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공식 실업률은 3.2%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고용시장이 구직자 우위이기 때문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이직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 같은 얘기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 고용인들이 많다. 불안정한 고용이나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임시직 근로자들이 그들이다. 뉴질랜드는 특히 계약직, 임시직, 캐주얼직 등 불안정한 고용 형태의 근로자들이 많다. 뉴질랜드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불안정한 고용 구조를 살펴 본다.
실업률 역대 최저 3.2%
통계청에 따르면 뉴질랜드의 지난 1분기 실업률은 3.2%다.
작년 4분기 실업률도 3.2%였다.
이는 가구 노동력 조사가 시작된 1986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노동 공급과 비교해 노동 수요가 충분하지 않아 발생하는 노동인구저활용률은 작년 4분기 9.2%에서 지난 1분기에 9.3%로 약간 늘었지만 1년 전의 12.1%보다는 낮게 나타났다.
통계청은 노동시장이 실업률과 노동인구저활용률이 모두 낮은 긴장 상태를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1분기에 풀타임 고용자 수는 0.5% 늘어 227만7,000명, 파트타임 고용자 수는 2.8% 줄어 54만7,000명으로 집계됐다.
실업자 수는 작년 4분기보다 1,000명 늘어난 9만4,000명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실업자 수는 1년 전에 비해 29.1%나 감소한 것이다.
통계청은 통상적인 시간당 임금도 계속 오르고 있다며 1분기에는 한 해 전보다 4.8% 오른 36.18달러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실업률은 역대 최저이고 사업체들은 마땅한 인력을 구하지 못한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불안정한 고용 구조는 뉴질랜드 사회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고용률은 높다고 하지만 많은 직업의 질은 열악하다.
임금 상승은 생활비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 상승은 지난 20년 동안 고임금 직종보다 크게 낮았다.
불안정한 고용, 노동 상황에 있는 노동자 집단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일컫는다.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지난 2011년 주창한 이 ‘프레카리아트’의 특징으로는 불안정한 직업과 저임금, 사회보장제도에서의 배제 등이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충분하지 못한 근로시간, 때로는 너무 많은 노동시간, 통지없이 변경되는 근무시간, 당장 내일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 얼마나 일이 계속될지 모를 경우, 해고로부터 보호장치 없음, 협상 권한 없음, 노조 가입 제한, 위험한 작업환경에 대해 건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이 ‘프레카리아트’가 겪는 애환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노동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각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집단이다.
지난 1991년 노동시장의 규제 철폐를 단행한 뉴질랜드는 그러한 정책에서 세계 선두이다.
그 조치로 노조 가입과 단체임금 교섭 등이 제한됐다.
산업계는 필요할 때만 인력을 사용할 수 있어 인건비를 절약하고 업무 위험을 근로자에 전가했다.
팬데믹은 이러한 불안정한 직업의 근로자 증가에 불을 붙였다.
전문가들은 노동시장에서 구직자들이 우위에 있고 임금 인상을 요구할 좋은 시기라고 주장하지만 시스템 자체가 그러한 고용인에게 권한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 ‘프레카리아트’에겐 현실성 없는 얘기다.
임시직 근로자의 고용 보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뉴질랜드가 네 번째로 낮다.
민간 부문의 근로자 가운데 10%만이 노조에 가입돼 있고 임금 교섭은 OECD 회원국 중 여덟 번째로 낮다.
작년 AUT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뉴질랜드 사업체의 40%는 직원의 11~50%를 임시직, 캐주얼직, 계약직, 고정기간직 등의 형태로 고용하고 있었다.
19만여 명이 정규직보다 평균 20% 적은 수입을 받는 임시 계약직으로 고용돼 있었고 고용인의 20%는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근로시간이 변동됐다.
지난 5년 동안 두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수는 20% 늘었다.
■ 뉴질랜드 실업률 (자료: 뉴질랜드 통계청)
인력알선회사를 통한 임시직의 증가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식료품, 온라인으로 주문한 상품 등 오늘 우리가 소비하거나 만지고 있는 물건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프레카리아트’의 손을 거쳤다.
창고에서 건설현장, 대학, 정부기관까지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가 뉴질랜드 경제를 돌아가게 한다.
대표적인 시사 월간지 ‘노스 앤 사우스’(North & South) 최근 호에 따르면 오클랜드에 있는 웨어하우스(Warehouse)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페니나(Penina, 가명)는 주황색 조끼를 입고 일한다.
그녀는 켈리 서비스(Kelly Services)라는 인력알선업체를 통해 고용된 임시직이다.
녹색 조끼를 입고 일하는 정규직과 똑 같은 일을 하지만 인력알선업체로부터 받는 임금은 정규직의 80%도 안된다.
가족을 데리고 4년전 사모아에서 이민온 시온(Sione, 가명)은 남부 오클랜드 카운트다운(Countdown) 물류센터에서 슈퍼마켓들에 배달할 상품들을 트럭에 싣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는 카운트다운에 고용된 직원이 아니다.
그는 커버스태프(Coverstaff)라는 인력알선업체를 통해 일하고 있다.
대형 슈퍼마켓들은 물류센터 인력의 3분의 1 정도를 커버스태프를 이용한다.
커버스태프와 카운트다운 어느 쪽도 시온에 대한 지속적인 의무는 없다.
시온이 커버스태프와 체결한 계약서에는 필요한 경우에 일을 배정받는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계약서에는 또한 통지나 사유없이 일을 종료할 수 있지만 시온이 일을 종료하려면 5일의 통지기간을 커버스태프에 주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카운트다운은 인력알선업체를 통한 임시직 노동자의 30%를 6개월 근무 후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단체 협약을 퍼스트 유니온(First Union)과 맺고 있다.
시온도 이를 기대했으나 6개월이 되기 5주 전에 그의 계약은 종료됐다.
페니나는 웨어하우스 일을 그만두고 또 다른 인력알선업체 아고게(Agoge)를 통해 카운트다운에서 6개월 넘게 일한 후 우여곡절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정규직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주문된 물품을 가장 빨리 가져오기 위해 항상 뛰어 다닌다. 임시직은 아무런 권리가 없고 2류 시민 취급 당한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그냥 해고 당한다”고 털어놨다.
카운트다운과 푸드스터프(Foodstuffs)는 계절적이고 많은 양의 작업을 위해 인력알선업체를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웨어하우스, 브리스코(Briscoes), 피셔 앤 페이클(Fisher & Paykel) 등도 인력알선업체의 임시직 직원들을 많이 이용하는 기업이다.
세계적으로 인력알선업은 노동시장의 모든 면을 바꿔 놓고 있다.
세계 10대 인력알선회사들은 지난 2019년 2,240억미국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헤이즈(Hays), 란스타드(Ranstad) 등 이들 회사들은 대부분 뉴질랜드에서도 영업하고 있다.
컨설팅회사 마틴젠킨스(MartinJenkins)의 2019년 보고서에 따르면 뉴질랜드에서 인력알선회사 수는 2000년대 두 배 늘어 600개에 이르고, 이들 회사들을 통해 1년에 적어도 1개월 고용됐던 근로자는 2000년부터 2018년 사이 3배 늘어난 11만5,000명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은 인력알선회사를 통한 아웃소싱으로 채용, 급여, 해고 등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인력알선회사를 통한 파견직은 안정된 직장으로 알려진 정부기관에도 스며 들었다.
사회개발부, 내무부, 기업혁신고용부 등 많은 정부기관들은 경비와 고객 서비스 업무 등을 아웃소싱하고 있다.
특히 IRD는 2018년부터 정규직을 줄이면서 아웃소싱으로 1,200명을 충원했다.
이들은 인력알선회사 매디슨 리쿠르트먼트(Madison Recruitment)를 통해 일하기 때문에 조직내에서 매디소니언(Madisonian)으로 불린다.
그들은 IRD 업무팀에 소속돼 고객 서비스와 세금 환급 등 주요 업무를 수행하지만 보수는 정규직에 비해 휠씬 낮다.
레베카 랭포드(Rebecca Langford)도 IRD 타카푸나 사무소에서 워킹 포 패밀리(Working for Families) 업무를 하는 매디소니언이다.
그녀는 비슷한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연간 1만3,000달러 정도를 적게 받는다고 말했다.
그녀와 다른 7명의 매디소니언은 지난 2020년 고용법원에 그들의 실질적인 고용주는 IRD라고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협상 권한 없는 계약업자
뉴질랜드의 고용 형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계약업자도 외관상으로는 사업을 운영하지만 계약 관계에서는 을의 입장으로 권리와 보수가 제한적이다.
기업혁신고용부가 지난 2020년 택배 운전사, 청소부, 건축업자, 농장 인부, 교육직 등 1,200명의 계약업자를 조사한 결과 59%는 생계비에 충분하지 않거나 겨우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55%는 계약 조건에 대한 협상 권한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은 영어가 제2외국어인 이민자였고 일부는 성장할 수 없는 사업에 갇혀 빠져 나올 수 없다고 털어놨다.
택배 운전사의 80% 이상은 주당 45시간의 고된 일을 하지만 수입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질랜드의 7,700여 우버(Uber) 운전사도 계약직이다.
우버는 그들을 ‘파트너’라고 부르지만 운전사들은 협상 권한이 없는 일방적인 파트너이다.
우버는 전체 운전사의 수를 조절하여 개개 운전사의 수입에 영향을 준다.
우버 운전사의 56%는 충분한 일상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건설업계도 계약 형태의 고용 관계가 표준 관행이다.
오클랜드의 빌더 폴(Paul, 가명)은 “건설 근로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을 하고 싶으면 계약업자로 서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학력자도 저임금 계약직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트 박사 학위와 7만5,000달러의 학생융자를 가지고 있는 앙거스(Angus, 가명)는 캔터베리 대학에서 강사로 일한다.
5개월 고정 계약직인 그의 시급은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캔터베리 대학의 실험실 조교나 강사의 25%는 앙거스처럼 3년 또는 그 이상 동안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앙거스는 주당 6개 그룹을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파트타임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고 병가 혜택이 없기 때문에 아파도 일을 한다.
채점을 하거나 뒤쳐지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은 무급으로 한다.
균열된 조직
기업과 조직들이 비용 절감, 이익 극대화, 위험 전가 등을 위해 만든 현실을 미국의 노동 이코노미스트 데이비드 웨일(David Weil)은 균열된 직장이라고 불렀다.
이전에 내부에서 했던 청소, 경비, 시설 유지 등의 업무는 이제 외부 계약업체에 아웃소싱하고 외부 계약업체는 더 작은 업체에 하청을 준다.
이 균열된 시스템에서 각 주체는 이익을 봐야 하는데 아래로 갈수록 남는 이익 폭은 적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