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당국의 비자 정책이 자주 바뀌면서 뉴질랜드에 정착하려는 많은 이민자들이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등 뜻하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다. 이민 관련 단체들은 이민부의 정책이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임시비자 소지자들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선데이 스타 타임즈 지가 최근 보도한 사례를 중심으로 이민자들의 현실을 무시하는 이민 정책에 대해 알아 본다.
학생비자로 인도에서 온 디네쉬 사프라(Dinesh Sapra, 37세)는 그 동안 뉴질랜드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서 여기서 뿌리를 박으려고 했지만 8년이 지난 현재 비자가 만료되면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었다.
사프라는 지난 2016년 호스피탈리티 분야에 취업할 목적으로 비즈니스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학생비자로 뉴질랜드에 왔다.
2017년 과정을 마친 후 어떤 회사에도 취업할 수 있는 학업 후 워크비자를 받았다.
그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에 취직할 수 있었던 일도 그 무렵이었다.
2018년에서 2020년 사이 그는 비자를 ‘자격인증 고용주 워크비자(AEWV)’로 옮겼다.
AEWV는 비자 신청을 지원해 주는 고용주에만 취업이 허용된다.
사프라는 고용주를 바꾸기 위해서 비자 조건 변경을 신청했고 2019년 그의 다음 비자 신청 지원을 제공하는 세이코(Seiko)에 취직했다.
사프라는 그의 인생이 뉴질랜드에서 틀을 잡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0년 2월 시작된 팬데믹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해 4월 그는 다른 1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세이코에서 해직됐다.
고용주 없이 그의 AEWV는 갱신될 수 없었고 비자 만기가 가까워지면서 이민부에 전화를 걸어 뉴질랜드에 체류할 수 있는 조언을 구했다.
전화상의 이민부 직원은 관광비자를 제안했고, 사프라는 온라인 신청을 시작했으나 그의 여권이 3개월 안에 만료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관광비자 신청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이민부에 전화를 걸어서 같은 이민부 직원을 찾아 사정을 호소했다.
그는 절박한 심정에 울먹이기까지 하며 2시간 동안 그 이민부 직원에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과 장래 희망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사프라는 그 직원의 조언대로 이민법 61조에 따라 이민장관 또는 고위관리가 비자 만료되는 사람에게 승인해 주는 비자를 신청했다.
2020년 11월 그는 6개월 관광비자를 승인받아 뉴질랜드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지만 취업은 불가했다.
곧 생활비가 떨어지면서 그는 다시 이민부에 연락하여 수없이 똑같은 내용을 말했다.
이민부 측의 대답은 똑같았다.
‘계절직 고용 워크비자(SSE)’를 신청하라는 것이다.
사프라는 2021년 3월 SSE를 승인받아 농촌으로 내려가 아침에는 키위를 수확하고 밤에는 포장 작업을 했다.
이민부의 관료주의적 대응
2021년 6월 당시 크리스 파포이(Kris Faafoi) 이민장관은 SSE와 워킹홀리데이비자의 기간을 6개월 연장하고 인력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 걸쳐 취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자 기간이 연장되면서 사프라는 오클랜드로 돌아와 정신 건강을 제공하는 정부출연기관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코비드19 대응팀에서 일하면서 팬데믹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 천 명의 뉴질랜드인들과 이민자들의 전화에 응답했다.
사프라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연대감과 의무감을 느꼈고, 그 일을 좋아했다고 밝혔다.
그해 12월 그는 승진했고 비자 신청 지원이 가능한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다시 한번 희망감을 갖게 됐다.
그러나 팬데믹 제한이 완화되고 코비드19 대응팀에 대한 국고 지원이 중단되면서 사프라는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당국의 관료주의적 처리로 그의 삶이 다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을 겪었다.
그의 인생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사라지고 있는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사프라는 그를 도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민장관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파포이 장관 앞으로 “도움 구함”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냈다.
2주가 지나도록 답장이 없자 그는 다시 한번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메일을 발송했다.
그 다음날 아침 파포이 장관 사무실의 한 관료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이메일은 짜집기한 정형화된 내용이었다.
정부는 거주비자 자격 조건 개정을 검토하지 않고 있으며 거주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기술이민과 같은 다른 경로를 찾아볼 수 있으나, 기술이민은 2020년 3월 이후 신규 신청이 중단됐고 2022년 하반기까지 재개되지 않을 예정이라는 것.
사프라는 다시 한번 이민법 61조에 의거한 면제를 신청했으나 며칠 후 기각 판정을 받았다.
비자 기한이 만료되면서 불법으로 뉴질랜드에 살며 추방을 기다려야 했던 그는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방법으로 사프라는 이민 변호사를 고용하여 이민보호재판소에서 그의 사례를 검토하는 동안 추방 명령을 유예하도록 했다.
이민보호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기까지 8개월이 걸렸고, 그 동안 사프라의 우울증과 불안감은 극심해졌다.
취업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인도에 있는 가족과 뉴질랜드 친구들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작년 4월 이민보호재판소는 사프라에 직업을 구할 수 있는 6개월 기한의 워크비자를 승인했다.
작년 10월 비자 기간이 만료됐던 그는 정신적으로 지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구와 얘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이민자들에 대한 정부의 비인간적인 관점
녹색당 리카르도 메넨데즈 마치(Ricardo Menendez March) 의원은 사프라와 비슷한 사례들이 아주 흔하다고 전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특히 저소득 이주 근로자들의 영주권 취득 길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민자들이 영주권을 신청해보지도 못하고 뉴질랜드 생활을 끝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2년 유니텍에서 내놓은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비자 기한을 넘긴 뉴질랜드 체류 이민자들이 1만3,000~1만4,000명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 대다수는 현행법에 따라 영주권 취득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메넨데즈 마치 의원은 “이민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점은 경제적 단위이다”며 “이러한 인도주의 결핍은 이민제도를 변경할 때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실 수확일, 호스피탈리티, 양로원 간병일 등 보수는 낮지만 일손이 부족한 일자리는 흔히 임시 워크비자의 이민자들이 맡는데,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해도 영주권을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어떤 경로이든지 갑자기 봉쇄되고, 수 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주근로자협회 아누 카로티(Anu Kaloti) 회장은 비자 문제를 겪고 있는 이민자들의 고통은 재정적인 것 뿐아니라 정신적인 공포 속에 생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로티 회장은 “이민자들은 보통 학생비자로 뉴질랜드에 와서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한 경로를 밟는다”며 “그런데 기술이민 조건이 갑자기 강화되고 그들은 다시 학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전했다.
이민부의 정책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려는 이민자들의 뿌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넨데즈 마치 의원은 이민 제도에 대한 정책이 계속 바뀌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민 당국이 요건을 바꿀 때마다 이민자는 그 요건을 맞추기 위해 워크비자와 학생비자 간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민부 장관이 규정을 바꿀 때마다 많은 이민자들의 삶은 예상치 않게 뒤바뀌게 된다고 덧붙였다.
카로티 회장은 이와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첫 단계는 불법체류자를 사면하거나 공정한 영주권 경로를 시도할 수 있도록 최소한 일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이 뉴질랜드 경제에도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6년전 방글라데시에서 학생비자로 온 나피즈 아메드(Nafiz Ahmed, 28세)는 그동안 3만달러의 수업료를 쓰며 2개 디플로마 과정을 마쳤지만 아직도 워크비자로 체류하고 있다.
그는 “6년이 지났지만 가진 것이 없다”며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앞으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고 탄식했다.
메넨데즈 마치 의원은 이민자들에게 확실성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민자들이 3년 이상 뉴질랜드에 살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비자를 제안했다.
그는 여러 나라들이 이미 그와 비슷한 정책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이민 규제 카드 나올지 주시
이민자 수가 사상 최대로 늘면서 국민당 주도 연립정부가 호주처럼 이민 규제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10월말 기준 1년 동안 순이민자 수는 12만8,900명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2년 10월말 기준 연간 순이민자 수 100명에서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2022년 말부터 국경을 다시 개방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근로자 이민을 장려하면서 인구 증가세에 속도가 붙었다.
4만4,500명의 순유출을 보인 뉴질랜드 시민권자의 빈자리를 인도, 필리핀, 중국, 피지 출신등의 비시민권자들이 17만3,400명의 순유입으로 채웠다.
2002~2019년 10월말 기준 연간 평균 순이민자인 4만8,000명보다도 휠씬 높은 수준이다.
10월말 기준 입국 이민자수 24만5,600명도 사상 최대 규모였다.
ASB의 마크 스미스(Mark Smith) 이코노미스트는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몇 개월 안에 순이민자가 14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이민자 유입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수요 증가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재점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뉴질랜드처럼 이민자 증가를 겪고 있는 호주 정부는 지난달 2025년 6월까지 연간 이민자 수를 팬데믹 이전 수준인 25만 명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외국인 유학생과 저숙련 근로자에 대한 비자 규정도 강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영어시험 등급을 상향해 유학생 비자 발급 요건을 강화하고,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두 번째 비자를 신청할 경우 면밀히 조사한다는 것이다.
작년 6월까지 1년간 집계된 호주 이민자 수는 51만명이다.
지지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호주 노동당 정부는 최근 호주의 주거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민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일부 세력의 압력을 받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도 이미 급격한 이민자 유입 때문에 인프라와 주택 문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 정부가 이민 규제 카드를 들고 나올지 주목된다.
특히 국민당 주도 3당 연립정부에 전통적으로 이민에 대해 부정적인 뉴질랜드제일당이 포진하고 있어 향후 이민 정책 변화에 촉각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