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는 지난 1984년 자국을 방문하는 미국 군함에 대해 핵무기 적재 여부를 밝히도록 요구하는 핵 금지 이후 국제 외교무대에서 자주 외교 노선을 비교적 잘 유지해 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무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인지한 뉴질랜드는 2008년 서방 선진국 가운데 처음으로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이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17년 10월 들어선 노동당 연립정부 이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통적인 우방 동맹국인 미국과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서로 패권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의 외교력이 또 한번 시험받고 있다.
노동당 정부 출범 이후 소원해진 중국 관계
뉴질랜드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부인하고 있지만 그 징후는 여러 가지 사건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중국이 자신다 아던(Jacinda Ardern) 총리의 중국 공식방문 초청을 무기한 연기하고 있다.
아던 총리는 올해 초 중국을 공식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중국은 아직도 초청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달 웰링턴 테 파파 박물관에서 2019년 중국-뉴질랜드 관광의 해를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었지만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연기 요청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행사는 관광장관이기도 했던 존 키(John Key) 전 총리의 재임 시절 발표됐던 것이었다.
윈스턴 피터스(Winston Peters) 외교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 “키 전 총리가 일만 만들어놓고 떠나갔다”며 현 정부와 이 행사 간에 거리를 두면서 “중국과 뉴질랜드 간의 관계는 훌륭하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9일에는 27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오클랜드를 출발해 중국 상하이로 향하던 에어뉴질랜드 여객기가 착륙 허가를 받지 못해 비행 4시간 후 돌연 회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사건은 에어뉴질랜드의 착륙신청 서류에 대만을 독립된 국가처럼 표기한 이유에서라고 알려졌지만 이면에는 양국간 외교적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국민당 사이먼 브릿지스(Simon Bridges) 대표는 “이번 에어뉴질랜드 회항 사건은 현 정부와 중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라며 “피터스 외교장관이 양국 간의 지속적인 관계 악화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관계 경색 불러온 일련의 사건들
뉴질랜드는 지난해 11월 5세대(5G) 네트워크 구축에 중국 화웨이(Huawei) 제품 사용을 배제하며 미국 정부의 화웨이 보이콧에 동참했다.
정부통신보안국(GCSB)는 5G 네트워크 구축에 화웨이 장비를 이용하겠다는 스파크(Spark)의 신청을 보안상의 우려를 이유로 거부했다.
화웨이는 지난달 13일 ‘화웨이가 없는 5G는 뉴질랜드팀이 없는 럭비 경기와 같다’는 내용의 전면광고를 뉴질랜드 헤럴드지를 비롯한 주요 현지 신문에 일제히 실었다.
지난해 6월에는 중국이 남태평양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지역의 안정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해 중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피터스 장관은 지난해 12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남태평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미국이 더욱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취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동당 연립정부 출범 이후 중국에 대한 뉴질랜드의 외교정책이 약간 변화했다.
특히 3당 연립의 하나인 뉴질랜드제일(New Zealand First)당 출신 피터스와 론 마크(Ron Mark)가 각각 부총리 겸 외교장관과 국방장관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을 가능한 위협국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견해를 동조하고 있다.
뉴질랜드 정치권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연구하는 중국 전문가 앤-매리 브래디(Anne-Marie Brady) 캔터베리 대학 교수가 지난해 연이어 당한 테러 협박에 대한 수사도 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브래디 교수의 자택과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협박 편지를 남기는 등 배후에 중국 공산당 세력이 의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던 총리는 “배후에 해외 세력이 있다면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수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수사가 시작된 지 거의 1년만인 지난달 13일 경찰은 돌연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며 수사 종결을 발표했다.
관련 전문가들은 주거지 침입을 수사하는데 1년이나 소요된 경우도 없을뿐더러 1년 동안 조사하고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발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정치적 압력이나 초기 수사 실수 가능성을 제기했다.
브래디 교수는 “실망스럽다”고 털어놨고, 아던 총리는 “해외의 개입 존재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브래디 교수 사건에 대해 선을 그었다.
중국 경제 보복 무시할 수 없는 NZ 정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와 함께 중국의 사이버 공격 및 불법 정보수집 가능성에 대응하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라는 첩보 동맹을 맺고 있는 뉴질랜드지만 노동당 정부는 호주에 이어 제2의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급속도로 멀어진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뉴질랜드 경제에 타격이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무역 관련 사업 관계자들은 “업계에서는 양국 관계를 우려하고 있으며 수출 업체들이 어려움에 직면할 것” 이라고 우려했다.
빅토리아 대학 제이슨 영(Jason Young) 교수는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뉴질랜드에 상당히 위험한 일” 이라고 말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최근 화웨이와 관련한 보복 조치로 중국인들이 뉴질랜드 여행을 취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뉴질랜드를 방문한 해외 관광객은 약 380만명이고 이중 15% 이상이 중국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학업계에 따르면 중국인 유학생도 올해 들어 1,000명 이상 감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뉴질랜드 최대 고교 랑기토토 컬리지(Rangitoto College)의 패트릭 게일(Patrick Gale) 교장은 “우리 학교는 올해 71명의 중국인 학생이 등록했지만 10%가 취소했다”며 “이처럼 많이 취소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유학업학교협회(Sieba)는 지난해 중국인 유학생은 전체의 50-60%를 차지했는데 올해 들어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전했다.
객관적이고 치우침 없는 외교정책 필요
아던 총리는 지난달 18일 이례적인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불거졌던 중국과의 관계 악화설을 부인했다.
아던 총리는 이 자리에서 “뉴질랜드와 중국은 탄탄하고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2,800억달러 무역 규모, 기후변화 대책 및 과학 등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뉴질랜드 상품 수출 지연, 고위 당국자들의 중국 비자 지연 등의 언론 보도는 허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 정부가 뉴질랜드를 방문하는 중국인들에게 경고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지난해 뉴질랜드를 방문한 중국인은 7.3% 증가했으며 이들의 소비는 14% 증가했다”고 반박했다.
아던 총리는 “뉴질랜드와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사안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서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탄탄하고 성숙하며, 서로의 이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던 총리는 지난달 19일에는 “화웨이에 대해 우리는 영국과 비슷한 입장” 이라고 말했다.
즉 화웨이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다며 완전 퇴출은 불필요하다고 결론 내린 영국처럼 5G 사업에 화웨이를 완전히 배제한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화웨이를 쓰는 나라와는 동맹이 될 수 없다’는 미국의 경고에도 핵심 우방들이 등을 돌리면서, 미국 주도의 반(反)화웨이 전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최근처럼 뉴질랜드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당 정부는 장래 불필요한 외교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는 뉴질랜드 이익의 객관적이고 치우침 없는 평가에 기초한 외교적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