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섬 서해안 ‘웨스트 코스트 지역(West Coast Region)’ 해안 도시인 ‘웨스트포트(Westport)’가 잦은 홍수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도시 전체를 이전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11월 20일 열린 ‘Workshop: Resilient Westport - Westport Master Planning’에서는 장기적 대비책으로 이런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는 도시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민간 회사인 ‘이스머스(Isthmus)’ 관계자가 참여했다.
지구 온난화와 심각해진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등으로 갈수록 기상재해가 더 자주 발생하고 또 피해 규모도 커지면서 이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위협받는 지역이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웨스트포트 소식은 이목을 끌고 있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웨스트포트 전경, 오른쪽에 불러강이 보인다.
<골드러시 때 번창한 웨스트포트>
교민들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도시인 웨스트포트는 남섬 북부 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시 이름은 아일랜드 북동부에 있는 같은 이름의 항구 도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며 실제로 도시가 위치한 지형적인 입지도 이름과 잘 어울린다.
2024년 6월 현재 추정 인구가 4,600여 명으로 그리 많지 않지만 웨스트 코스트 지역 전체 인구가 3만 4,800명(2024년)이고 인구밀도가 ㎢당 1.5명에 불과한 이 곳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 ‘그레이마우스(Greymouth)’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또한 기초지방자치단체(Territorial Authority, TAs) 격인 ‘불러 디스트릭(Buller District)’ 시청이 위치한 곳이라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인근 지역을 대표하는 행정과 경제, 산업 및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이다.
웨스트포트는 19세기 중반 무렵, 유럽 정착민이 뉴질랜드에 본격적으로 도착하기 시작한 뒤, 특히 1860년대부터 불러강 유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불어닥친 골드러시로 번영이 시작됐다.
당시 금광 산업으로 많은 상점과 호텔, 서비스 업체가 생겨났고 당연히 인구도 급증하면서 서해안에서 가장 먼저 생긴 유럽인의 정착지이자 동시에 이 지역의 중심 도시로 급성장했다.
한편, 골드러시가 끝난 이후에 웨스트포트의 경제 중심은 석탄 산업으로 옮겨갔는데, 주변 지역에는 채굴 여건이 좋은 양질의 석탄이 풍부해 석탄 채굴과 수출이 이 지역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석탄은 초창기에는 웨스트포트 항구를 통해 뉴질랜드 전국으로 수송됐으며, 이런 상황은 철도까지 건설되는 등 도시의 물류와 교통 인프라가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이 이뤄지며 석탄 산업이 점차 경쟁력을 잃고 수요까지 감소하면서 지역 경제는 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주요 광산이 폐쇄되고 일자리가 줄면서 인구 유출이 심화하자 덩달아 상업과 서비스업도 쇠퇴했다(현재 채굴하는 석탄을 기차로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옮긴 뒤 수출하고 있다).
▲ 2021년 7월의 대홍수로 물에 잠긴 주택들
<주민 절반이 대피했던 2021년 7월 대홍수>
여기에다가 도시를 따라 흐르는 불러(Buller)강의 범람으로 잇달아 홍수 피해를 보면서 도시 기반 시설이 거듭 손상됐다.
특히 2021년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이어진 폭우로 불러강과 오로와이티(Orowaiti) 하구와 석호가 범람하고 제방이 무너져 800채가 넘는 집이 잠기고 2,000명 이상 주민이 대피하는 등 웨스트포트에 막대한 재산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안겼다.
당시 홍수는 주거지만 아니라 주요 도로와 항구 시설도 파괴했고, 주택과 상업시설 복구는 물론 또 일어날 홍수를 방지해야 할 인프라 구축에도 막대한 돈이 필요하게 됐다.
한때 산업 중심지로 번영했던 웨스트포트와 불러 디스트릭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에서 인구가 늘어나는 가운데도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하는 실정이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젊은 층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타지로 떠나며 인구 고령화까지 더욱 심해지면서 잿빛 미래를 보여주는 상황이다.
그나마 지난해 국민당 연립 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석탄 개발 규제 완화 등 광산업에 대한 관심이 늘고, 인근 내륙 지역에서 금광 개발이 다시 이뤄진다는 소식 등으로 지역 주민들의 기대감이 조금 커지던 상황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데다가 불러강 하구에 있다는 어쩔 수 없는 지형적인 문제로 앞으로 홍수 위험이 줄어들 가능성도 없어, 결국 지역사회 입장에서는 도시 자체의 지속 가능성을 다시 검토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쇠퇴한 광산업 대신 ‘웨스트 코스트 트레일(West Coast Trail)’처럼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관광산업과 더불어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농업과 공예품 생산 등을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 인근 지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지형도
<유량 많고 경사도 급한 불러강은 잦은 홍수의 원인>
웨스트포트가 이처럼 홍수에 극히 취약한 이유는 큰 강의 하구에 위치한 해안 도시이기 때문인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불러강이 국내의 다른 하천보다 홍수를 일으킬 가능성이 더 많다는 점이 특히 문제이다.
서던 알프스의 ‘넬슨 레이크(Nelson Lakes)국립공원’에서 발원해 태즈먼해로 흘러 들어가는 불러강은 길이 170km, 유역면적 6,500㎢로 뉴질랜드의 강들 중에서도 중대형 강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평균 유량이 초당 약 454㎥로, 국내에서 가장 유량이 많은 남섬 남부의 클루서(Clutha)강의 초당 약 613㎥보다는 적지만 북섬 와이카토(Waikato)강의 약 340㎥보다는 많다.
이처럼 유량이 많은 이유는 이 지역이 뉴질랜드에서도 유달리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기 때문인데, 불러 디스트릭트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00mm에서 5,000mm에 이른다.
그나마 해안인 웨스트포트는 지역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적어 연간 약 1,200~1,800mm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강수량이 늘면서 강우 강도가 짧고 집중적으로 내리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불러강이 발원하고 흐르는 내륙 쪽은 강한 서풍이 습기를 머금은 구름을 밀어 올려 서던 알프스 산맥 서쪽 사면에서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지형성 강우로 연간 강수량이 4,000~5,000mm에 달한다.
실제로 이렇게 비를 뿌리고 산맥을 넘는 건조한 바람으로 인해 산맥 동쪽인 캔터베리 평원은 연간 강수령이 약 600~800mm 정도로 불러 디스트릭에 비해 훨씬 건조한 편이다.
연중 비가 내리지만 특히 저기압과 서풍이 발달하는 겨울과 봄에는 강수량이 더 많은데, 이렇다 보니 내륙 하천은 풍부한 물 공급을 받아 많은 유량을 유지하면서 불러강으로 쏟아낸다.
여기다가 강물이 서던 알프스 산맥의 높은 곳에서 상당히 짧은 거리를 가파르게 내려와 태즈먼 바다로 들어가는 만큼 곳곳에 급류도 많고 유속이 빠른 강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따라 울창한 숲을 비롯한 독특한 생태계와 함께 래프팅이나 카약과 같은 레저 활동도 활발한데, 하지만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만약 홍수가 나면 강물이 다른 하천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불어난다는 점이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 태즈먼 바다와 만난 불러강
<1km 떨어진 정부기업 농장 부지로 도시 이전>
이번 워크숍에서 제안된 도시 이전 계획은 웨스트포트 시내 전체를 홍수 위험이 덜한 국영기업인 ‘파무-랜드코프(Pamu-Landcorp) 농장’의 부지로 옮기자는 것이다.
이곳은 현재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으며 지형이 높아 홍수로부터 안전하고 또한 주변의 사유지와 연결돼 민간 투자와 연계한 개발 가능성이 많다.
이전 작업은 도시 설계 회사인 ‘이스머스(Isthmus)’가 주도하며, 이른바 ‘관리된 후퇴(managed retreat)’라는 방식으로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 장기적으로 도시 기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관리된 후퇴’는 도시나 마을을 기후 변화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전할 때 적용하는 방식으로, 기후 변화로 웨스트포트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는 다른 나라에서도 자주 고려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번 계획에서도 정부가 새 정착지를 만들 법인에 창업 자금과 토지를 제공하는 등 초기 자금을 지원한 이후 민간 투자와 협력해 새로운 도시 개발을 추진한다.
이는 정부 기관인 ‘Housing NZ’가 오클랜드 서부에 주택을 짓기 위해 국방부 소유의 옛 공군기지를 인수했던 ‘Hobsonville land company’에 했던 지원과 유사한 방식이다.
또한 새로운 도시에는 민방위 시설이나 학교와 스포츠 등 주요 공공시설을 먼저 옮겨 거점을 형성한 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새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점진적으로 유도하는 한편 기존 도시 지역은 서서히 폐쇄하는 단계를 밟게 된다.
나아가 계획을 추진하면서 지역 주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며, 검토를 거쳐 2025년 4월에 불러 디스트릭 시의회에 최종안을 제출한 후 최종 결정 여부를 시의회에서 논의한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작업 일정이다.
▲ 웨스트포트 주변에는 강과 석호가 많아 홍수 시 시내가 섬이 된다.
<웨스트포트는 홍수 속 섬, 지금 꼭 내려야 할 결정>
한편 현재 주민 사이에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부는 지금 위치를 지키자며 강하게 반대하지만 더 이상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빨리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미 클레인(Jamie Cleine) 불러 시장은 이 계획은 주민을 강제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라면서, 선택의 폭을 넓히고 50년이나 100년 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대안으로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주 열린 워크숍에서 ‘이스머스’ 관계자도, 작업이 당장 다음 달이나 내년에 시작하는 게 아니고 아이들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면서, 도시 이전 작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뤄지는 장기적인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웨스트포트의 미래를 위한 계획 수립은 지금 시작해야지 긴급하고 다른 대안이 없을 때야 시작하는 게 아니라고 잘라 말하고, ‘지연된 행동은 가장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Delayed action could have the most detrimental effect of all)’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지금까지 항상 홍수 사태를 겪어왔던 웨스트포트는 사실상 ‘홍수 한가운데의 섬(island in a flood)’이며, 또한 인근에서 모인 급류가 한군데 모이는 ‘구멍(pinhole)’이라면서, 앞으로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진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도시 이전 계획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금 문제, 특히 막대한 자금을 장기적으로 조달하는 구체적인 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
이에 대해 이스머스 관계자는 납세자 돈이 쓰이지 않는 파트너십 기반의 접근 방식이 필요할 것이며 이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방식일 거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의견이 다른 주민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어야 함은 당연한데, 또한 새 부지 개발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나오고 있다.
▲ 빠른 대처를 강조하는 제이미 클레인 시장의 SNS
<비슷한 처지 빠진 지역 많아, 웨스트포트에 이목 쏠려>
언론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웨스트포트의 이전 논의 소식에 주목하는 이유는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속에 국내에서도 유사한 처지에 빠진 곳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웨스트포트보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웨스트 코스트 남부의 ‘프란츠 조셉(Franz Josef) 빙하마을’도 지난 몇 년간 홍수 피해를 잇달아 겪으면서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곳 역시 와이호(Waiho)강의 침식과 자갈 퇴적으로 강바닥이 매년 18cm나 상승하면서 마을을 위협하는데, 마포우리카(Mapourika) 호수 근처로 마을을 통째로 옮기는 방안도 나왔지만 추정되는 초기 비용만 무려 6억 달러에 달한다.
결국 기존 제방을 확대하기 위해 정부가 920만 달러를, 주민이 300만 달러를 분담했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단기적 해결책일 뿐이고 제방 붕괴 위험이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곳 외에도 이미 전국적으로 해수면 상승 등 기후 변화 문제로 주거지는 물론 철도와 도로, 수자원 관리 시설 등 인프라가 위협받는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번 워크숍에서 클레인 불러 시장은, 뉴질랜드의 많은 곳이 식민지 시절에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임시방편으로 개발했는데, 특히 웨스트포트는 당시 광산 접근성이 가장 중요했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오래전에는 자연재해 위험이나 기후 변화 영향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면서, 웨스트포트가 자연재해 측면에서 겪은 일을 잘 알고 있는 지금이 바로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 미래를 내다보고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지 살펴볼 때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같은 일이 불거졌다고 하더라도 작은 마을이 대부분이었기에 단편적인 소식과 관심에 머물렀지만 지역 시청까지 있는 웨스트포트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논의가 진행되고 또한 자금 마련 등 실제 이전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얼마나 되는 기간 동안 진행할지 등등, 모든 면에서 이번 웨스트포트 사례는 눈과 귀를 쏠리게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후 회복력’에 대한 교훈을 던지는 국제적인 모델이 될 수도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