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즈먼 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뉴질랜드와 호주가 최근 대조적인 경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양국이 공통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 문제를 겪고 있는 가운데 이달 들어 호주 중앙은행(RBA)은 시장 예상대로 기준금리를 동결한 반면에 뉴질랜드 중앙은행(RBNZ)은 시장 예상보다 높게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양국의 대조적인 결정에 대해 한쪽은 과감했다는 호평이 나오는 한편 다른 한쪽은 경기후퇴로 밀어 넣는 근시안적이었다는 등의 악평이 쏟아졌다. 오는 7월 여자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양국이 앞으로 어떤 경제 상황에 직면할지 주목된다.
호주 기준금리 3.60%로 동결
RBA는 지난 4일 통화정책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3.60%로 동결한다고 밝혔다.
이는 시장 예상에 부합하는 결정이다.
RBA는 지난해 5월 0.1%이던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후 6월부터 9월까지 네 차례 연속 0.5%포인트씩 올렸다.
지난해 10월부터 인상폭을 0.25%포인트로 줄이며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춘 RBA는 10월 이후 지난달까지 다섯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인상한 후 이번에는 동결을 택했다.
RBA는 통화정책 성명에서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할 수 있으면서도 금리를 동결한 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경제 전망을 평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RBA는 인플레이션을 목표치인 2~3%대로 돌리기 위한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필립 로우(Philip Lowe) RBA 총재는 “통화 정책이 시차를 두고 반영되는 만큼 지금까지의 금리 인상 효과가 아직은 경제에 완전히 반영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사회는 지금까지 금리 인상의 영향과 경제 전망을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달 금리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로우 총재는 호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정점을 지난 것으로 보인다며 수요 둔화로 원자재 가격 상승세도 몇 달 동안은 완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RBA는 고용시장은 여전히 긴축적이고 최근의 은행위기로 금융 환경이 긴축적으로 변할 것이라면서도 호주의 은행 시스템은 견조하고 자본력이 충분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호주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4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7.8% 상승했다.
1990년 1분기 이후 약 32년 만의 최고치다.
CPI 상승률은 지난 2월말 현재 6.8%로 둔화됐지만 RBA의 목표치인 2~3%는 크게 웃돈다.
RBA는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으면 금리를 다시 인상할 것이라는 여지도 남겼다.
로우 총재는 동결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향후 금리 인상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로우 총재는 “향후 인플레이션을 목표치까지 낮추기 위해 추가 긴축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예상밖 0.5%포인트 인상
호주 쪽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다음날인 지난 5일 RBNZ은 정기 통화정책 회의를 열고 0.5%포인트의 빅스텝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0.25%포인트 인상을 점쳤었다.
로이터통신은 이코노미스트들을 대상으로 한 사전 조사에서 빅스텝 의견을 낸 사람은 없었다며, 시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했다.
보통 때와 달리 언론 회견이나 정식 보고서 없이 진행된 이날 기준금리 발표에서 RBNZ은 중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기대 인플레이션을 1~3%의 목표 범위로 내리기 위해 금리를 올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BNZ은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계속적으로 높고 고용이 최대 지속 수준 이상이라며 인상 배경을 설명했다.
RBNZ은 2021년 10월 0.25%로 사상 최저이던 기준금리를 7년여 만에 0.25%포인트 인상한 후 이번까지 열 한 차례 연속 금리를 올려 기준금리가 5.25%에 다다랐다.
이는 2008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이다.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다섯 차례 연속 0.5%포인트씩 올렸고 11월에는 현 통화정책 틀을 도입한 이후 처음으로 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2월과 이달 모두 0.5%포인트 올리면서 사상 최고 속도로 금리를 인상했다.
뉴질랜드에서 지금까지 가장 높은 기준금리는 세계금융위기 때인 2007년 7월의 8.25%였다.
기준금리는 2014년 3월 이후 2021년 10월 인상 사이클 시작 전까지 3.5%를 넘지 않았다.
키위은행의 이코노미스트들은 “RBNZ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플레이션을 낮추기로 결심했다”며 “오늘의 ‘슈퍼 사이즈’ 인상은 중앙은행의 결의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뉴질랜드의 연간 인플레이션은 지난해 1분기에 6.9%, 2분기 7.3%, 3분기 7.2%, 그리고 4분기 7.2%로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올해 1~2월 발생한 폭우와 사이클론 등의 기상 이변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해졌다.
아드리안 오르(Adrian Orr) RBNZ 총재는 “최근 북섬의 기상 악화가 일부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올렸다”고 말했다.
RBNZ은 총수요가 계속해서 총공급을 크게 앞서고 있어 인플레이션에 대한 압력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빨리 달성할수록 인플레이션 하락에 드는 전체 비용을 낮출 것이라는 부연이다.
오르 총재는 또한 모기지 금리를 현행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번 기준금리 인상은 고정 모기지 금리를 크게 올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모기지 금리가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대출자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오르 총재는 “중앙은행은 시장과 대출자들이 너무 일찍 느슨해지는 것을 우려한다. 2월 기준금리 인상 이후 도매 이자율이 오히려 내려가 모기지 이자율에 대한 하방 압력을 주었다. 이에 따라 이번 0.5%포인트 인상이 현행 모기지 이자율을 유지하고 소매 예금 이자율을 올리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고 말했다.
이는 0.25%포인트 인상으로는 모기지 금리의 하락을 우려했던 대목이다.
RBNZ은 사람들이 소비보다 저축을 하도록 금리를 올리기 위해서는 0.5%포인트 인상이 필요했던 것으로 믿고 있다.
RBNZ은 뉴질랜드의 은행 시스템은 견조하기 때문에 최근의 국제 은행 위기로 뉴질랜드에서 금융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금리를 낮출 입장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금리 인상 발표 후 통화는 강세를 보인데 비해 증시는 약세를 보였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뉴질랜드달러화는 0.9% 상승해 강세를 보인데 비해 S&P/NZX 50주가지수는 0.5% 이상 급락하다가 다소 회복하여 0.27% 하락하면서 장을 마감했다.
RBNZ은 향후 2개월의 경제 지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번 인상이 인상 사이클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금리 인상으로 NZ 경제침체 리스크 높아져
ANZ은 RBNZ과 RBA가 양국이 비슷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맞이하면서도 계속해서 놀랄 정도로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ANZ은 뉴질랜드 기준금리 고점을 5.5%로 보고 내년 하반기에 세 차례의 금리 인상을 전망했다.
RBNZ의 매파적인 행보는 뉴질랜드 경제를 너무 긴축하여 경착륙의 위험성을 크게 높여 주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뉴질랜드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4분기 마이너스 0.6%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1~2월 발생한 폭우와 사이클론 등의 기상 악화로 뉴질랜드가 이미 경기후퇴에 빠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2개 분기 연속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기술적인 의미에서 경기후퇴로 본다.
캐피털 이코노믹스(Capital Economics)는 “RBNZ의 지나친 긴축으로 뉴질랜드가 올해 장기 불황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며 “이같은 경기 침체는 너무 가파러 연말에는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웨스트팩의 임레 스페이저(Imre Speizer) 시장 전략가는 “아무도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않았다”며 “시장은 그 충격파를 점검하는데 바쁘다”고 전했다.
뉴질랜드 교역노조카운슬(NZCTU)은 RBNZ이 기준금리 인상을 멈췄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NZCTU의 크레그 레니(Craig Renney) 이코노미스트는 “RBA와 같은 일부 중앙은행들은 기준금리를 동결했다”며 “그들은 통화정책이 상당한 시차를 두고 작용하여 이전의 기준금리 인상 여파가 아직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지표가 사업체들의 인력난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금 이전의 기준금리 변화가 아직 발견되기 전에 추가 인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니 이코노미스트는 “고용이 최대 지속 수준 이상이라는 중앙은행의 주장은 수 만 명의 키위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는 논리이다”며 “최근 실업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인플레이션 관리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그러한 접근 방법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 관리의 영향을 근로자에 두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지속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이다.
투자회사 자던(Jarden)의 존 카란(John Carran)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경제에 미치는 통화정책의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결정이었다고 혹평했다.
데본 펀드 매니지먼트(Devon Funds Management)의 그레그 스미스(Greg Smith) 소매 담당 수석은 “RBNZ의 0.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은 부정적인 놀라움이다”며 “다른 나라들의 중앙은행들은 금리 인상이 경제에 미치는 지연된 영향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 비해 RBNZ은 매파적인 관점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스미스 수석은 RBNZ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준금리를 올린 중앙은행 가운데 하나였고 마지막으로 인상할 중앙은행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4분기 GDP가 시장의 예상과 반대로 하락했고 사업체들의 신되도도 떨어지고 고용시장도 예전만큼 강하지 않으며 수출시장은 압력을 받고 부동산시장은 침체해 있으며 소비자들은 돈이 궁한 상태인 등 뉴질랜드 경제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통받는 키위들 늘어날 듯
국민당의 니콜라 윌리스(Nicola Willis) 재무 대변인은 0.5%포인트 인상은 뉴질랜드 가정에 큰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윌리스 대변인은 “숨을 죽이고 약간의 안도를 기대했던 모기지 대출자들에게 또 한 번의 펀치를 날렸다”며 “뉴질랜드 모기지 대출자들의 절반 정도가 앞으로 6개월 이내에 재고정을 하는데 금리가 기존 3% 이하에서 두 배 오른 수준을 적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윌리스 대변인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매주 수 백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하고 일부는 모기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기간 생활비 위기를 겪고 있는 뉴질랜드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호주,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고 최근의 자연 재해로 물가 상승 압력이 더욱 커진 상황이다.
부동산 정보회사 코어로직(CoreLogic)의 켈빈 데이비슨(Kelvin Davidson)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긴축 통화정책이 이미 금리에 반영되어 이번 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한 모기지 금리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내다봤다.
데이비슨 이코노미스트는 “모기지 금리는 정점에 있거나 그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따라서 주택시장 침체의 첫 장애물이 거의 끝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2월말 현재 3,100억달러 고정 모기지의 55%는 1년 안에 재고정을 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변동 모기지 규모는 360억달러였다.
스쿼럴 모기지(Squirrel Mortgage)의 존 볼턴(John Bolton) 대표는 “아직도 높은 모기지 금리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지만 많은 고통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지난 1월 모기지 대출자들이 적용받았던 평균 모기지 금리는 4.4%로 현재보다 2%포인트 정도 낮았다.
볼턴 대표는 단기 고정금리가 약간 상승할 수 있으나 모기지 금리는 정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론 마켓(Loan Market)의 브루스 패턴(Bruce Patten) 모기지 상담사는 “다른 나라들을 봤을 때 뉴질랜드 기준금리가 이처럼 높게 오르리라곤 정말 예상하지 않았다”며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사정의 모기지 대출자들에게 추가적인 금리 인상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시중 은행들 전체 모기지의 0.3%가 상환 불능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팬데믹 기간의 0.2%보다 약간 높지만 세계금융위기 후인 2009년의 1.2%보다는 크게 낮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