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9월 20일(토) 치러지는 가운데 때아닌 스파이 논쟁이 국내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9월 17일(수) 아침에 국내 주요 언론들은, 뉴질랜드 정부가 우방을 대상으로 자체 목적이나 미국을 위해 첩보활동을 했다는 미국의 탐사전문 언론인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글렌 그린왈드(Glenn Greenwald)의 폭로 기사를 일제히 다뤘다.
그린왈드는 뉴질랜드 정보기관인 ‘정부통신보안국(Government Communications Security Bureau, GCSB)’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 중이라면서 정보활동의 대상이 된 국가들의 명단 공개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그린왈드는 자신의 폭로가 정치적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특히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 후보로 나선 뉴질랜드에 대한 투표가 있는 10월 이전에 추가로 구체적 내용을 폭로하겠다고 밝혀 파란이 예상된다.
이 같은 스파이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특히 미국의 우방으로서 그동안 뉴질랜드가 미국의 정보수집 활동에 어떻게 동참하고 기여해 왔는지에 대한 논쟁이 최근 들어 더 크게 불거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논쟁은 당장 총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번 선거에 처음 등장한 인터넷-마나당의 킴 돗컴이,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어산지나 에드워드 스노든, 그리고 스노든의 폭로를 가디언지에 게재했던 글렌 그린왈드 등 세계적 파장을 일으킨 내부 고발자들을 국내 선거운동에 활용하면서 더 부각되고 있다.
지난 15일(월) 오클랜드에서 열렸던 인터넷-마나당의 ‘Monent of Truth’ 행사장에 영상으로 출연했던 이들 중 특히 스노든은, 정부통신보안국이 ‘엑스키스코어(XKeyscore)’ 등을 이용해 뉴질랜드 국민들의 통신을 대량으로 감청한다고 폭로했는데, 이에 대해 존 키 총리와 보안국 측은 장비의 실체는 인정하면서도 실행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이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서, 정부가 일반 국민들의 사생활까지 일일이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이미 폭로된 내용에 덧붙여 앞으로 추가될 내용에도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2월 ‘사생활위원회 (Privacy Commissioner)’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보통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감시가 너무 많다”는 설문에 52%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 비율은 2012년 조사에서는 40%였다.
이처럼 국가기관에 의한 개인의 사생활 감시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이를 계기로 그동안 국내에서 발생했던 관련 사건을 포함해 미국을 중심으로 최첨단 장비를 이용한 도청과 감청 등 새로운 형태의 정보전쟁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아본다.
<낫을 들고 나선 새벽의 농부 3명?>
미처 어둠이 가시지 않은 4월의 어느 날 새벽 6시 무렵 남섬 블레넘 인근의 어느 목장 주변.
이 한가로운 농촌지역 한 곳에서 낫을 든 3명의 남성이 마치 농사일이라도 나선 듯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이 향한 곳은 대형 접시 안테나라도 들어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지름이 30m는 족히 됨직한 은색의 커다란 둥근 돔을 둘러싼 3중 울타리였고, 이들의 침입을 감지한 경보기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경보가 울렸지만 이들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돔에 접근, 가지고 있던 낫을 휘둘러 돔 표면에 2m 정도 크기 구멍을 냈고 이로 인해 거대한 돔 지붕은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주저앉기 시작했다.
위 이야기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다. 2008년 4월 30일 블레넘 인근 와이호파이(Waihopai)에 있는 뉴질랜드 정부의 ‘정부통신보안국’ 소속 감청용 시설이 반전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공격 받던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당시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호키앙가 출신의 사무엘 피터 프레드릭 랜드(Samuel Peter Frederick Land, 24)와 오타키 출신 교사인 아드리안 제임스 리슨(Adrian James Leason, 42), 그리고 피터 레지날드 레오 머난(Peter Reginald Leo Murnane, 67) 등 3명이었다.
이들은 반전 단체인 ‘Anzac Ploughshares (Anzac쟁기)’ 소속으로 이들이 내세운 단체 명칭은 성경에 나오는 ‘칼을 녹여 쟁기로’ 라는 문구를 인용해 붙여진 것이며 3명 중 오클랜드 출신인 레오 머난은 실제로 도미니크 교단의 현직 수도사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은 범행 후 도주하지 않고 현장에 머물다 30분 뒤 출동했던 보안요원들에 의해 모두 인근 블레넘 경찰서로 자진해서 연행됐는데, 이들은 반전 메시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들이 훼손한 돔은 결국 120만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듬해 7월 복구됐는데 당시 내부 기기를 보호하는 돔 부분만 훼손됐었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운영에 차질을 빗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건은 반전주의자들이 국가 1급 보안시설에 접근해 이를 훼손시키기까지 별다른 예방 조치나 평시 보안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도 비난 여론이 일었지만, 그보다는 이들이 노린 시설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놓고 세간의 이목이 더 크게 집중된 바 있다.
2개의 돔 구조물로 구성된 이 시설은 남섬 북동부의 도시인 블레넘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와이호파이 계곡에 위치하는데, 30헥타르의 너른 부지에 지난 1989년에 첫 접시형 안테나가 설치돼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1998년에 두 번째 안테나가 설치됐다.
이 시설은 미국 주도로 시작된 국제통신 감청망인 이른바 ‘에셜론(Echelon)’의 감청기지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사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언론에 주목을 받은 바 있는데, 에셜론은 UKUSA 5개 회원국(AUSCANZUKUS: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그리고 미국)이 운영하는 전 세계 통신을 감청하는 신호정보 수집 및 분석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동서 냉전시대에 미국이 사용했던 일반 군사용 감청시설과는 다르게 위성통신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감청하기 위해 시작됐으며, 현재 120여 개 위성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걸쳐 전화와 이메일, 팩스 등을 모두 감청한다. 에셜론의 처리 용량은 하루 30억 건이나 된다고 하는데 단순한 감청뿐만 아니라 암호해독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국가보안국(National Security Agency, NSA)’에 의해 운영되는 에셜론은 1972년부터 미국과 함께 미국의 최고 동맹국인 영국이 처음 시작해 이 둘을 1차 가입국, 그리고 곧이어 참여한 캐나다와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를 2차 가입국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앵글로 색슨 민족이 주축인 국가로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와 뉴질랜드가 참여함으로써 지구 거의 전역이 위성의 감청권 내에 들어가게 됐다.
이후 나토 동맹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터키, 남아공 등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나중에 참가한 이들 3차 가입국은 최초 5개국보다 에셜론을 통해 획득한 정보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는 오산과 평택 기지에 시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와이호파이의 이 시설이 에셜론의 일부라는 추정은 금년 8월에 미국 국가보안국 기술자가 현장을 방문해 국내 정보 관계자들과 업무 협의를 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해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임이 명확해 보인다.
에셜론은 지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9년과 2000년 사이에 호주 정보기관이 이의 존재를 시인했고 이어 영국 언론이 이를 폭로한 가운데 2001년에는 유럽의회가 공식적인 보고서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특히 지난 1998년에 토니 스콧 감독이 만들고 윌 스미스와 진 핵크먼이 주연했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라는 헐리웃 영화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그 베일이 벗겨지기도 했다.
당시 영화에서 변호사 역의 윌 스미스가 국회의원 피살 사건에 휘말려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쫓기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에셜론의 가공할만한 정보수집 능력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는데, 그 이후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공상과학이 아니라 대부분 가능한 사실이라는 정보기관 관련자들의 증언이 잇달아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보호 받지 못하는 개인 사생활>
인공위성 등장 이전에는 주로 유선통신이 도청이나 감청의 대상이었지만 위성통신이 발달하면서 에셜론이 감청의 주역으로 떠올랐다면 오늘날과 같은 광범위한 인터넷 시대의 통신망을 통한 스파이 행위는 어떻게 이뤄질까?
그 해답은 바로 ‘프리즘(Prism)’이라는 것으로 역시 미국 국가안보국(NSA)에 의해 운영되는 프리즘은 에셜론의 IT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9.11 사건이 벌어진 이후인 지난 2007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프리즘은 인터넷과 각 통신회사의 중앙 서버에 접속해 사용자의 정보를 수집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특히 각 나라의 인터넷 네트워크가 지금처럼 발전한 현재와 달리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초기에는 대부분의 트래픽이 미국이나 영국을 경유했기 때문에 NSA는 비교적 아주 수월하게 이 같은 감청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NSA는 프리즘을 이용해 구글이나 페이스북, 야후 등의 주요 서버에 연결한 뒤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주고 받은 이메일은 물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한 소소한 잡담이나 정보교환 등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까지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9.11이후에는 특히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등에서 테러와 조금이라도 연결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감한 단어, 예를 들면 ‘테러’나 ‘자살폭탄’ 등과 같은 단어가 뜨면 프리즘을 통해 이를 알아낸 NSA가 즉각 추적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NSA는 개인의 신상정보는 물론 거주지, 직업, 접촉자들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여기에 앞서 이야기한 에셜론까지 의심 가는 인물에 대한 감시에 동참하면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정보기관에 쫓기는 인물이 되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암호나 방화벽을 뚫는 시스템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스노든이 뉴질랜드 정부가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던 ‘엑스키스코어(XKeyscore)’로, 이를 사용하면 조사 대상자의 인터넷 이용 기록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 등 프리즘으로 수집했던 내용을 데이터베이스화까지 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같은 환경에서 뉴질랜드는 지리적으로 외부로부터 멀리 고립된 국가라 인터넷이나 통신망을 감청하는 경우 국내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네트워크의 길목만 지키면 돼 전자장비를 이용한 정보 활동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평가이다.
위와 같은 상황들은 최근까지 이어지는 헐리웃의 첩보 영화들에 하도 많이 등장, 일반인들이야 그저 먼 나라 일이자 영화 속 이야기일 뿐 내 일은 아니라는 입장에서 별로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면역된 상태인데, 그러나 어떠한 연유로든 만약 주인공이 자신이 된다는 상상이라도 해본다면 그야말로 끔직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또 한가지 문제점은 테러 예방과 같은 보안 차원을 넘어 자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산업정보의 정탐에도 이와 같은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흔히 이용된다는 말이 많은데, 이는 군사 분야 못지 않게 정보가 중요시되는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극심한 경제 전쟁에 나서고 있는 국가는 물론 일반 기업체들에게도 달가운 일은 아니다.
<연이어 폭로되는 스파이 활동>
그런데 최근 들어 에셜론이나 프리즘과 같은 스파이 네트워크가 내부자나 또는 외부 협력자들의 연이은 폭로로 그 실상이 상당 부분 까발려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서로 동맹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국가 간의 갈등은 물론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13년 6월 미국 국가보안국과 중앙정보국(CIA)에서 컴퓨터 기술자로 근무했던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Joseph Snowden)의 폭로는 한 동안 전 세계 뉴스 화면을 장식하면서 여러 나라들을 들끓게 했다.
당시 영국 가디언지를 통해 스노든은, 자신의 폭로가 대중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대중의 반대편에 있는 일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지칭하면서, 미국 내 통화 감청 기록과 프리즘 프로그램 등 NSA의 다양한 기밀문서를 공개했다.
당시 미국은 그를 ‘배신자’라면서 간첩 혐의로 체포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연이어 폭로된 내용은 일반인은 물론 정상급 정계 인물들까지 충격에 빠트렸는데, 폭로 내용 중에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개인 휴대폰까지 감청했다는 사실이 포함돼 독일 정부를 발끈하게 만들었으며 일설에는 메르켈 총리가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이 기밀문서를 건네 받아 가디언지에 보도했던 글렌 그린왈드 기자는 금년 5월에 세계 24개 국가에서 동시에 발간된 ‘No Place to Hide(더 이상 숨을 곳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스노든과의 만남과 폭로 과정을 밝히고 주류 언론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았었다.
현재 미국에는 중앙정보국을 비롯 각 군 정보기관 등 모두 16개의 정보기관이 존재하는데 그 중 에셜론과 프리즘을 운영하는 국가안보국은 2~4만이라는 막대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존재 자체가 비밀에 싸여 기관 별명이 아예 ‘그런 기관 없다(No Such Agency)’라고 한다.
다른 여타 정보기관들이 첩보원 등 인력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휴민트(HUMINT·Human Intelligence)’ 정보 임무를 수행한다면 NSA는 위성과 같은 첨단 장치는 물론 각종 전자장비를 사용하는 ‘시진트(SIGINT·Signal Intelligence)’ 첩보 활동을 주로 하는 이 분야 대표적인 정보기관인데 통신수단 등이 갈수록 첨단화하면서 그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평범한 일반인들마저 국가기관에 의해 일상생활이 낱낱이 공개된다는 사실은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의 등장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테러나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제도이던지 그 본래 목적에 부합되게 운영되면 약이 되는 일도 일탈하거나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점 역시 동서고금의 역사적 진리라는 것을 특히 큰 권력을 가진 이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남섬지국장 서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