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상승률이 32년 만에 최고로 치솟아 국민 살림살이가 한층 빡빡해진 것은 물론 기업이나 단체, 나아가 지방정부를 포함한 국가기관에도 한마디로 비상이 걸렸다.
현재 인플레이션은 전 세계 공통 현상인데 그 배경에는 2년 반 넘게 이어지는 팬데믹으로 발생한 국제적인 공급망 문제와 함께 올해 들어서는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쳐 그 끝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는 계층이 크게 늘면서 각국 정부의 고민도 크지만 달리 마땅한 해결책도 없으며 국내 정가에서도 대책을 놓고 말만 요란할 뿐 결국은 취약 계층을 비롯한 일반 서민들만 큰 부담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크라이스트처치 공공시설 공사와 구호기관의 사례, 그리고 통계국의 관련 자료를 갖고 물가 폭등이 현재 얼마나 심각한 실정인지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 캔터베리 다목적 아레나 (CMUA) 예상도
‘산 넘자 더 높은 산’ 격인 ‘인플레이션’ 문제
지난 5월부터 3개월간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도심에 들어설 국내 최대 규모 다목적 경기장인 ‘Canterbury’s multi-use arena(CMUA)’ 프로젝트를 놓고 긴 논란이 일었다.
이 시설은 2011년 2월 발생한 크라이스트처치 지진으로 제이드(Jade) 스타디움이 철거되고 새 시설이 필요해 중앙정부 지원금 2억 2000만 달러와 함께 시청 예산 3억 3300만 달러 등 총 5억 3300만 달러라는 큰 예산을 가지고 2026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었다.
시작 단계부터 시설 규모와 자금 확보 방안을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최종 결정돼 올해 들어 공사를 본격 시작하려던 차에 돌발 변수가 터졌다.
사건은 지난 5월 시공회사가 그 돈으로는 공사를 못 하겠다고 버티면서 시작됐는데, 시공사 입장에서도 자재비와 물류비는 물론 인건비 등이 엄청나게 올랐고 제때 자재 공급도 불투명해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당초 예산보다 무려 1억 5000만 달러가 더 필요하고 게다가 그중 일부는 고정가도 제시할 수 없다고 해 발주처인 시청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데, 공사비 상승은 결국 재산세를 부담하는 시민들 몫인 만큼 시청에서는 한 달여에 걸쳐 시민들로부터 3만 건에 가까운 의견을 취합했다.
결국 응답자 중 77%가 비용이 더 들어도 일정대로 빨리 공사하자는 안을 지지했으며 이에 따라 시청은 시공사가 공사비를 갖고 더 이상 딴소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해 7월부터 작업이 본격 시작됐다.
사실 크라이스트처치 주민들은 지진 이후 시설을 확장 보강한 애딩턴(Addington)의 구 ‘AMI 스타디움’을 슈퍼리그에서 지역 럭비팀인 ‘크루세이더스’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등 그동안 임시나 마찬가지인 경기장을 활용하면서 제대로 된 시설을 하루라도 빨리 마련하기를 원했다.
실제로 이런 시설이 열악하다 보니 내년 7, 8월 열리는 ‘2023 NZ-호주 FIFA 여자축구 월드컵’의 국내 개최도시(4곳) 선정에서도 크라이스트처치는 처음부터 배제됐다.
하지만 시민 염원 속에 고대하던 공사가 본격 시작하려는 찰나 인플레이션이라는 복병이 나타났으니 우려와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시민 의견 접수에서 보인 폭발적인 관심과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 분기별 연간 물가상승률 추이(2018.6~20220.6)
박물관 재개발 공사비 문제 잇달아 터져
그런데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경기장 문제가 풀리자마자 곧바로 이번에는 대규모 재개발 공사를 앞둔 캔터베리 박물관이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박물관 역시 지진으로 시설 개수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지난 2020년에 1억 9500만 달러를 들여 기존 박물관을 확장하고 재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작년 7월에는 자원동의서까지 받았으며 현재는 소장품 이전을 위한 포장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박물관도 결국 인플레이션 불똥을 피하지 못했는데 2020년 재개발 발표 이후 국내 건설비가 12.5%나 오른 상황이라 박물관 측도 일단 예산 5%를 증액했지만 이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자금 마련을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박물관은 ‘캔터베리 박물관 재단 이사회법(Canterbury Museum Trust Board Act 1993)’에 따라 크라이스트처치를 비롯해 인근의 셀윈(Selwyn)과 와이마카리리(Waimakariri) 그리고 후루누이(Hurunui) 등 총 4개 지자체가 자금을 지원하는 독립기관이다.
지난 1870년 작은 건물 하나에서 시작해 지금은 7개 건물로 확장됐지만 230만 점에 달하는 방대한 소장품 중 1%만 전시 중이며 지진 피해는 물론 수장고도 비좁고 비가 새는 등 안전 문제도 많아 재개발이 불가피하다.
현재 박물관 측은 자금 추가 확보를 추진 중이지만 기존 예산에서도 7000만 달러나 부족했던 상황에서 추가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입장인데, 이에 따라 당초 계획했던 내진 작업 축소를 비롯해 전체 공사비를 줄이는 방안도 함께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푸드뱅크 박스
난감하기는 구호 기관도 마찬가지
이처럼 국가나 지자체, 또는 공공기관이 상당 기간 겪어보지 못한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운영이나 사업에 차질을 빚는 일은 이들 사례 외에도 많은데, 이에 따라 현장에서는 계획했던 각종 장단기 사업들이 규모가 축소되거나 연기, 또는 취소되는 일이 무더기로 벌어지고 있다.
한편 기업이나 단체들도 같은 입장인 가운데 각 가정에서도 전례가 없었던 급격한 물가 오름세가 작년부터 계속되면서 슈퍼 가기 무섭다는 말이 나온 건 이미 오래전이다.
지난 2월에도 필자는 ‘전 세계에 밀려오는 인플레이션 공포’라는 제목의 본지 칼럼을 통해 이 문제를 소개했었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서도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국민들이 식품 물가가 10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이자 육류를 포함해 평소에 자주 먹던 이른바 ‘기본 식품(staple foods, 주식)’을 포기하고 식물성 대체 식품으로 눈길을 돌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한 캔터베리 푸드뱅크(foodbank) 관계자가, 수요의 30% 정도를 맞추지 못하는 등 급식소에서 사람들이 요청하는 먹거리를 충분히 제공하는 게 어려워졌다면서, 구호기관들은 특히 도움의 손길을 잘 찾지 않는 취약 계층 노인들에 대한 걱정이 크다고 지적한 내용도 함께 전했다.
당시 푸드뱅크 관계자는, 하루에 5톤 그리고 한 달이면 26만 4000끼니에 달하는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지난 2, 3년간 기부금도 늘어났고 도매가로 재료를 구입한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오르고 화폐 가치 하락으로 구매력이 저하돼 쌀과 같은 일부 품목들은 필요량을 못 사는 실정이라고 말해, 인플레가 발생하면 역할이 커져야 하는 구호기관들의 처지도 오히려 더욱 난감해진 현실을 보여줬다.
위와 같은 보도들이 나왔던 2월 당시 인플레이션은, 작년 12월 분기 기준으로 연간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에 비해 5.9%나 오르면서 32년 전인 1990년 6월 분기의 연간 7.6% 이후 최고 상승률이라고 통계국에서는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은 그 후에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지난 3월 분기에 연간 6.9%로 전 분기보다 더 뛰더니 지난 6월 분기에는 7.3%로 또다시 기록을 세우며 그야말로 천정이 뚫린 듯 치솟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구호 기관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는데 캔터베리 푸드뱅크의 관계자는, 올해 3월까지 1년간 팬데믹 이전 연도에 비해 390만 끼니에 해당하는 식료품을 더 배포했으며 최근에는 푸드뱅크에 전혀 오지 않던 이들도 도움을 찾아 일손 부족으로 직원을 더 채용하기도 했다면서, 이는 팬데믹과 함께 인플레이션 때문이고 해결책은 없으며 모두 이번 인플레를 참고 견뎌내는 수밖에는 없다고 안타깝게 말했다.
또 다른 구호기관인 구세군 관계자도 물가고로 인한 고통이 중산층까지 번지고 있으며 기본적인 먹거리가 가장 문제지만 이번 겨울에 난방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어 땔감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실상을 전했다.
▲ 11개 부문별 물가상승률 기여도(2022. 6월 분기)
계층 가리지 않고 고통 안기는 물가 급등
연금 생활자와 복지수당 수급자 같은 취약 계층은 물론 중산층도 물가 오름세로 비명이 나오는 상황인데, 이런 오름세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상대적으로 서민들에게 더 충격이 크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7월 말 통계국이 공개한 ‘가구 생활비 물가 지수(Household living-costs price indexes, 이하 HLPIs로 표기)’이다.
우리가 아는 ‘소비자 물가지수(consumers price index, 이하 CPI로 표기)’가 전반적인 물가 흐름을 보여주고 주로 국가 재정 정책에 이용되는 것과는 달리 이 통계 숫자는 물가 움직임이 ‘가구 계층별(household groups)’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구분해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두 조사에서 큰 차이점 중 하나는 CPI 측정에는 신규주택 건축비를 감안하지만 HLPIs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주택대출 이자를 포함해 주거비를 감안한다는 점으로 이는 결국 HLPIs가 좀 더 우리 피부에 와닿는 물가 통계임을 알게 한다.
이 조사는 우선 전체 가구를 복지수당 수급자(beneficiaries) / 마오리 / 노후연금 생활자(superannuitants), 그리고 ‘소득(income quintiles)’과 ‘지출(expenditure quintiles)’ 규모를 각각 5분위로 나눈 그룹 등 전체적으로는 모두 13개 그룹으로 나눠 샘플링을 통해 조사한다.
조사 결과 지난 6월 분기 집계된 ‘가구 생활비 물가지수’는 전년보다 7.4% 상승했고 이는 같은 분기에 7.3%였던 CPI보다 오히려 0.1% 포인트 높았다.
또한 그 내용 중에는, 14년 전인 2008년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당 조사가 시작된 이래 이번에 처음으로 13개에 달하는 모든 그룹에 속한 가구가 ‘가장 높은 생활비 물가의 상승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 지금 물가 상승이 모든 계층에 걸쳐 이전보다 훨씬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모든 가정의 HLPIs 상승에 특별히 영향을 미친 부문은 주거비와 연료비였는데 하지만 두 분야가 영향을 미친 정도는 그룹별로 상대적인 차이가 났다.
또한 CPI에서는 신규주택 건설비가 2022년 6월까지 연간 18% 상승했지만 HLPIs에서 파악한 주택대출 이자는 연간 31%나 증가한 것으로 집계돼 각 가정에서 이자 부담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도 잘 보여준다.
참고로 중앙은행은 물가를 잡고자 작년 6월 0.25% 수준이었던 기준금리를 올 6월 분기에 2.0%까지 급하게 올렸는데, 이를 보면 물가 때문에 취한 중앙은행 조치가 결국에는 가계에 부담으로 되돌아오는 역설적인 모습도 확인된다.
▲ 기준금리 변동 그래프(2000~2022.7)
중앙은행은 내년 말 물가 잡힌다지만…
한편 ‘최소 지출의 저소득 그룹’과 ‘복지수당’ 그룹은 연간 HLPIs 상승률이 6.5%였던 가운데 이 두 그룹은 특히 휘발유 및 임대료, 식료품 및 이자에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했으며 그중 수당 그룹은 전체 지출의 약 3분의 1을 임대료로 써야만 했다.
이는 평균 그룹이 약 14%, 그리고 최대 지출의 고소득 그룹이 여기에 약 5%를 쓰는 것과 비교되는데, 결국 이 그룹은 임대료 부담이 크고 그러다 보니 임대료 상승에도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오리 그룹은 연간 HLPIs가 7.6% 올라 평균인 7.4%보다 높았는데, 배경에는 주로 휘발유 및 이자 지급, 임대료 및 식료품 가격 오름세가 있으며 마오리 그룹 역시 평균인 14%보다 높은 20%를 임대료로 썼는데, 마오리는 휘발유 등 교통비에 상대적으로 조금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HLPIs 통계를 보자면 그룹별 상대적 차이는 있지만 말 그대로 돈 걱정 없는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 국민이 물가고를 겪는 중인데, 하지만 특히 저소득층 등 일반 서민의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물가 상승이 필수적 소비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지난 6월까지 CPI 상승에서도 주거비 및 가계공공요금이 연간 9.1%, 그리고 교통 운송비가 14%나 올랐으며 치즈와 우유가 포함된 잡화식품류가 7.1%나 오르며 전체적으로 6.5% 오른 식품물가 등 서민 생활에 가장 영향을 주는 3개 부문이 인플레이션을 주도했다.
한편 물가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자 정부는 3월부터 휘발유세를 리터당 25센트 인하하고 4월부터 대중교통 요금 절반 할인 등 물가 안정책을 내놨고 이는 지난 6월 분기 물가 통계에 감안됐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물가는 이전 분기보다 오히려 더 뛰어 정책 당국을 곤혹스럽게 했다.
급기야 정부는 8월부터 3차례에 걸쳐 인당 총 350달러에 달하는 ‘생활비(Living Payment)’를 210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에게 지급하는 현금 살포까지 하는 상황이지만 7월에도 기준금리가 또 0.5% 포인트 오르고 추가 인상까지 예고되는 등 물가 오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개선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이 역시 ‘언 발에 오줌누기식’ 미봉책에 불과하다.
지난 5월 중앙은행은, 국내 인플레이션이 올해 7%로 정점을 찍고 더 오르지 않고 내년 말에는 중앙은행 목표(연 1~3%)에서 높은 범위로 다시 돌아온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중앙은행의 낙관적 전망에 불과하며 현재 여러 상황은 생각보다 물가를 잡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고 경고했는데, 실제로 지금까지 중앙은행 예상보다 물가 상승률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비록 중앙은행의 예상이 맞아떨어진다 하더라도 이는 앞으로 최소한 1년 반가량은 각 가정이 고물가로 인한 시달림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남섬지국장 서 현