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지난해 7월 경선 후보로 나서면서 거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국의 대표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전면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해 무슬림들의 공분을 샀고, “멕시코는 문제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있다. 남쪽 국경에 거대한 벽을 쌓겠다”고 말해 대선후보답지 않다는 여론의 뭇매를 받았다. 트럼프 돌풍이 뉴질랜드 정가에도 불어서인지, 아니면 이민자가 너무 많이 들어와 이제 이민 빗장을 닫을 때가 다가왔는지 몰라도 이민에 비판적인 발언들이 뉴질랜드 정가에서 흘러 나오고 있다.
노동당 리틀 대표 “요리사 이민 제한해야”
지난해 오클랜드 집값 급등의 원인으로 중국인 구매자들을 겨냥한 발언을 해서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샀던 앤드류 리틀(Andrew Little) 노동당 대표가 이번에는 중국과 인도 출신 요리사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며 이들과 같은 반(半)숙련 기술이민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해 이민자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다시 드러냈다.
리틀 대표는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반숙련 이민자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특히 오클랜드 고용시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정부는 상황이 개선될 때까지 이민자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인 요리사들의 뉴질랜드 취업을 허용한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조항을 언급하며 “그러나 현실적으로 너무 많은 중국인 및 인도인 요리사들이 들어와 있어 요리사를 이민자에 의존하기 보다는 국내에서 확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노동당 정부 시절 체결된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 따라 매년 최대 200명의 중국인 요리사가 뉴질랜드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됐으나 200명이 모두 채워지는데 2008년부터 2011년 9월까지 3년이 걸렸다.
이에 대해 존 키(John Key) 총리는 “리틀 대표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 같다”며“뉴질랜드는 이민에 기초한 국가이며 다문화 사회이다”라고 강조했다.
요리 과정 교육기관을 수료한 기술이민 영주권 신청은 높은 영어 조건 때문에 영주권 취득이 어려워진 한국인을 비롯한 많은 아시안 이민자들에게 인기있는 과정이 된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민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6년간 88개국에서 9,996명이 요리사로 워크비자를 받아 그 가운데 38.9%인 3,885명이 영주권을 취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인이 2,378명의 워크비자와 1,032명의 영주권으로 가장 많고 인도인이 1,639명의 워크비자와 748명의 영주권으로 뒤를 이었다.
3위를 차지한 한국인은 1,060명이 요리사로 워크비자를 받고 일해 448명이 영주권을 취득하여 42.3%의 취득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식당 주인들은 뉴질랜드 안에서 마땅한 요리사를 구하지 못해 여전히 이민자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운트 마웅가누이(Mt Maunganui)에서 인도 식당을 운영하는 자틴더지트 싱 그레왈(Jatinderjit Singh Grewal)은 “지역에 사는 요리사를 채용하고 싶지만 적당한 후보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피터스 대표 “요리사 이민 관련 사기 횡행”
여론의 질타를 받은 리틀 대표가 지지표 이탈을 의식해서인지 발언 다음날 “다양한 인종의 요리사는 국가에 매우 중요하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정책으로 손대지 않을 것”이라며 입장을 바꾸자, 이번엔 반이민의 대명사 윈스턴 피터스(Winston Peters) 뉴질랜드퍼스트(New Zealand First)당 대표가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피터스 대표는 오클랜드 산드링햄(Sandringham) 로드와 도미니온(Dominion) 로드에 있는 식당들이 모두 순수한 식당들이라고 할 수 없고, 많은 식당들이 이민 사기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민자들이 상당한 뒷돈을 주고 불법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터스 대표는 “어떻게 그 거리의 모든 식당들이 영업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그들이 이민자들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뒷거래를 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이는 결국 잘못된 것이며 뉴질랜드의 국가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피터스 대표의 의혹 제기에 대해 이 지역 식당 주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산드링햄 로드에서 스리랑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라마니 알위스(Ramani Alwis)는 “이쪽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싸잡아 이민 사기꾼이라고 못박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라며 “우리는 식당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라고 맞받았다.
도미니온 로드에서 대만 식당을 운영하는 클라우디아 쳉(Claudia Cheng)은 “이민 사기는 도미니온 로드나 산드링햄 로드에서뿐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며 “피터스 대표가 이 두 지역만 걸고 나온 것은 불공평하다”고 지적했다.
산티야(Santhiya) 레스토랑의 유게스와리 수브라마니암(Yougeswari Subramaniam) 주인은 “나는 도미니온 로드에서 10년 이상 식당을 운영해 오고 있지만 이민 사기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피터스 대표에 보장한다”고 말했다.
‘도미니온 로드 비즈니스 협회’의 개리 홈즈(Gary Holmes) 회장은 “우리는 많은 자영업자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데, 그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비즈니스혁신고용부 대변인은 이민부 조사관들이 요식업계를 주시하고 있지만 피터스 대표가 언급한 지역에서 특이한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는 없으며 이민부는 언제든 제보가 들어오는 즉시 조사를 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뉴질랜드의 트럼프는 누구?
이번 일로 내년 총선에서 노동당 표가 상당히 깎일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졌다.
지난해 중국인들을 오클랜드 집값 급등의 원흉으로 지목해 홍역을 치렀던 리틀 대표가 또다시 중국인 및 인도인 요리사들을 들고 나와 반이민 정치인으로 낙인찍힌 때문이다.
한편 피터스 대표는 트럼프 대선후보와 가장 닮은 정치인으로 새삼 부각되고 있다.
국민당의 데이비드 베넷(David Bennett) 의원은 “피터스 대표는 뉴질랜드 정치계의 도널드 트럼프이다. 왜냐하면 그는 뉴질랜드 연안에 벽을 쌓고 싶어하기 때문이다”며 피터스 대표의 반이민 노선을 꼬집었다.
베넷 의원은 그러나 피터스 대표는 트럼프보다 높은 벽을 쌓지는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당의 크리스 핀라이슨(Chris Finlayson) 의원도 피터스 대표를 뉴질랜드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얘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피터스 대표가 저질스런 내용의 신문 헤드라인 주인공이 되고 싶어 안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와 비슷하다는 타이틀이 모욕이라고 인식되는 상황에서 리틀 대표를 포함한 노동당 필 타이포드(Phil Twyford), 국민당 크리스 비숍(Chris Bishop) 등 몇몇 의원들이 뉴질랜드 정치계의 트럼프로 거론되고 있지만 피터스 대표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피터스 대표가 트럼프보다 정치 경력이 휠씬 많은 점을 고려하여 트럼프가 미국의 피터스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다는 지적도 있다.
아시안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
뉴질랜드 정치권에서 아시안 이민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이 자주 나와서인지 몰라도 아시안 이민자들에 대한 뉴질랜드인들의 태도가 냉각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아시아뉴질랜드재단이 지난해 1,001명의 뉴질랜드인들을 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2015 뉴질랜드인의 아시아인과 아시아 국가에 대한 인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뉴질랜드인들의 대 아시아 관계에 대한 시각은 지난번 조사 때보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측면이 줄었고 아시아인에 대한 호감도도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조사는 지난 1997년부터 매년 시행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중국인과 인도인에 대한 따뜻한 감정은 100점 만점으로 했을 때 각각 64점으로 이전 조사 때보다 모두 4점씩 떨어졌다.
동남아 국가 사람들에 대한 좋은 감정도 65점으로 5점이나 떨어졌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66점으로 2점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69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일본인에 이어 두 번째 높은 점수였다. 일본인도 감소 폭은 4점으로 중국인이나 인도인과 같았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아시아인이나 아시아 문화와 어느 정도 관련을 맺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조사 대상자의 51%로 지난 1998년 30%와 비교할 때 많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뉴질랜드인들의 절반 정도는 아시아인들의 뉴질랜드 투자가 너무 많이 이루어지면서 뉴질랜드 집값 상승을 부채질했다는 인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뉴질랜드인 4명 중 1명은 아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인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진 것은 오클랜드 부동산 시장에 아시아 투자자들이 집값을 올렸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데다 언론보도도 다소 부정적이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와 관련, 에드위나 피오(Edwina Pio) AUT대학 교수는 뉴질랜드 매체들이 아시아인에 대해 보도할 때 폭넓게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오클랜드대학의 매닝 입(Manying Ip) 아시아학 교수는 뉴질랜드인들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아시아를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