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움츠렸던 나무와 풀이 생기를 찾고 새순이 돋아나면서 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면서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매일 아침이면 기온이 영하 가까이 떨어지는 꽃샘추위도 종종 닥치지만 한낮이면 따사로운 햇살이 졸음마저 부르는 계절이다.
이 무렵이면 정원에 심을 꽃과 식물을 사러 가든 센터를 찾는 이의 발걸음이 부쩍 늘고 그중 많은 이가 정원을 새로 덮을 ‘포팅 믹스(potting mix)’를 구입하기도 한다.
그런데 올해도 빠짐없이 가드닝을 하려는 이들에게는 ‘레지오넬라병(Legionnaires disease)’을 조심하라는 보건 당국과 지방자치단체의 주의보가 내려졌다.
이 무렵이면 언론에서도 이를 꼭 전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레지오넬라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질병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지를 알아본다.
▲ 크라이스트처치의 ‘모나 베일 가든’
<한국에서는 ‘재향군인(회)병’으로 불리는 ‘레지오넬라병’>
‘레지오넬라병’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한국에서는 흔히 ‘재향군인(회)병’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런 특이한 이름이 붙은 데는 사연이 있다.
앞부분의 ‘레지온(legion)’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군대’ 또는 ‘군단’, ‘집단’을 뜻하는데 특히 옛날 이는 이른바 ‘로마 군단’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흔히 영화로 많이 접하는 프랑스 ‘외인부대’를 영어로는 ‘The Foreign Legion’이라고 하며, 1802년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제정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Order de la legion d’honneur)’ 역시 여기에서 비롯됐다.
한편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재향군인회’를 ‘The British 또는 American Legion’이라고 표기하며 ‘레지오네어(legionnaire)’는 ‘재향군인회 회원’을 의미한다.
반면에 한국은 재향군인을 ‘베테랑(veteran)’으로 달리 표기해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의 정식 영어 명칭은 ‘Korea Veterans Association’이다.
뉴질랜드에서도 참전용사를 ‘베테랑’으로 부르기도 하며 한국전 참전용사는 특별히 ‘K-force Vetera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레지오넬라병이 이처럼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된 배경에는 ‘미국재향군인회’가 열었던 큰 행사가 자리하고 있다.
▲ 재향군인회 총회가 열렸던 ‘벨뷰 스트랫퍼드 호텔’의 현재 모습
<갑자기 쓰러진 노병과 가족들>
1976년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벨뷰 스트랫퍼드(Bellevue-Stratford) 호텔’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1904년 문을 연 이 호텔은 객실이 1,900개나 되고 직원만 700여 명에 달하는 최고급 호텔로 루스벨트와 레이건 등 역대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캐서린 헵번 등 명사들도 자주 찾은 호텔이다.
당시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독립 선언의 본고장인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재향군인회 ‘총회(convention)’에는 전국에서 회원과 가족 등 4,40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그런데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지던 중 뜻밖에도 여러 명이 고열과 기침 증상을 보이면서 폐렴으로 잇달아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의료진은 처음에는 연로한 제대군인들이 장거리 여행으로 무리해 폐렴에 걸린 것으로 추정했지만 환자 중에는 30대와 함께 호텔 직원이나 이곳에 물품을 공급하던 트럭 기사도 포함됐다.
이후 행사를 마치고 귀가한 이들 중에서도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하고 7월 30일에 첫 사망자가 나온 후 6일 만에 25명이 사망하면서 미국 보건 당국인 ‘질병관리본부(Centers for Disease Control, CDC)’에는 비상이 걸렸다.
총회 시작부터 2주 후에는 149명이 같은 증상으로 앓기 시작한 이후 전국에서 211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그중 16%가 넘는 34명이 사망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참가자들이 광대한 지역으로 흩어진 이후라 보건 당국은 처음에는 사태가 집단 발병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1918년에 5,0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나 ‘돼지 독감(swine flu)’과 증상이 유사하다는 점 외에는 질병을 일으킨 특정한 바이러스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원인은 미궁에 빠졌다.
전국으로 퍼질 거라는 공포심이 미국을 휩쓸면서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일부에서는 중앙정보부(CIA)가 생물학 무기를 연구 중 퍼트렸다는 음모론과 함께 이를 비난하는 시위까지 벌어졌다.
급기야 8월에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긴급조치 법률안에 서명하고 CDC가 주정부에서 인력을 지원받아 대규모 역학조사에 나서면서 환자 동선이 재향군인회 모임과 겹친다는 점을 알아냈다.
▲ 레지오넬라 병원균
<원인은 바이러스가 아닌 박테리아>
CDC는 환자 가검물에서도 바이러스를 찾지 못했지만 가검물이 든 배양접시에 일단 ‘재향군인병’이라는 라벨을 붙였는데, 당시 연구자들은 독감 바이러스를 찾아내려 애썼다.
결국 집단 발병 후 반년가량이나 지난 1977년 1월에야 사망자 폐에 있던 병원균을 호텔 맨 꼭대기인 19층의 에어컨 냉각수에서 찾고 정체를 파악하면서 원인을 밝힐 수 있었다.
당시 CDC는 이 병원균이 매우 특이한 박테리아(세균)이며 또한 특이한 배양 환경에서만 자라는 균이라는 사실도 함께 밝혀냈다.
또한 1957년 미네소타의 한 정육 공장에서 78명이 사망한 사건과 1965년에는 워싱턴 DC의 한 병원에서 81명이 집단 감염돼 14명이 숨진 사건도 이 박테리아가 원인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했다.
이는 건물 에어컨 시설이나 이에 딸린 냉각수 탑의 냉각수, 또는 수도꼭지 등에 흔하던 균이었고 물 분자 형태로 공기 중을 떠돌다 사람이 들이마시면 폐로 들어가 폐렴을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적기에 치료 안 하면 치사율이 20%에 이르는데, 재향군인 모임이 있은 몇 년 뒤 해당 병원균 이름이 공식적으로 ‘레지오넬라 뉴모필라(Legionella pneumophila)’로 정해졌다.
그중 ‘레지오넬라’는 미국재향군인회 명인 ‘American Legion’에서, 그리고 뒷부분은 ‘공기 또는 폐’를 뜻하는 ‘뉴모(pneumo)’와 ‘좋아한다’는 의미의 ‘필라(phila)’를 합성했다.
이후 후속 연구 결과 ‘레지오넬라병’은 50개 균이 속한 ‘레지오넬라균속(Legionella spp.)’에 속한 세균종들이 일으키는 감염병을 의미하게 됐다.
그중 대부분이 앞서 언급된 ‘레지오넬라 뉴모필라’ 병원균이 일으키며 ‘폐렴형’과 ‘독감형’으로 나뉘는데, 그중 ‘독감형’은 ‘폰티악 열(Pontiac fever)’로, 그리고 ‘폐렴형’은 ‘재향군인병’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질병의 발원지였던 벨뷰 스트랫퍼드 호텔은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진 끝에 결국 1976년 11월에 문을 닫았다가 이후 몇몇 다른 소유주를 거친 뒤 현재는 아파트와 사무실 등 복합시설 건물로 이용하면서 그중 일부 층은 올해 11월부터 다시 호텔로 사용될 예정이다.
▲ 레지오넬라병 주요 증상
<재향군인병보다 먼저 나타났던 ‘폰티악 열’>
한편 ‘폰티악’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근교 도시인데 이곳에는 ‘제너럴 모터스(GM)’ 자동차 공장이 있으며 GM의 유명 브랜드 중 하나인 ‘폰티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재향군인 총회보다 8년 앞선 1968년에 이곳의 한 건물에서 일하던 100명 중 95명이 갑자기 원인불명의 고열과 설사, 구토와 가슴 통증을 앓기 시작했다.
집단 발병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모른 채 일단 ‘폰티악 열’로만 불리던 이 병 역시 나중에 레지오넬라균이 발견된 후 환자의 혈액을 조사한 끝에 그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당시 환자들은 같은 에어컨에서 나온 공기를 마셨으며 다행히도 독감처럼 앓고만 지나갔는데, 이는 레지오넬라균에 감염되면 종류에 따라 독감처럼 한바탕 앓고 지나가거나 재향군인병처럼 심각한 폐렴으로 번져 죽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폰티악 열’은 호흡 곤란, 기침 증상보다는 두통, 근육통, 구토 등의 증상이 많은 반면 폐렴형은 호흡 곤란과 기침 증상이 심하고 치사율도 훨씬 높다.
위의 사례처럼 레지오넬라병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도 에어컨 냉각수 탑과 같은 공용건물의 공조 장치 등을 통해 집단으로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1984년 7월에 서울 고려대병원에서 중환자 및 의료진 26명 중 23명에게 집단 폐렴이 발생하면서 처음 알려졌으며 지금도 매년 환자가 늘고 있는데, 이에 따라 각국 보건 당국은 특히 여름 무렵이면 에어컨 냉각수 탑 등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적용해 관리에 나선다.
코비드-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 7월에도 서울 강남의 한 클럽에서 발병이 확인돼 일명 ‘강남 역병’으로 불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는데, 레지오넬라병은 보통 사람 간에는 전염되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역사가 158년이나 되고 일왕도 다녀간 적이 있는 유명 료칸인 ‘다이마루 별장’이 한 해 두 번만 온천수를 교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레지오넬라균이 기준치의 3,700배나 검출되면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균은 수영장을 포함해 스파나 가습기, 호흡기 질병 치료기나 가정의 샤워기와 수도꼭지는 물론 실내에 놓인 장식용 분수와 심지어는 차창을 닦는 워셔액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흔하다.
실제로 지금도 뉴질랜드 전국의 공공 수영장이나 스파에서 이 균이 발견됐다면서 몇 주 동안 문을 닫는 경우가 흔히 벌어지고 있다.
▲ 가든 센터에 진열된 ‘포팅 믹스’
<정원 작업 주의와 함께 온수실린더도 60°C 이상 유지해야>
그런데 문제는 레지오넬라균이 물이 있는 곳에 주로 살지만 흙에도 많다는 점인데, 특히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뉴질랜드에서는 더 큰 문제로 등장하고는 한다.
이 무렵이면 정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른바 ‘포팅 믹스(potting mix)’나 ‘퇴비(compost)’ 봉투 안에서 날씨가 따뜻해지면 왕성하게 번식하다가 공기를 통해 사람에게 옮겨진다.
2019년에 언론에서는 뉴질랜드가 발병률이 세계 최고라면서, 뉴질랜드는 ‘세계의 레지오넬라 수도(Legionnaires’ capital of the world)’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주로 에어컨 냉각수 등에서 발견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뉴질랜드는 이 병 환자 중 2/3가 토양과 관련된 작업에서 비롯되며 이런 경향은 호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보도는 당시 오타고대학에서 레지오넬라병과 관련해 처음으로 국가적으로 실시했던 연구에서 기존 폐렴 환자 중 레지오넬라균에 의한 발병 사례가 종전까지 알려졌던 것에 비해 3배나 더 많이 확인되면서 나왔다.
당시 데이비드 머독(David Murdoch) 교수 연구팀은 2015년 5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전국의 20개 병원에 입원했던 폐렴 환자 중 238명의 폐에서 레지오넬라균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발병률이 인구 10만 명당 5.4명으로 세계 최고였는데, 특히 병균 중 63%가 토양에서 발견되는 ‘레지오넬라 롱비채 변종(Legionella longbeachae strain)’이었다.
이는 결국 많은 사람이 흙과 관련된 작업 중 감염됐음을 뜻하며 뉴질랜드의 발병률이 아주 높은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통계였다.
또한 환자 중 65세 이상이 60%였고 진단 후 90일 안에 15명이 사망했으며 38명은 회복하기는 했지만 집중치료실 치료를 받아야만 했고 입원 환자 중 2/3가 겨울과 봄철에 발병했다.
한편 폐렴 환자 중 더 많은 숫자가 레지오넬라로 인해 발병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가운데 지역별 통계도 종전과는 조금 달리 나왔다.
베이 오브 플렌티에서 인구 10만 명당 8명 이상이었고 혹스 베이와 와이테마타가 6~8명이었던 반면 종전까지 가장 높다고 추정됐던 캔터베리는 이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보도가 나오던 당시 크라이스트처치 가든 센터에 일을 시작했던 한 40대 남성은 3주 만에 이 병으로 16일 동안이나 ‘혼수상태(coma)’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 그는 독감 증세(flu-like symptoms)를 보였지만 4일째 호흡 곤란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생명유지 장치가 있는 오클랜드 병원으로 급히 옮겨야만 했다.
그는 ‘집중치료실(intensive care unit, ICU)’에서 항생제를 투여받으며 사경을 헤맨 끝에 회복됐지만 이후 여러 달 동안 버우드 병원에서 재활치료까지 받아야 했는데, 그는 오물이나 헛간을 치우면서 마스크나 장갑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으며 의사들은 그때 균에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사건은 산업안전 담당 기관인 ‘워크세이프(WorkSafe)’에도 통보되고 기관 측에서는 이후 관련 사업장에서 직원들에게 안전 장비를 지급하고 교육도 하도록 조치했다.
올해 들어서도 캔터베리에서만 22건 이상의 레지오넬라병 환자가 발생했는데 주로 포팅 믹스와 같은 토양 제품으로 인해 감염됐다.
하지만 일부는 집의 온수 시스템에서 사는 레지오넬라균으로 인해 발생했는데, 몇 년 전 호크스 베이에서 발생한 한 환자의 집에 설치된 온수 실린더 수온을 측정한 결과 52°C에 불과했다.
당시 보건 전문가는 환자가 심각한 패혈성 쇼크로 한 달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면서, 레지오넬라균은 60°C 이상 물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만큼 전기를 아끼려고 온도를 낮춰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에너지 관련 기관은 온수기 온도를 60°C로 설정해도 수도꼭지에 도달하기 전에 온도가 5°C 정도 떨어지기 때문에 화상을 입지는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레지오넬라병의 정확한 감염 사례와 사망자 집계는 어렵지만 유럽연합(EU)에서는 매년 약 7,000건 이상, 미국에서는 약 1만 건 이상이 보고되는데, 전 세계에서 매년 수만 건의 감염 사례와 함께 사망률은 약 5%에서 10%로 보고 되며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다.
▲ 정원 작업에서 레지오넬라병을 예방하는 방법
<독감 증세와 유사한 레지오넬라병>
레지오넬라병은 대체로 초기 증상이 숨이 가쁘고 마른기침과 함께 39~40.5°C에 이르는 고열과 오한이 나며 두통과 근육통, 설사 등으로 독감과 증상이 매우 비슷하다.
이런 까닭으로 발병 초기에 폐 깊숙한 곳에 숨은 균을 제대로 확인 못 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자주 있으며 특히 폰티악 열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이 질병은 ‘파상풍(Tetanus)’이나 독감처럼 백신 대처도 안 되는데, 50세 이상이나 흡연자, 만성폐질환자, 암환자 및 면역억제 요법 중인 사람, 그리고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 많이 발병한다.
이에 따라 보건 당국은 포팅 믹스나 퇴비 작업 시 환기가 잘 되는 밖에서 하고 봉투는 가위로 조심스럽게 개봉하고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며, 또한 퇴비나 포팅 믹스 혼합물을 살포한 후에는 물을 충분히 뿌리고 작업 후에는 손을 철저히 씻도록 당부했다.
또한 이와 같은 작업 후에 만약 플루 증상이 보이면 의료진을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일을 상세히 알려 치료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