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힙킨스(Chris Hipkins) 신임 총리가 자신다 아던(Jacinda Ardern) 전 총리 시절 노동당 정부가 추진하던 논란많은 정책들을 폐기하거나 보류하고 유류세 인하 및 대중 교통요금 반값 기한 연장, 최저임금 인상 등 생활비 위기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발표했다. 야당인 국민당은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들을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한다며 정부의 정책 변화를 비난했다. 총리가 바뀐 후 첫 대폭적인 이번 정책 변화가 생활비 급등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는 중·저소득층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총선 레이스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대폭의 최저임금 인상을 모두 반기는 것은 아니다.
생활비 위기에 초점 맞춘 정책 변화
힙킨스 신임 총리가 지난 8일 내각회의 후 기자회견을 통해 취임 이후 첫 일련의 정책 변화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주요 내용은 텔레비전 뉴질랜드(TVNZ)와 라디오 뉴질랜드(RNZ)의 합병 백지화, 소득보험제도 추진 보류, 혐오 발언 개혁 철회 및 연기, ‘쓰리 워터스’(Three Waters) 개혁 보류 등과 함께 최저임금 시간당 1.50달러 인상한 22.70달러 적용 등이다.
이번에 폐기되거나 보류된 정책들은 아던 전 총리 시절 추진했던 주요 정책들로 한결같이 많은 논란을 불러왔었다.
힙킨스 총리는 이번 정책 보류나 폐기로 수십 억 달러가 절감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당 크리스토퍼 럭슨(Christopher Luxon) 대표는 “정부가 지난 6년 동안 이렇게 하자고 추진해온 정책들을 이제 와서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액트(ACT)당의 데이비드 세이모어(David Seymour) 대표는 “이번에 버려진 정책들은 과거 노동당 장관들이 그 필요성을 역설했었던 것들이다”며 “지금도 노동당의 정책들을 살펴보면 버릴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힙킨스 총리는 지난달 취임 이후 생활비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지난달 25일 공식 취임식을 마친 후 첫 기자회견에서 고물가 문제가 정부가 마주한 최우선 과제라며 내각의 중심 정책 의제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뉴질랜드 국민들은 앞으로 몇 주에서 몇 달 안에 생활비가 우리 노동당 프로그램의 핵심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며 “다만 정책을 너무 즉각적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그는 총리로 확정된 지난달 22일에도 고물가 상황을 ‘인플레이션의 팬데믹’이라 칭하며 정부는 ‘빵과 버터’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그는 “코로나19와 세계적인 전염병은 건강 위기를 만들었고, 이제 그것은 경제 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정부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힙킨스 총리는 지난 1일 당초 3월말로 종료 예정이었던 유류세 인하 및 대중 교통요금 50% 인하를 6월말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지난달 말에 종료된 ‘도로 이용료’ 할인도 다시 시행했다.
폐기 또는 보류된 정책들
이번에 보류된 정책 가운데 소득보험제도는 그랜트 로버트슨(Grant Robertson) 재무장관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정책이다.
로버트슨 장관은 “팬데믹은 사람들이 현재의 직업을 유지하는 것에서 새롭고 더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의 초점이 변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며 소득보험제도의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정부는 사업체를 대표하는 ‘비즈니스 뉴질랜드’와 노동자를 대변하는 ‘산업노조카운슬(CTU)’ 등과의 2년 간의 연구와 협의 끝에 작년 2월 실직한 근로자가 급여의 최대 80%까지 청구할 수 있는 소득보험제도에 대해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실직한 근로자는 최대 7개월 동안 직전 급여의 80%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근로자와 회사는 각각 급여의 1.39%의 부담금을 납부해야 한다.
6개월 이상 납부금을 부담한 근로자가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자격을 얻는다.
주당 2,000달러를 버는 근로자는 27.80달러의 부담금을 내고 직장을 잃었을 때 1,600달러를 받는다.
사고보상공사(ACC)가 부담금을 징수하고 업무를 관장한다.
ACC 부담금처럼 이 소득보험제도의 부담금도 변하게 될 것이지만 제도 시행 후 첫 2년 동안 부담률은 1.39%로 동결된다.
연간 35억4,000만달러의 비용이 추산됐던 소득보험제도는 취지는 좋지만 내용이 복잡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실업수당 제도가 있는 상황에서 2중의 복지 체제를 만들 것이라고 우려도 나왔다.
국민당은 새로운 세금인 ‘직업세’라고 단정지었다.
이번에 힙킨스 총리는 소득보험제도가 국민의 지지가 부족하다며 경제 상황이 크게 개선될 때까지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TVNZ과 RNZ의 합병 계획은 완전 백지화됐다.
작년 3월 크리스 파포이(Kris Faafoi) 당시 방송장관은 올해 7월까지 TVNZ과 RNZ의 합병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 퍼블릭 미디어’(ANZPM)는 뉴질랜드 두 주요 공공 언론매체의 합병에 3억7,000만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고, 이미 2,300만달러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힙킨스 총리는 합병을 백지화하는 대신에 RNZ과 TVNZ에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국민당의 니콜라 윌리스(Nicola Willis) 재무 대변인은 “정부가 합병을 위해 하루에 9,000달러의 컨설팅 비용을 낭비하는 등 수백 만 달러의 국고를 사용하고 5년 반 동안의 기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말했다.
물 공급 관리를 중앙화하려는 ‘쓰리 워터스’ 개혁 프로그램도 보류됐다.
‘쓰리 워터스’ 개혁 프로그램은 식수, 폐수, 우수 관리를 67개 지방 자치단체에서 2024년 7월까지 4개의 새로운 공공 지역기관에 이관하려는 계획이다.
2021년 10월 세부사항이 발표된 이후 일부 시장과 국민당, 액트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시장들 및 마오리 대표 그룹이 세부사항을 검토하여 2022년 3월 47개 건의사항을 제시했고, 정부는 그 가운데 44개를 수용했다.
힙킨스 총리는 “지난번 오클랜드 홍수에 나타났듯이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며 “하지만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쓰리 워터스’ 계획의 보류를 발표하면서 향후 추진 방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혐오 발언 입법 개혁도 이번에 보류 목록에 올랐다.
2019년 크라이스트처치 총격 테러를 계기로 종교적 믿음을 기초로 증오를 조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인권법 개정안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러한 혐오 발언 개혁은 장애인과 여성, 성전환자 등이 배제되는 등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 김이 빠졌다.
또 배기가스 절감 목적을 위해 내년 4월부터 연료 도매업자에 시행하려던 바이오연료 의무화 계획도 소비자들에 추가 비용 부담을 줄 것이라는 이유로 중단됐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울상 짓는 소매업체들
많은 정책들이 폐기 또는 보류된 가운데 최저임금은 작년 4분기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7.2%를 반영한 7.1%가 인상됐다.
이에 따라 오는 4월 1일부터 법정 최저임금이 시간당 22.70달러가 적용된다.
견습 최저임금은 80%인 18.16달러가 된다.
최저임금은 6년전 시간당 15.75달러에서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후 44.1%가 오르게 된다.
이미 구인난으로 임금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폭적인 최저임금 인상으로 많은 중소업체들이 제품가격을 올릴 계획인 것으로 나타나 물가상승을 압박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또 현재 실업률이 3.4%로 낮지만 경기침체로 2025년 초에 5.7%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대폭의 최저임금 인상은 시기적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힙킨스 총리는 힘든 시기에 가장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최저임금 인상의 배경을 설명했다.
비즈니스·혁신·고용부(MBIE)에 따르면 7.1%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경제 전체의 평균임금 상승률과 비슷하기 때문에 실업률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국내총생산(GDP)의 임금 부분에 0.1%만 증가시킬 것이라는 설명이다.
ANZ의 샤론 졸너(Sharon Zollner)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최저임금 인상이 물가를 압박하겠지만 그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졸너 이코노미스트는 “숙박업이나 요식업같은 최저임금에 가장 많이 노출된 부문의 임금상승률이 9.6%이다”며 “최저임금 인상이 임금 상승에 새로운 자극을 일으킬 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더 많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이 대량의 직원해고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경제 컨설팅회사 인포메트릭스(Infometrics)의 브래드 올슨(Brad Olsen) 이코노미스트는 물가상승률만큼 최저임금을 인상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평균임금이 7.2% 상승한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임금이 가장 낮은 근로자들도 뒤쳐지지 않게 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키위뱅크(Kiwibank)의 자로드 커(Jarrod Kerr)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저임금 인상이 다른 근로자들의 임금도 올리면서 물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질랜드 이니셔티브(NZ Initiative)의 에릭 크램튼(Eric Crampton)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낮은 실업률에 비해 실업수당 수급자는 생산가능인구의 3.2%인 9만7,766명으로 많다”며 “경기후퇴를 맞을 경우 더욱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2021년 최저임금이 20달러로 올랐을 때 민간 부문 평균임금의 60.9% 수준이었고, 작년 21.20달러였을 때는 60.3%로 오히려 하락했지만 오는 4월에 22.70달러로 인상되면 평균임금의 61.2%가 된다”며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의 상승은 경제가 하강했을 때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오클랜드 비즈니스 챔버(Auckland Business Chamber)의 사이먼 브리짓스(Simon Bridges) 회장은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 어려움을 겪는 근로자를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해로움의 순환이다”며 “많은 사업체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강조했다.
비즈니스 뉴질랜드의 커크 호프(Kirk Hope) 회장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최저임금 인상률 6% 정도보다 높은 최저임금 인상은 이윤 폭이 적은 중소 규모의 사업체들에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레스토랑협회는 인력 부족으로 단순 직종도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 상황에서 정부가 최저임금을 대폭으로 인상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레스토랑협회의 마리사 비도이스(Marisa Bidois) 회장은 “최저임금이 중간임금을 끌어 올려 인증고용주 워크비자에 의한 이민자 고용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크리스 대 크리스
오는 10월 실시되는 총선을 양대 정당 대표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 대 크리스 대결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지난달 25일 공식 취임한 힙킨스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단번에 차기 총리 선호도 1위에 오를 정도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정책 변화도 그 동안 국민의 지지가 낮거나 논란이 많았던 정책들을 보류하거나 폐기하고, 지금 국민의 피부에 가장 와닿는 생활비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총선 레이스에서 유리하게 이끌려는 영리한 대응이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이번 정책 발표 하루 후인 지난 9일 발표된 탈보트 밀스(Talbot Mills) 여론조사에서 힙킨스 총리는 총리 선호도 조사에서 35%로, 27%에 그친 럭슨 국민당 대표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1월 26일에서 31일까지 실시된 이번 여론조사의 정당 지지도에서는 국민당이 직전 조사보다 1%포인트 상승한 36%를 기록, 역시 1%포인트 올라 33%를 기록한 노동당을 앞섰다.
여론조사 결과를 의석으로 환산하면 국민당과 액트당의 우파와 노동당과 녹색당의 좌파 모두 과반수를 넘지 못해 마오리당에 의해 힘의 균형이 결정될 것으로 분석됐다.
앞서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1,008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1뉴스 칸타(1News Kantar)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은 전달 보다 5%포인트 상승한 38%를 기록, 1%포인트 하락하여 37%에 그친 국민당을 앞선 바 있다.
이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이 국민당을 앞선 것은 지난해 1월 이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