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다 아던(Jacinda Ardern) 총리가 지난달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하고 10월에 열리는 총선에도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아던 총리의 후임으로 크리스 힙킨스(Chris Hipkins) 교육 장관 겸 경찰 장관이 선출됐다. 뉴질랜드에서 전임 총리 사임으로 당내에서 선출돼 총리직을 맡게 된 총리와 그 집권당은 대개 총선에서 패배했다. 오는 10월에 실시되는 총선에서 힙킨스 신임 총리와 노동당이 그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아던 총리 전격 사임
약 5년 3개월간 총리직을 수행한 아던 총리가 지난달 19일 네이피어(Napier)에서 열린 노동당 연례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오는 10월 14일에 총선이 열린다는 것을 발표하면서 “다음 4년을 위한 에너지가 없다”며 갑작스럽게 사임 의사도 밝혀 충격을 줬다.
사실 아던 총리가 작년 연말에 사임할 것이라는 추측성 언론 보도가 하반기에 나왔지만 해를 넘기면서 잠잠해졌고 이번 사임 발표 전에도 그랜트 로버트슨(Grant Robertson) 부총리, 선거위원장을 맡고 있는 메간 우드(Megan Wood) 주택장관, 그리고 일부 측근들만 미리 알고 있었을뿐, 대부분의 노동당 의원들도 아던 총리의 기자회견을 통해 알 정도로 예기치 못했다.
아던 총리는 사임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나도 인간이다. 총리 일을 수행할 충분한 연료가 탱크에 없다”고 말했다.
아던 총리는 총리직을 이어가기 위한 에너지와 열망을 연료와 탱크에 비유해 “총리직은 탱크가 가득 차 있지 않는 한 수행할 수 없고, 수행해서도 안 된다. 또한 여유분도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여름 휴가기간 동안 나 자신을 돌아본 결과 내게 더 이상 총리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탱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특권을 가진 역할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자신이 그 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야 하는 책임입니다. 저는 떠날 때가 됐습니다.”
아던 총리는 주택문제와 아동 빈곤, 기후변화, 자연재해, 테러 문제,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중요한 일들에서 총리로서 많은 결정을 내려왔다며 “내가 떠나는 이유는 이런 특권적인 역할에는 적임자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알아야 하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으며 더는 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연료통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아던 총리는 가족들도 총리직에서 내려오는 것에 동의했다며 “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며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엄청난 양의 성과를 이뤘고 나는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아던 총리는 보궐선거를 피하기 위해 올 4월까지는 의회 의원으로 남는다.
그는 “총리로 지낸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었다. 내게 지난 5년 반 동안 이 나라를 이끌 특권을 준 뉴질랜드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아던 총리는 향후 정치적 계획은 세운 바 없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는 “딸 니브(Neve)가 올해 학교에 들어갈 때 함께 그곳에 가는 엄마가 되고 싶다”며 현장에 있던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 클라크 게이포드(Clarke Gayford, 46세)에게 웃으며 “드디어, 우리도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했다.
게이포드는 낚시 다큐멘터리 등을 진행하는 방송인으로 아던 총리와 사실혼 관계다.
2013년 처음 만나 교제했고 2018년 6월 딸 니브를 낳았다.
이듬해인 2019년 4월 약혼했다.
지난해 초 결혼식을 올리려 했지만 당시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하면서 취소했다.
아던은 총리로서 물러났지만 2년 이상 총리직을 수행한 전임 총리들에게 지급되는 연간 최대 5만7,000달러의 특전을 받게 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명망 떨친 아던 총리
37세이던 2017년 노동당 대표를 맡아 그 해 10월 총선에서 승리하며 총리에 올랐던 아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던 총리의 국제적 인지도는 뉴질랜드 총리로서는 전례가 없을 정도다.
뉴질랜드내에서는 소셜미디어(SNS)의 악성 여론, 수 차례의 살해 위협과 함께 지지율도 계속 떨어졌지만 해외 언론들은 이번 아던 총리의 사임에 대해서도 관심있게 보도했다.
아던은 지난달 24일 총리로서 소화하는 마지막 공개 행사로 황가누이(Whanganui)에서 열린 라타나(Ratana) 교회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아던 총리는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나 자신이 총리직을 그만두는 이유에 대해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퍼지는 악성 여론 때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에 여러 논평이 있었지만, 부정적인 여론 때문이라는 시각은 싫다”라고 말했다.
아던 총리가 전격 사의를 표명하자 전문가들은 격무와 함께 저주에 가까운 악성 여론의 압박 때문일 것이란 해석이 많았다.
헬렌 클라크(Helen Clark) 전 뉴질랜드 총리는 BBC 인터뷰에서 아던 총리가 강한 압박을 받았다며 “재임 기간 그는 소셜미디어와 24시간 돌아가는 뉴스, 인터넷 낚시질, 음모론 등에 의해 전례 없는 증오와 독설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힙킨스 신임 총리 역시 총리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아던 총리가 재임 기간 완전히 혐오스러운 학대를 경험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아던 총리는 강력한 코로나19 봉쇄 정치를 펼치자 끊임없이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공개 연단에 설 때면 시위대가 쫓아와 그를 향해 “나치”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던 총리는 이날 “총리로 일하면서 사랑과 연민, 공감, 친절을 경험했으며 이것이 내가 주로 경험한 것들이다”라며 세간의 해석을 부인했다.
아던 총리는 2019년 크라이스트처치 총격 테러, 화이트섬 화산 분출, 2020년 팬데믹 초기 등 지도력을 필요로 할 때에 뛰어나게 대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2020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혼합비례대표제가 도입된 1996년 이래 처음으로 의회에서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2018년 딸을 낳고 총리로선 이례적으로 6주간 출산휴가를 다녀왔으며, 모유 수유를 이유로 3개월 된 딸을 데리고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참석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타임 선정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오른 그는 젊은층과 여성, 진보 진영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자신다 마니아’ 현상을 낳기도 했다.
단독 후보로 출마해 총리에 오른 힙킨스
아던 총리의 사임으로 노동당은 아던을 대신할 노동당 대표 선출에 나섰고, 힙킨스는 지난달 22일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해 대표로 선출, 자동으로 총리에 오르게 됐다.
2008년 처음 의회에 입성한 힙킨스는 2020년 코로나19 대응 장관을 맡으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지역구 사무실을 직접 수리하는 등 손재주가 좋은 데다 정부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구원 투수 역할을 하면서 ‘미스터 픽스잇(fix-it•해결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년에 걸친 의원 활동을 통해 아던 총리보다 더 중도적인 성향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난달 25일 공식 취임식을 마친 후 첫 기자회견에서 고물가 문제가 정부가 마주한 최우선 과제라며 내각의 중심 정책 의제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뉴질랜드 국민들은 앞으로 몇 주에서 몇 달 안에 생활비가 우리 노동 프로그램의 핵심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며 “다만 정책을 너무 즉각적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그는 총리로 확정된 지난 22일에도 고물가 상황을 ‘인플레이션의 팬데믹’이라 칭하며 “정부는 ‘빵과 버터’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코로나19와 세계적인 전염병은 건강 위기를 만들었고, 이제 그것은 경제 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정부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힙킨스 총리는 부총리에 카멜 세풀로니(Carmel Sepuloni) 사회개발부 장관을 지명했다.
뉴질랜드 최초의 파시피카 부총리가 된 세풀로니는 2008년에 첫 통가 출신 의원에 당선돼 교육과 청소년 범죄 프로그램에 긴밀히 협력하는 등 힙킨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총리 중도 사임한 집권당 총선 패배 징크스 깨질지 관심
아던 총리는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사임 발표를 할 때까지 줄곧 총리 선호도 최고 자리를 지켰다.
2020년 4월 한 여론조사에서는 60%에 육박하는 역대 최고의 총리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면서 너무 강한 규제를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기가 크게 떨어지면서 최근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국민당에 뒤처지는 결과들이 나왔다.
아던 총리의 사임 이유로 지지율이 하락중인 배경도 깔려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지지율과 사임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우리(정치인)도 인간이니 영향은 있겠지만, 내 결정의 근간은 아니다”라면서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 떠나는 게 아니다. 우리(노동당)는 이길 것이고 이길 수 있다. 그러한 도전을 위해 신선한 책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던 총리와 노동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노동당내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노동당의 최대 자산인 그의 사임은 10월 총선에서 노동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평가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나 총리 교체 이후 첫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의외로 노동당의 지지율이 반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힙킨스 총리가 공식 취임한 지난달 25일부터 오클랜드 홍수 피해를 겪은 29일까지 1,008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1뉴스 칸타(1News Kantar)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은 전달 보다 5%포인트 상승한 38%를 기록, 1%포인트 하락하여 37%에 그친 국민당을 앞섰다.
이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이 국민당을 앞선 것은 지난해 1월 이후 처음이다.
총리 선호도 조사에서 새로 이름을 올린 힙킨스 신임 총리가 단번에 23%로 1위에 올랐다.
그 뒤를 국민당 크리스토퍼 럭슨(Christopher Luxon) 대표가 22%로 차지했고 아던 전 총리의 지지도는 5%로 사임 발표와 함께 급락했다.
뉴스허브-리드 리서치(Newshub-Reid Research)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노동당의 지지율은 이전 조사 때보다 5.7%포인트 오르며 38%를 기록, 4.1%포인트 떨어지며 36.6%에 그친 국민당을 앞섰다.
이 여론조사에서도 힙킨스 총리는 19.6%의 지지율을 기록해 18.8%를 얻은 국민당 럭슨 대표를 제치고 차기 총리 선호도 1위에 올랐다.
정당 대표들을 대상으로 한 신뢰도 조사에서도 힙킨스 총리에 대해서는 52.9%대 26.9%로 신뢰한다는 응답자가 더 많았던 반면에 럭슨 대표에 대해서는 36.9%대 43.8%로 신뢰한다는 응답자가 더 적었다.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힙킨스 총리는 “신뢰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나는 항상 뉴질랜드 국민들 앞에서 솔직해지려고 노력했으며 좋은 지지율은 이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전임 총리 사임으로 당내에서 선출돼 총리직을 맡게 된 총리와 그 집권당은 대개 총선에서 패배했다.
지난 2016년 12월 존 키(John Key) 전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에 오른 빌 잉글리쉬(Bill English) 총리는 2017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최다 정당 투표를 획득했으나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정당 간 협상을 통해 정부를 구성한 노동당의 아던 총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1997년 12월에도 짐 볼저(Jim Bolger) 전 총리의 사임으로 제니 쉬플리(Jenny Shipley)가 국민당내에서 총리로 선출됐으나 1999년 총선에서 클라크 대표가 이끈 노동당에 패배했다.
힙킨스 신임 총리에 대한 허니문 효과가 그러한 전례를 깰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