•가스 탐사 금지 정책이다. 2018년 당시 노동당 정부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겠다며 해양 석유•가스 탐사 활동을 금지한 바 있다. 하지만 보수 연립정부는 이를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
또 2009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에게 담배 판매를 금지한 강력한 금연법도 폐지해 소매점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로 했다.
강력한 총기 규제도 재검토하기로 했다. 노동당 정부는 2019년 3월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에서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지자 반자동 소총 등 군사용 무기를 정부가 되사는 총기 규제 프로그램을 도입한 바 있다.
이 밖에도 개인 소득세를 낮추고 마오리 언어 사용과 소수집단 우대 정책 등도 재검토하기로 했다.
기존에 불필요한 규제를 재검토하고 새로 도입하는 규제를 심사하는 규제부를 신설하고, 시모어 대표가 장관을 맡기로 했다.
이런 정책 변화가 공개되자 자리에서 물러나 야당 대표가 되는 힙킨스는 “새로운 정책이 뉴질랜드를 더욱 양극화하고 분열시킬 것”이라며 “부자를 우선시하고 노동자들을 더 나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