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은 최근 물가 안정을 위해 의도적인 경기후퇴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급격한 금리 인상에 나섰던 중앙은행이 경기후퇴 가능성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완만한 경기침체 국면으로는 물가 안정이라는 본연의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활비 위기가 단단히 자리잡은 상황에서 실직 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어려움에 빠뜨릴 제작된 경기후퇴가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물가 안정 위해 의도적 경기후퇴
중앙은행이 1999년 현 통화정책 틀을 도입한 이후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렸던 다음날인 작년 11월 24일 열린 국회 재무위원회 회의에서 향후 1%포인트 인상할 것을 우려한 의원들이 아드리안 오르(Adrian Orr) 중앙은행 총재에게 중앙은행이 의도적으로 경기후퇴를 계획하는 것인지를 묻자, 오르 총재는 “맞다”고 답했다.
그는 “우리는 의도적으로 경제 내의 총지출을 줄이려고 한다”며 “기대 인플레이션이 빨리 하락할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줄고 저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 기간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어떤 중앙은행 총재라도 쉽게 인정하지 않았을 사안을 오르 총재는 자랑(?)스럽게 알렸다.
이에 앞서 오르 총재는 “인플레이션은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라며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계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우리가 마이너스 GDP 성장 기간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은행은 중장기 물가를 1~3%로 유지하는 좁은 소관을 가진다.
국민 복지에 대한 책임은 정부에 있지, 중앙은행의 몫은 아니다.
팬데믹으로 촉발된 양적 완화와 공급망 차질 등으로 일어난 인플레이션은 연속적인 기준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장기화되고 있다.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작년 1분기에 6.9%, 2분기 7.3%, 3분기 7.2%로 중앙은행의 목표 범위를 두 배 이상 넘겼다.
중앙은행은 2021년 10월 7년여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한 뒤 작년 11월까지 총 9번의 정례회의에서 계속 금리를 올려 기준금리가 4.25%에 다다랐다.
또 중앙은행은 작년 4월 회의에서부터는 5회 연속 0.50%포인트 인상의 빅스텝 행보를 이어왔다.
그럼에도 중앙은행은 3분기 물가상승률이 7.2%로 3개월 전 수준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추가 금리인상 의지를 꺾지 않았다.
중앙은행이 전망하는 올해 3분기 기준금리는 5.5%에 달한다.
교역노조카운슬(CTU)은 중앙은행의 의도대로 경기후퇴에 들어가면 7만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CTU는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경제를 망가뜨리는 것보다 인플레이션의 가장 치명적인 부분에 대처하는 ‘인플레이션 및 소득법’ 제정을 정부에 제안했다.
이 법은 중앙은행에 넓은 인플레이션 목표를 주는 대신 정부가 향후 10년간의 안정된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접근을 제시한다.
CTU가 제안한 대책 가운데는 일부 사유화된 전력회사들의 완전 국유화와 일부 학생융자 상환자들에 대한 상환액 감면, 일부 주택에 대한 생애 첫 집 구매자들의 25년 고정금리 적용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호주에서 연간 소득 1만8,200호주달러까지 면세인 것처럼 뉴질랜드에서도 소득의 첫 일정 부분까지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을 제안했다.
그랜트 로버트슨(Grant Robertson) 재무 장관의 고문역을 맡기도 했던 CTU의 크레그 레니(Craig Renney) 이코노미스트는 “뉴질랜드는 인플레이션에 대해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인플레이션은 단기가 아니고 장기적인 것이다”고 말했다.
CTU는 인플레이션을 가장 가난한 하위 20%의 가구에 의해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뢰 잃은 중앙은행
노동당 정부는 지난달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 대한 왕립조사위원회의 설치를 발표했다.
2024년 중반에 결과물이 나올 예정인 이 조사 활동 대상에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배제시켰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럭슨(Christopher Luxon) 국민당 대표는 팬데믹 대응 중 가장 최악가운데 하나인 통화정책을 배제한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중심에는 오르 총재가 있다.
그가 총재를 맡은 이후 직원들의 이직이 눈에 띄게 늘었고 정책 결정에 그의 입김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뜻밖에도 노동당 정부는 작년 11월 그를 5년 임기의 중앙은행 총재로 재임명했다.
국민당은 오르 총재의 재임명 발표에 충격을 표명했다.
당시 국민당 니콜라 윌리스(Nicola Willis) 재무 담당 대변인은 “국민당은 지난 9월 오르 총재의 재임명 반대와 중앙은행의 성과에 대한 독립적인 검토를 요구하는 서한을 로버트슨 재무 장관에 보냈었다”며 “이는 마치 학생이 숙제를 스스로 채점하고, 그 결과를 확인해줄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비난했다.
윌리스 대변인은 “중앙은행은 지난 2년 동안 이상한 결정들을 내렸고 수 백 억 달러의 돈을 찍어냈으며 은행들에 사실상 돈을 무상으로 주는 대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며 “생활비 위기를 겪고 있는 국민들은 그 책임을 기대하고 있고 정부는 중앙은행이 옳은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액트(ACT)당의 데이비드 세이모어(David Seymour) 대표도 생활비 위기를 가져온 장본인을 재임명했다고 비난했다.
세이모어 대표는 “오르 총재는 중앙은행이 과도한 경기 부양으로 소비자물가를 급등시키고 자산가격을 부풀리며 빈부 격차 심화와 이제 급격한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은행은 팬데믹 초기인 2020년 2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여파가 짧고 날카로울 것이라며 2020년 상반기에 그칠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유례없는 전국 봉쇄령이 내려지기 직전인 그 해 3월 16일 긴급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기존 1%에서 0.25%로, 0.75%포인트 허둥지둥 파격 인하했다.
또한 이 금리를 최소 12개월 동안 유지하겠다고 이상한 단서를 달았다.
야당들의 견해와 달리 로버트슨 장관은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세계 다른 중앙은행들보다 조금 앞서 있다. 그래서 다른 중앙은행들보다 일찍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뉴질랜드 경제가 팬데믹에도 강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양적 완화 비용 90억달러 추산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 프로그램에 따라 매입한 국채는 고금리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져 그 직접 비용이 90억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중앙은행은 2020년 3월부터 시중 이자율을 낮추고 채권시장의 역기능을 완화할 목적의 국채 매입을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로버트슨 장관은 중앙은행에 양적 완화 프로그램으로 손실을 볼 경우 정부에서 배상해 주기로 말했다.
중앙은행이 2020년부터 2021년초까지 매입한 550억달러 규모의 국채는 금리와 물가가 오르면서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양적 완화 프로그램은 이자율을 떨어뜨리고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나름 기여했지만 그 비용은 수 십 억 달러로 불어났다.
손실은 중앙은행이 대차대조표를 정상화하기 위해 채권을 팔거나 장래 경기후퇴시 채권을 재매입하기 위해 처분할 때 실현된다.
작년 5월부터 재무부는 매달 중앙은행에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지원을 시작했다.
당시 중앙은행은 매입한 모든 국채가 만기가 되거나 매도 예정인 2027년까지 매달 1억5,000만~2억달러의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5년 동안 80억달러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당초 추산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예상치를 올리면서 국채 가치는 더욱 떨어져 이제 손실 추산치는 90억달러로 불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양적 완화 프로그램이 금리 상승에 어떻게 노출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그러한 위험을 모를리 없었지만 적어도 2020년 초까지 아무도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금리 인상을 예상하지 못했다.
오직 디플레이션을 피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11~2020년 연간 인플레이션은 1.5%에 불과했다.
그 전 10년 동안은 2.5%였다.
지난 2019년 중앙은행 크리스쳔 혹스비(Christian Hawkesby) 총재보는 “낮은 인플레이션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도전이다. 지금 문제는 인플레이션을 올리는 것이지 낮추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중앙은행측은 양적 완화 프로그램의 비용에 초점을 두지 말고 경제에 가져온 혜택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르 총재는 양적 완화 프로그램의 경제적 혜택은 90억달러의 직접 비용 추산치보다 몇 배 높다고 강조했다.
양적 완화 프로그램으로 금리를 내림으로써 경제 활동과 고용률, 정부 세금 수입 등이 2020년초 예상보다 모두 높았다는 것이다.
올해 확실시되는 경기후퇴
중앙은행은 올해 뉴질랜드 경제가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앙은행은 올해 2분기부터 경제가 4분기 연속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물가상승률이 작년 3분기 7.2%에서 작년 4분기 7.5%로 오를 것이며 올해 말에는 5%로 둔화하겠지만 2025년 후반기에도 중앙은행의 물가 목표 범위인 1~3% 중간점으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각국 중앙은행의 경기후퇴 가능성 언급은 영국에서도 나온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의 스와티 딩그라(Swati Dhingra) 통화정책위원은 “시장은 높은 금리가 영국 경제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과소평가하고 있을 것”이라며 “현재 금리에서 추가 인상은 경기침체를 심화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BOE도 작년 11월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해 3.0%까지 올렸다.
유례없는 금리인상을 주도하는 미국도 올해 경기후퇴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작년 10월 월스트리트저널이 66명 경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3%가 올해 미국 경제가 경기후퇴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 조사기관 컨센서스 이코노믹스가 내놓은 올해 미국 성장률 전망치는 0.2%로 1989년 이후 세 번째로 낮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올해 전 세계의 3분의 1이 경기 침체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 IMF 총재는 지난 1일 올해 세계 경제가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주요 국가의 경기 둔화로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제로코로나 정책을 폐기한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하면 세계 경제 성장률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고 미국 경제에 대해서는 견조한 노동시장이 금리 인상 기조를 연장해 경기 침체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