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부터 남섬 북부 말버러 지방의 중심 도시인 ‘블레넘(Blenheim)’에서는, 2년 전 이 지역에서 발생했던 한 교통사고와 관련한 재판이 시작돼 국내 언론들은 물론 많은 주민들이 관심을 두고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는 사망자까지 나온 중대한 교통사고이기도 했지만 흔히 발생한 사고와는 달리 당시 자기 승용차를 도난당했던 차주가 해당 차량을 발견하고 다른 차량을 몰아 직접 그 뒤를 쫓아가다가 서로 충돌하면서 사망한 사고였기 때문이다.
당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던 주민들이 범인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부었는데, 차량 도난 범죄와는 별도로 당시 도난차를 몰고 과속으로 달아났던 도둑의 행위가 사망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는지를 놓고 경찰과 변호사 간 첨예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무리한 추격전 끝에 선량한 한 시민이 끝내 목숨까지 잃어야만 했던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의 전개 과정과 함께 재판에서 등장한 문제점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 블레넘 시내를 관통하는 오파오아강
<열린 옆문으로 몰래 들어가 차키 훔친 도둑>
사건은 지난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아침 8시 무렵에 블레넘 주택가에 있는 앨리스터 크리스티(Allister Christie, 사망 당시 70세)의 집에 카일 제임스 클락(Kyle James Clarke, 31)이 몰래 침입하면서 시작됐다.
클락은 크리스티가 일하러 나가면서 반려견을 위해 살짝 열어놓았던 옆문을 통해 집에 들어갔고 당시 크리스티의 부인인 헤더(Heather)는 2층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집 안에서 클락은 자동차 키를 비롯한 일부 물건을 훔치고 난 뒤 나와서 밖에 주차된 크리스티 소유의 파란색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까지 몰고 도망쳤는데, 그는 최초 진술에서는 당시 차 안에 키가 꽂혀 있었다고 거짓말한 바 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블레넘의 한 주택 밖에서 도난차를 알아본 경찰이 정지를 명령했지만 클락은 빠른 속도로 다른 차를 추월까지 하면서 달아났고 경찰은 추격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편 그날 나중에 소식을 전해 들은 크리스티는 황당한 일에 화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바로 다음 날 정오 무렵에 은색 쌍용차를 운전하고 가던 크리스티는 바로 전날 도난당한 자기 차를 몰고 가는 남성을 블레넘 시내를 지나는 국도 1호선 구간 중 한 라운드어바웃에서 발견했다.
그가 차량을 추격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를 눈치챈 클락은 블레넘에서 북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크리스티 역시 속도를 높여 뒤따라갔다.
하지만 쫓고 쫓기던 차량은 블레넘을 벗어난 외곽 도로에서 결국 충돌한 뒤 두 차량 모두 강물에 빠졌으며, 클락은 차에서 빠져나와 도주했지만 크리스티는 이튿날 물에 빠진 차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 사고 지점을 보여주는 지도
<직접적 사망 원인 제공 여부가 재판 쟁점>
이후 경찰에 붙잡힌 클락은 크리스티의 집에 들어가 차를 훔친 사실만 시인했는데, 그는 결국 차량 도난 혐의에 더해 크리스티의 사망과 관련된 혐의로도 재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클락은 차를 훔친 이튿날 발생했던 사망 사건과 관련된 혐의는 계속 부인하는 중이다.
이번에 블레넘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클락은 사망이나 큰 부상을 초래할 수 있었던 위험하거나 부주의한 운전 혐의와 함께 사고 후 피해자의 부상이나 사망을 확인도 하지 않고 도주했던 혐의도 받고 있다.
재판은 첫날 담당 판사가 크리스티의 사망이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됐다.
경찰 측 검사는 클락이 당시 저질렀던 ‘과속 및 무모했던 운전(high-speed and reckless driving)’이 크리스티의 죽음을 초래했는지가 결국 이번 재판에서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검사는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를 타고 도주하는 클락을 뒤쫓던 크리스티의 의도가 도난당한 자기 차를 되찾으려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클락의 변호사는 충돌 직전 순간에 발생했던 사건의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에 변호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변호사는 크리스티의 비극적인 사망이 두 차가 충돌하는 시점에서 그의 평소 성격과는 완전히 다르게 빠르게 내달렸던 속도가 원인이었는지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변호사는 크리스티의 사망이 또 다른 의료적인 문제로 발생했는지, 그리고 사고 당시 그가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면서 차량 도난 행위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사망 사고가 발생하던 그 당시의 구체적인 사건 전개 과정에 대한 검찰 측의 주장과 변호인의 대응, 그리고 서로의 주장에 대한 입증이 궁극적으로 이번 재판의 유무죄 여부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 지인들이 사망한 크리스티를 추모하면서 인터넷에 올린 사진
<추격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도주했던 범인>
크리스티가 도난당한 자기 차를 처음 발견했던 때는, 차를 도둑맞은 이튿날인 3월 13일 일요일 낮에 블레넘 시내의 한 라운드어바웃에서 두 차가 동시에 교차로에 진입하던 때였다.
이곳은 제한속도가 시속 50km인데, 당시 상황을 눈치챈 클락은 왼쪽으로 급하게 차를 돌려 국도 1호선으로 들어간 뒤 시속 130km에 가까운 속도로 두 대의 차량을 동시에 추월까지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를 마주한 적이 없었던 클락이 이처럼 빨리 눈치를 챌 수 있었던 이유는 벤츠를 훔칠 당시 문제의 은색 쌍용차가 바로 그 앞에 주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로는 웰링턴을 떠난 쿡 해협의 페리가 도착하는 항구인 픽턴(Picton)에서 출발한 차들이 더 남쪽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향하는, 통행량이 평소에도 무척 많은 도로이며 승용차뿐만 아니라 대형 화물차도 자주 지나다니는 구간이다.
당시 달아나던 클락을 목격했던 증인들에 따르면, 그는 빠른 속도를 유지한 채 ‘회전차선(turning bay)’도 이용하지 않고 약 2.5km 더 달리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어 시속 60~80km 제한속도 구간의 반대 차선으로 들어온 뒤 기차선로를 건너갔다.
그 당시 그가 이처럼 교차로를 통과했던 방식은 같은 도로에 있던 다른 운전자들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때마침 가까운 농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한 여성 목격자는, 자기 앞에서 마치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보았으며 두 번째 차가 그 차를 추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후 클락은 시속 약 160km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계속 블레넘 시내 동쪽 외곽인 비커맨(Vickerman) 스트리트를 따라 북쪽의 ‘오파오아(Opaoa)강’ 방향으로 3.3km를 더 도망쳤다.
이전에 ‘오파와(Opawa)강’으로도 불렸던 오파오아강은 ‘와이라우(Wairau) 계곡’에서 발원해 블레넘 시내를 관통하고 동쪽 외곽을 돌아 ‘테일러(Taylor)강’과 합류한 뒤 ‘빅 라군(Big Lagoon)’을 거쳐 ‘클라우디 베이(Cloudy Bay)’의 앞바다로 흘러가며 크기는 작지만 차체가 가라앉기에는 충분한 규모이다.
▲ 사고가 발생했던 오파오아강 모습
<시야 제한된 ‘blind hump’에서 벌어진 참사>
클락은 강 부근에 이르러 짧은 구간에서 도로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언덕으로 인해 다른 차가 시야에서 한동안 사라지는, 이른바 ‘blind hump’에 접근했다.
이때 클락은 차 방향을 돌려 추격하던 크리스티를 따돌린 뒤 지나쳐 가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몇 분 후 크리스티는 시속 120km 이상으로 추정되는 속도로 달리다가 해당 구간에서 차가 공중으로 도약해 차체 앞이 먼저 지면에 부딪히면서 미끄러졌고, 결국 맞은 편에서 클락이 몰고 오던 차의 뒷부분과 강하게 충돌했다.
이 충격으로 두 차량 모두 심하게 부서지면서 오파오아강으로 밀려들어가 결국 물에 빠졌는데, 이때 충격은 두 차의 차체 파편들이 도로 오르막 정상에서 길이 51m에 걸친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도로 바닥에는 깊게 팬 자국도 두 개나 발견됐는데, 나중에 경찰의 중대 교통사고 조사팀 관계자는 증거를 보면 긁힌 자국은 크리스티가 몰던 쌍용차 앞 범퍼가 지면에 부딪히면서 생긴 것이었고, 또한 더 멀리 있었던 타이어 자국은 큰 힘을 받아 타이어가 곧 ‘림(rim)’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보여주는 징후였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한 사고 목격자는 첫 번째 차가 베이를 넘고 두 번째 차는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뒤 이를 확인하려 갔지만 두 차량 모두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크리스티는 사고 당시 받은 충격과 함께 물에 빠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반해 클락은 차 뒷문을 통해 안전하게 빠져나와 둑까지 헤엄쳐 나온 뒤 현장에서 도망쳤으며 큰 상처도 입지 않았다.
현재 재판에서 경찰 측은 클락이 사고 후 크리스티의 상황을 아예 확인하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고가 난 후 당일 오후 4시 무렵에 이 도로에서 사이클링하던 한 주민은 강에 빠진 두 대의 차를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그냥 버려진 차들로 생각했다.
그는 이를 사진으로 찍었고 경찰에 통보하려고 했지만 여의찮아 사이클링을 계속했으며, 같은 날 나중에 자기의 이웃에 사는 주민이기도 한 한 경찰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설명과 함께 사진을 본 경찰관은 즉시 경찰서의 당직자들에게 경보를 울렸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며,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심각한 충돌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차량에 누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크리스티의 차는 다음 날 강물이 도로 밑을 통과하는 ‘배수로(culvert)’에서 발견됐으며 시신도 당일 오후에 수습돼 가족에게 통보됐는데, 당시 그의 차가 잠겼던 현장은 차에서 새어 나온 기름과 연료로 인해 물이 굉장히 탁한 상태였다.
▲ 사고 현장 부근의 ‘blind hump’ 구간
<사고 당시 치명적 상처 없어, 즉각 구호 조치했으면…>
크리스티의 사후 이뤄진 부검에서는 그가 당시 큰 상처를 입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즉각적인 구호 조치가 이뤄졌으면 생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경찰관은 크리스티의 운전석 안전벨트가 완전히 감겨 있었지만 그것이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라고 법정에서 검사의 질문에 답변했다.
법의학자인 마틴 세이지(Martin Sage) 박사도, 크리스티가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 있는 상처는 없었으며 안전벨트 부상도 없었지만 이것이 그가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라고 말했다.
세이지 박사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크리스티가 다쳐서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죽음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요인은 크리스티는 생전에 몰랐지만 사후에 발견된 심장병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각한 흥분 상태에서 충돌과 관련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이를 테스트할 수는 없으며, 심장 마비에 빠졌다면 ‘몇 초’ 안에 의식을 잃기 때문에 강물에 빠지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증언했다.
한편 클락은 법정에서, 사고 당시 충격에 의식을 잃었다가 차에 물이 차오르면서 깨어났지만 피를 흘리고 있던 자기가 죽은 줄 알았고 버틸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만약 크리스티를 도울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또한 크리스티가 거의 시속 240km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자기를 쫓아왔다고 주장했는데, 전문가는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당시 다른 운전자들이 놀라고 특히 아이들을 태우고 가던 한 엄마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크리스티가 지나가도록 비킬 정도로 빠른 속도이기는 했다고 말했다.
물에서 빠져나온 뒤 블레넘의 한 동료의 집으로 달려갔던 클락은 경찰과 대치 끝에 결국 붙잡혔다.
한편 언론을 검색하면 클락과 같은 이름과 나이인 한 남성이 지난 2021년 8월에는 마약에 취한 채 파트너를 폭행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한 혐의로 법정에 출두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14살에는 대마초, 16살 때는 필로폰을 접했으며 직전까지 10년 대부분을 감옥에서 지냈고 블레넘 재활시설을 거쳤지만 또다시 마약에 손을 대 결국 또 투옥되는 등 온라인에서는 동일 인물의 범죄로 여겨지는 뉴스를 여러 건 찾아볼 수 있다.
이번 재판의 결정은 5월 17일, 금요일에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재판을 담당하는 조 라일리(Jo Rielly) 판사는 이번 재판이 ‘독특한 법적 문제들(unique legal issues)’을 안고 있다고 말해 판결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