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최고기온이 30C까지 올라가면서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즈음이면
매년 뉴질랜드 언론들에 등장하는 뉴스가 하나 있다.
정원작업에 나설 때 ‘레지오넬라증 질병(Legionnaires disease)’을 조심하라는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본지에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리면 많은 독자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곤 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이름도 독특한 ‘레지오넬라증 질병’을 소개한다.
독특한 이름이 탄생한 배경은?
‘레지오넬라증 질병’은 한국에서는 흔히 ‘재향군인병’ 이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는 사연이 깊다.
우선 단어 앞 부분의 ‘레지온(legion)’ 이라는 부분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군대’ 또는 ‘군단’, ‘집단’ 등을 뜻하는데 특히 옛날 이른바 ‘로마 군단’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화 등을 통해 많이 접했던 프랑스의 ‘외인부대’를 영어로는 ‘The Foreign Legion’ 이라고 하며, 1802년에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제정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 명칭인 ‘레지옹 도뇌르(Order de la legion d’honneur)’역시 여기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한편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자국의 ‘재향군인회’를 ‘The British or American Legion’ 이라고 표기하며 ‘리저네어(legionnaire)’는 ‘재향군인회 회원’을 의미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재향군인을 ‘베테랑(veteran)’으로 달리 표기해 ‘대한민국재향군인회’의 정식 영어 명칭은 ‘Korea Veterans Association’이다.
그런데 레지오넬라증 질병이 이처럼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된 배경에는 ‘미국재향군인회’가 개최한 한 행사가 자리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으로 쓰러진 노병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더 전인 지난 1976년 7월 21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벨뷰 스트래퍼드(Bellevue-Stratford) 호텔’ 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독립 선언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재향군인회 총회(convention)’였다.
회원과 가족 등 모두 44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참석해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지던 중 뜻밖에도 참가자 여러 명이 고열과 기침 증상을 보이면서 폐렴으로 잇달아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주최 측이나 의료진은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제대군인들이 장거리 여행으로 무리해 폐렴에 걸린 것으로 추정했지만 환자들 중에는 30대와 함께 호텔 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행사를 마치고 귀가한 이들 중에서도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하더니 총회가 개막했던 때부터 2주가 지난 시간에는 149명이 같은 증상으로 앓기 시작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모두 211명의 환자가 발생한 가운데 이 중 16%가 넘는 34명이나 되는 환자가 사망하는 사태로까지 커졌다.
그러나 이미 재향군인들이 광대한 지역으로 흩어진 이후 앓아눕다 보니 보건 당국은 처음에는 당시 사태가 집단 발병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집단 발병이라는 사실만 확인된 상태에서 폐렴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때문이었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 벨뷰 스트래퍼드(Bellevue-Stratford) 호텔 전경
집단 발병 반년 만에야 발견된 박테리아
보건 당국은 환자들에게서 얻은 가검물에서도 특별한 병원균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환자들의 가검물이 든 배양접시에는 일단 ‘재향군인병’ 이라는 라벨이 붙여졌다.
당시 연구자들은 독감을 의심해 바이러스를 찾아내려 애썼는데, 그러나 결국 집단 발병 후 반년가량이나 지난 1977년 1월에서야 병원의 에어컨 냉각수에서 찾아낸 병원균의 정체가 파악되면서 그 원인이 밝혀졌다.
당시 미국 ‘질병관리본부(Centers for Disease Control, CDC)’는 이 병원균이 매우 특이한 박테리아(세균)이며 또한 특이한 배양 환경에서만 자라는 균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세균은 호텔이나 대형 건물의 에어컨 시설이나 이에 딸린 냉각수탑 안의 냉각수, 또는 수도꼭지 등에 흔히 있던 균이었고 물분자 형태로 공기 중을 떠돌다 사람이 들이마시면 폐로 들어가 폐렴을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적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치사율이 20%에 이르기도 했는데 재향군인들의 모임이 있은 몇 년 뒤에 해당 병원균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레지오넬라 뉴모필라(Legionella pneumophila)’로 정해졌다.
명칭 중 ‘레지오넬라(Legionella)’는 미국재향군인협회 ‘American Legion’ 중에서, 그리고 뒷부분은‘공기 또는 폐’를 뜻하는 ‘뉴모(pneumo)’와 ‘좋아한다’는 의미의 ‘필라(phila)’가 합성된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연구 결과 ‘레지오넬라증 질병’은 50개의 균이 속해 있는 ‘레지오넬라균속(Legionella spp.)’에 속한 세균종들이 일으키는 감염병을 의미하게 됐다.
이 감염병들 중 대부분이 앞서 언급된 ‘레지오넬라 뉴모필라(Legionella pneumophila)’ 병원균이 일으키는데 레지오넬라증 질병은 ‘폐렴형’과 ‘독감형’ 으로 나뉜다.
그중 ‘독감형’은 ‘폰티악 열(Pontiac fever)’로 그리고 ‘폐렴형’은 ‘재향군인병(Legionnaire’s disease)’으로 각각 알려져 있다.
▲ 최초로 레지오넬라 병원균을 분리해낸 CDC의 조지 고만(George Gorman)과 짐 필리(Dr. Jim Feeley) 박사
재향군인병보다 먼저 나타났던 '폰티악 열'
‘폰티악’은 미국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 근교의 도시인데, 이곳에는 제너럴모터스(GM) 자동차 공장이 있으며 GM의 유명 브랜드 중 하나인 ‘폰티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재향군인 모임에서 환자가 발생하기 8년 전인 1968년에 이 도시의 한 건물에서 일하던 100명의 사람들 중 95명이 갑자기 원인불명의 고열, 설사, 구토, 가슴 통증을 앓기 시작했다.
집단 발병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모른 채 일단 ‘폰티악 열’로만 불리던 이 병 역시 나중에 레지오넬라 병원균이 발견된 후 당시 환자들의 혈액을 조사한 끝에 그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당시 폰티악 열의 환자들은 같은 건물의 에어컨을 통해 나온 공기를 마셨던 사람들이었는데, 다행히도 환자들은 독감처럼 병을 앓고 지나갔다.
이는 레지오넬라 뉴모필라균에 감염되었더라도 종류에 따라 독감처럼 한바탕 앓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재향군인들처럼 심각한 폐렴으로 번져 사망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폰티악 열은 호흡 곤란, 기침 증상보다는 두통, 근육통, 구토 등의 증상이 많은 반면 폐렴형은 폰티악 열에 비해 호흡 곤란과 기침 등의 증상이 심하고 치사율도 훨씬 높다.
위의 사례처럼 레지오넬라증 질병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도 에어컨 냉각수탑과 같은 공용건물의 공기 조절 장치 등을 통해 집단으로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1984년 7월에 서울 고려대병원에서 중환자 및 중환자실 근무 의료진 26명 중 23명에게 집단 폐렴이 발생하면서 알려졌는데, 금년 상반기에만 176명이 발병하는 등 매년 환자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에 따라 각국의 보건 당국들은 특히 여름이 될 무렵이면 에어컨 냉각수탑 등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적용해 관리에 나서곤 한다.
그러나 이 균은 수영장을 포함한 스파나 가습기, 호흡기 질병 치료기나 샤워기와 수도꼭지는 물론 실내에 놓인 장식용 분수와 심지어는 차량 유리창을 닦는 워셔액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흔하다.
흙에서도 번식하는 병원균
그런데 레지오넬라 박테리아가 하천이나 호수, 냉각수탑 등 자연이나 인공을 가리지 않고 물이 있는 곳에서 많이 서식하기는 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흙과 관련된 곳에도 많다는 점이 특히 문제이다.
그러다보니 정원작업 시 흔히 사용하는 이른바 ‘포팅 믹스(potting mix)’나 ‘퇴비(compost)’ 봉투 안에서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왕성하게 번식하다가 공기를 통해 사람에게 옮겨진다.
작년 9월에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가든 센터에서 근무 중이던 41세의 한 남성이 레지오넬라증 질병으로 16일 동안이나 혼수상태(coma)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는 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3주 만에 발병했는데, 처음에는 독감 증세(flu-like symptoms)로 아프기 시작했지만 발병 4일째 호흡 곤란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생명유지 장치가 있는 오클랜드 병원으로 옮겨져야 했다.
유지장치를 제거하면 죽을 수도 있었던 그는 ‘집중치료실(intensive care unit, ICU)’ 에서 항생제를 투여받으면서 사경을 헤맨 끝에 회복됐는데, 그러나 이후 여러 달에 걸쳐 버우드(Burwood) 병원에서 재활치료까지 받아야만 했었다.
그는 오물이나 헛간 등을 치우는 작업을 하면서 마스크나 장갑 등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는데 의사들은 그 때 레지오넬라 균에 의해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사건은 산업안전 담당 기관인 ‘워크세이프(WorkSafe) ’에도 통보가 됐으며, 기관 측에서는 이후 관련 사업장에서 직원들에게 안전장비를 지급하고 교육도 시키도록 조치했다.
▲ 레지오넬라 뉴모필라균
뉴질랜드는 '레지오넬라의 수도'?
한편 지난 6월에 나온 연구 결과를 인용한 국내 언론들은, 뉴질랜드가 해당 질병의 발병률에서 세계 최고로 나타나 이른바 ‘세계의 레지오넬라 수도(Legionnaires’ capital of the world)’가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오타고 대학에서 진행했던 당시 연구는 레지오넬라증 질병과 관련돼 국가적으로 실시된 첫 번째 연구였는데, 이에 따르면 기존 폐렴 환자들 중 레지오넬라 균에 의한 발병 사례가 종전까지 알려졌던 것에 비해 3배나 더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주도한 데이비드 머독(David Murdoch) 교수에 따르면, 2015년 5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전국의 20개 병원에 입원했던 폐렴 환자들 중 238명의 폐에서 레지오넬라 균이 발견됐다.
발병률은 인구 10만명당 5.4명으로 세계 최고를 기록했는데, 특히 이들 병균 중 63%가 토양에서 발견되는 ‘레지오넬라 롱비채 변종(Legionella longbeachae strain)’이었다.
이는 결국 흙과 관련된 작업을 하던 중 다수가 감염됐음을 뜻하며 뉴질랜드에서 발병률이 높은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통계이다.
또한 이들 환자들 중 65세 이상이 60%였고 진단을 받은 지 90일 안에 15명이 사망했으며 38명은 회복하기는 했으나 집중치료실 치료를 받아아만 했고 입원 환자들 중 2/3가 겨울과 봄철에 발병했다.
한편 폐렴 환자들 중 더 많은 숫자가 레지오넬라로 인해 발병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가운데 지역별 통계도 종전과는 조금 달리 나왔다.
베이 오브 플렌티 보건위원회 산하 지역에서 인구 10만명당 8명 이상으로 나타났으며, 호크스 베이와 와이테마타가 6~8명였던 반면에 종전까지 가장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던 캔터베리는 이들 지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미국 질병통제관리본부 통계를 보면 2015년 미국에서 연간 5000명의 환자가 발생해 대부분 병원 치료로 회복됐지만 1/10가량이 사망했는데, 2000년에서 2014년 사이에 환자가 4배 증가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환자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 레지오넬라증 질병의 증상
독감 증세와 유사한 레지오넬라
레지오넬라증 질병은 대체로 초기 증상이 숨이 가빠지고 마른 기침과 함께 39~40.5C에 이르는 고열과 오한이 나며 두통과 근육통, 설사 등이 동반돼 독감(인플루엔자) 증상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까닭으로 발병 초기에 폐 깊숙한 부위에 잠복한 박테리아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함으로써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자주 있으며 특히 폰티악 열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이 질병은 ‘파상풍(Tetanus)’ 이나 독감처럼 미리 백신을 접종해 대처할 수도 없는데, 50세 이상이나 흡연자, 만성폐질환자, 암환자 및 면역억제요법 중인 사람, 그리고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보건 전문가들은 정원에서 포팅 믹스나 퇴비 작업을 할 때는, 실내가 아닌 환기가 잘 되는 밖에서 하며 봉투는 조심스럽게 개봉하고 장갑과 마스크를 이용하고 또한 퇴비나 포팅 믹스 혼합물을 살포한 다음에는 물을 충분히 뿌려주고 작업 후에는 손을 철저히 씻도록 당부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작업을 한 후에 만약 플루 증상이 나타나면 의료진에게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일을 상세히 알려 치료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다.
남섬지국장 서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